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작은 소동과 함께 시작된 일과는 시우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씻고 나왔을 땐, 예찬과 찬은 벌써 스케줄을 하러 떠나고 없었다.
시우는 지금 제가 있는 곳을 천천히 둘러보다 마지막엔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회귀했을 때는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여름이었다. 그때엔 막막하기도 하고 답답한 나날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멤버들과 친해지고, 오션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에 참여하고, 리허설을 하고 무대에 섰다.
처음 1위를 했을 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오션의 구호를 외치고, 수많은 인터뷰를 했다.
예능에 출연하고,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팬들을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긴 시간 자신이 바랐던 모든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회귀한다면 이제는 정말 이쪽은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금은 울긋불긋하게 물든 단풍잎도 거의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엔 나뭇잎이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때 나뭇잎 하나가 팔랑거리며 허공을 떠돌았다. 힘없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노라니 우울한 감정이 몰려와 시우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 같다.
지금 난 왜 한의원에 있을까.
저녁 스케줄이라고 해 놓고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깨운 이유가 이곳에 오기 위함이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앞으로 남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보약이라도 지어 먹자니.
그만큼 뺑뺑 돌려 수익을 내겠다는 거겠지.
철도 씹어 먹을 스무 살 이 나이에 웬 한약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약 같은 걸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한의원은 번화가 한가운데 있는 깔끔하고 화려한 곳이 아니었다. 고즈넉한 교외에 자리한 곳.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것 같은 한의원을 보는 순간 시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담하게 잘 꾸며진 정원이라든지 대청마루도 신기했고, 집 안 전체에 은은하게 밴 한약 냄새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한의원이라기보다 그냥 사극에서 보던 대감집 같은 느낌이 강했다.
오랜 시간 사용해 손때 앉은 원목 한약장이 가득한 방에서 시우는 격자창 너머 소담한 안뜰을 보고 있었다.
앉은뱅이책상 너머엔 한복을 입으신 나이 지긋한 한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먼저 진료를 받은 상준 형은 금방 나오는 것 같더니, 벌써 몇 분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한쪽 손목을 한의사 선생님께 맡긴 채, 얌전히 있던 시우는 작은 한숨 소리에 얼른 그를 바라보았다.
“불편한 데는 없고?”
“불면증이 있어요.”
여전히 손목의 맥을 짚은 채, 질문을 하시기에 얼른 대답했다.
“얼마나?”
“며칠씩 제대로 못 자면 수면 유도제를 먹기도 해요.”
“또 다른 건?”
“……피곤하고 몸이 무겁고 그런 건 제가 다 바빠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런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데 활력이 넘치고 몸이 가볍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 종이에 한자로 무언가를 쓰시는 걸 보던 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발도 차고, 몸도 차고.”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하시는 말씀이 맞기에 시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날 추워지니 당연히 손발이 차겠죠, 몸도 차고.
“흐음…….”
한참을 펜을 놀리시던 한의사 선생님의 시선이 시우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그가 방금까지 펜을 쥐고 있던 손을 내밀기에 얼떨결에 다른 손도 내밀었다. 그러자 이내 한의사에게 두 손목이 잡혔다.
제 양쪽 손목을 잡고 눈을 감으시는 그 행동에 뭐라고 질문을 하기도 난감했다.
한의원에 처음 와 봤으니 치료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알 리가 있나.
그렇게 한의사 선생님께 손목을 맡긴 채, 다시 가을의 끝물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창밖을 보던 시우는 작은 문소리와 함께 나는 인기척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큰 에반이 문지방을 넘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 개별 스케줄이 있는 줄 알았더니, 예찬과 찬은 병원에서 페로몬 검사 후 촬영장으로 온다고 했다. 영국에서 약을 보내 줄 것이라는 에반은 시우, 상준과 함께 한의원에 온 것이다.
“이제 뭔가 맞는 거 같군.”
