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00화 (100/187)

100화

대기실 한쪽 구석에서 발걸음을 멈춘 시우는 코너를 보고 선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무대 동선과 안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리액션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솔직히 무슨 정신으로 버티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리액션이 끝나고 점심은 어떻게 먹었는지, 연습실에서 마지막으로 단체 군무를 확인한 것도 저녁 식사로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수면 유도제를 챙겨 먹었다. 에반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조차 무시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에반이 제 옆에 있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곤하게 잠들어있는 그를 봤지만, 그것 역시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샵에 도착해 메이크업과 헤어를 연출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잠시 후면 사전녹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쉬고 나면 본방송.

심장이 쿵쾅거리고, 모든 것이 몽롱하게만 느껴졌다. 눈을 감은 채, 입으로는 노래를 중얼거리고 두 손끝이 안무 포인트에 맞춰 조금씩 움직였다.

시우에겐 참으로 오랜만의 무대였다.

솔로 가수가 아닌 그룹으로 생각하면 더 까마득하다.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작긴 하지만 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던 곳. 짙은 화장과 비슷하게 맞춘 의상. 멤버들과 스태프들로 북적거리는 대기실의 분위기가 낯설게만 다가왔다.

지금이 현실인지 과거인지 모든 것이 모호했다.

“하아…….”

그렇게나 연습했는데 몸에 완전히 익은 안무지만 잊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자신의 작은 실수 하나가 팀원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안무를 떠올리며 까딱거리던 손끝이 모아들고 어느새 그의 두 손엔 잔뜩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졌다.

방금 리허설도 성공적이었다. 사전 녹화이기에 큰 문제가 생기면 다시 촬영할 수 있다.

그러니 괜찮다. 잘할 수 있다.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된다.

괜찮다. 괜찮다. 모두 괜찮을 거야. 미끄러지지도 않을 것이고, 발이 꼬이지도 않을 것이며.

“멍청이.”

머릿속으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를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되뇌던 시우는 저를 감싸는 온기에 입안으로 중얼거리던 말을 멈췄다.

“솔직해지라니까, 잘할 수 있어. 실수하면 다시 하면 되고. 제일 중요한 건 다치지 않는 거야. 다치지만 않으면 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다정하게 속삭이는 에반의 목소리에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부정적인 생각들도 서서히 옅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떤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에반의 말대로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무대 서는 거라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자 박하향이 진하게 다가왔다. 이어 자연스럽게 숨을 내뱉자 진하던 향이 사그라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다치지만 않으면 돼.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안무를 멈춰.”

뒤에서 끌어안았던 에반의 손길에 시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야 했고, 벽이 아닌 에반을 마주했다.

“그럴게.”

“도입 부분에서 균형 잃지 않게 조심하고.”

“응.”

“계단 조심해서 내려오고.”

“알겠어.”

“엔딩 때는 확실하게 몸에 힘 빼고.”

상체를 살짝 숙여 시우와 눈높이를 맞춘 에반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끔은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면서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에반은 제 감정을 읽는 것 같았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향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시우는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코코 말도 잘 듣고, 나중에 상 줘야겠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하는 말에 잔뜩 굳어있던 시우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오르고 끝내는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우. 인이어 착용했어?”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시우는 두 손을 들어 바로 앞에 있는 에반의 어깨를 가볍게 툭 밀었다.

누가 누굴 어린애 취급이야. 네가 진짜 내가 살아온 시간을 알면 절대 이러지 못 할 거다.

속으로 생각하며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에반의 모습에 시우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비켜. 나 찾아.”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툭 밀었지만, 역시나 에반은 제 앞을 비켜주지 않았다. 넓은 대기실의 한쪽. 파티션 뒤쪽에 있는 벽 코너였으니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었다.

방금까지 눈높이를 맞춰 몸을 숙이고 있다가 몸을 바로 한 에반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쉽게 비켜줄 것 같지도 않았다.

“시우 어디 갔어? 누구 시우 못 봤어?”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시우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에반을 올려다보고는 그가 입고 있는 검은 셔츠를 살짝 잡았다. 그리고 제게로 가볍게 당겼다.

밀었을 때는 미동도 않던 그의 몸이 쉽게 움직였고, 이제 그의 잘난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미소를 지은 시우의 입술이 에반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래도 안 비켜줄 거야?”

일부러 과장되게 눈을 깜박거리며 시우가 얼굴을 더 들이밀자 에반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틈을 타고 시우의 작은 몸이 쏙 빠져나갔다.

“저 여기 있어요!”

에반이 다시 시우를 잡기도 전, 큰 목소리로 대답한 시우가 파티션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홀로 남은 에반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말해서 시우는 애교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갑지도 않았다.

먼저 말을 걸고 다가가는 건 에반이었고, 늘 그 자리에 있거나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시우는 그를 받아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훅 들어올 때면 에반은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산다.”

시우에게 전해지지 않겠지만, 에반은 차가운 벽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고 중얼거렸다. 진한 키스도 아니고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에 몸이 달아버린 제겐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제 명에 못 살겠다. 이 미친놈아.”

벽에 이마를 댄 채, 자괴감에 빠져있던 에반은 제 등을 후려치며 험한 말을 거침없이 하는 찬의 행동에도 어떤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그가 왜 그러는지 익히 잘 아니까.

“멤버들이야 다들 알고도 눈감아주지만, 밖에서까지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형도 알잖아요. 마음대로 안 되는 거.”

“나가는 대로 상준이한테도 슬쩍 묻혀놔.”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안 그러네.”

에반의 말에 찬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어떻게 모른단 말인가? 나름 시우는 조심하는 것 같고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에반은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모르고 본다면 그냥 친한 멤버인 것 같지만, 시우에게 묻혀놓은 그 진득한 페로몬을 안다면 절대 그리 말하지 못할 것이었다.

대놓고 내 것이라고 마킹을 해뒀는데 어떻게 모른단 말인가? 상준이야 베타니 모른다 쳐도 그 순진한 예찬이 놀라서 자기에게 달려온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알파와 오메가가 많은 연예계였다. 지금 대기실 안엔 모두 베타였지만, 당장 바로 옆 대기실에도 알파가 있었다. 피디도 알파라고 했던 것 같고, 어쨌거나 대기실을 한 발자국만 나가도 누군가에 들킬 수 있었다.

아니면 이곳을 지나치던 알파나 오메가가 지금 에반이 시우에게 묻혀놓은 페로몬을 느끼는 순간 비밀이 어딨는가 그 날로 스캔들이지. 그러니 멋모르고 돌아다니는 시우에게 찬과 예찬이 자신들의 페로몬을 덧씌워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상준에게도 그들의 페로몬을 묻혔다.

이렇게 한다면 같은 그룹원들의 페로몬이 묻었겠거니라고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우에게만 나는 것도 아니고 상준에게도 난다면 조금 더 숨기기 쉬울 테고.

“적어도 일방통행은 아니지?”

“형 눈에는 일방통행으로 보여요?”

찬은 씩 웃는 에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놈 보소. 하긴 둘이 끌어안고 자는 것도 봤는데,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절대 누군가와 잠자리를 공유하지 않던 시우와 에반이었다.

그런 그들이 부쩍 붙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친해지길 바라’까지 제가 부추겼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난 모르겠다.”

“형. 시우한테는 비밀.”

“뭐?”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 쉿 하는 에반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시우는 비밀연애 하고 싶댔으니까, 모른 척해달라고요.”

“이렇게 티 다 내놓고 비밀연애? 장난하세요? 눈새 예찬이도 다 안다. 이제.”

“시우한테만 다른 사람이 안다는 거 안 들키면 돼요. 시우만 비밀연애로 아는 공개 연애하지 뭐.”

“아…… 속 시끄러. 활동에 피해 가면 널 죽여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페로몬. 쫌. 쫌! 조심해라잉. 너도 빨리 나와서 무대 올라갈 준비해. 곧 사녹 시작이다.”

목소리를 낮춘 채 협박하듯 으르렁거린 찬이 에반의 팔뚝을 한 번 더 쳤지만, 에반은 능글맞게 씩 웃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착용하는 인이어를 만진 시우는 천천히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무대 중앙에 있는 단 위로 올라섰고,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날개 앞에 섰다. 그러자 그를 따라 올라온 스태프들의 손길이 빨라졌다. 날개가 붙어 있는 검고 긴 재킷에 팔을 끼웠다. 시우의 무대 의상이 재킷에 모두 가렸다.

처음엔 날개를 달고 있어야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시우는 눈을 감았다.

작은 소음들로 가득한 공간이 느껴지자 심장이 점차 빨리 뛰기 시작했다.

가장 긴장되면서도 흥분되는 시간이다. 무대가 시작하기 직전 그 특유의 적막감.

강한 스포트라이트 불빛이 눈앞을 밝혔다.

그리고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에 시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상체를 감싸고 있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자 입고 있던 검은 재킷이 찢어지면서 제대로 된 시우의 무대 의상이 드러났다.

몸에 타이트하게 핏 되는 검은 가죽바지와 시스루 소재의 하늘거리는 흰색 셔츠가 시우의 움직임을 따라 나풀거렸다.

항상 꿈꿔왔던 순간.

인이어로 들리는 선명한 곡과 그 뒤로 깔리는 환호성. 생동감 넘치는 무대.

잔뜩 굳어있던 시우의 입가에 조금씩 미소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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