에반과 시선을 마주한 채 싱글거리던 시우는 에반이 제 옆에 앉음과 동시에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런가요?”
이게 무슨 대화일까? 한의사 선생님은 자신이 아닌 에반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
시우는 제 손목을 놓고는 적어 놓은 것에 대충 줄을 긋고 다시 펜으로 무언가를 적으시는 선생님을 한번 보고 옆에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뭐야? 뭔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시우는 에반의 다리를 툭 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제가 진맥을 받았는데, 왜 둘이서 대화를 하는 것일까?
“하영이 아들이라더니 제 어미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네.”
“그렇게 보이세요?”
“제 아비 판박이고만. 하영이 부탁도 있고 하니 친구들 약은 좋은 걸로 잘 지어 보겠네.”
진짜 뭔데.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에반의 어머님과 한의사는 친분이 있는 것 같다. 편하게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이며 아마도 이곳에 오기 전 어떤 말이 오간 듯했다.
“자네는 불면증도 있고 손발도 차고 전체적으로 몸이 허해. 그래서 앞서 진료받은 이보다 오래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할 게야.”
방금까지 에반을 보고 있던 한의사 선생님이 시우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하시는 말씀에 시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진료 끝인가?
“이제 나가 봐도 되네.”
명백한 축객령에 시우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에반은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꺼냈다.
“자네가 들어오자마자 맥이 확 바뀌는데 어찌 몰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요상하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쉽게 확인할 수 있는지 몰랐네요. 병원에 갔더라면 온갖 검사에 며칠이나 걸릴 일이잖아요.”
“맥 자체가 아예 다른데 어찌 모를까. 그나저나 저 아이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자네가 미리 한 말이 있어 말하지 않았네만.”
에반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시우도 알아야 한다.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아야 할 부분이었다. 제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어머니와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한의사가 불편한 안건을 꺼내자 에반은 슬쩍 말을 돌렸다.
“네 아비 만나 먼 곳으로 간 이후에야 자주 못 봤지. 하영이도 저 아이처럼 늦되게 나타나서 고생을 많이 했어.”
“이 사실,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다른 이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제가 그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내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리 멀지 않아 제대로 나타날 것인데 굳이 왜 그러나.”
에반은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시우를 보는 순간 그가 히든 오메가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저 역시 제가 그리 느끼는 것일 뿐 확실하게 그가 오메가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감정 동화부터 저만 느끼는 그의 페로몬, 이런 모든 것들이 히든이라는 단어를 연상시켰지만, 그 모든 것이 제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시우가 오메가인지, 그것도 히든 오메가인지 확인하자고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아무리 입막음을 한다고 해도 시우가 오메가 검사를 받는 순간 그 사실은 금세 퍼져 나갈 것이다.
거기다 알파, 오메가에 대해 조예가 깊다는 페이든도 호들갑을 떨 정도인 히든 오메가인 것이 밝혀진다면 그 뒤를 따라올 파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떠들 것이며, 의학계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덤벼들 것이다.
유명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에 오메가 그리고 알파, 베타의 혼성 그룹. 말 그대로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조금이라도 평범하고 싶어서요. 이미 그러긴 틀린 것 같지만요.”
에반의 말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가 길어졌다. 잠시 후 진료실을 나서는 에반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너 어디 갔다 오냐?”
문밖에서 기다리던 대환을 따라 치료실로 들어간 에반은 저를 보자마자 말을 건네는 상준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상의를 벗고 엎드려 있는 그의 등에 꽂힌 빼곡한 침을 보자 무언가 아찔해졌다.
설마 시우도…….
에반의 시선이 다급하게 주위를 훑었다.
이내 상준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창가 쪽 침대에 누워 있는 시우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아시는 한의사 선생님이셔서 중간에서 안부 좀 전했죠.”
“어쩐지…….”
상준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한 에반의 발걸음이 시우 앞에 멈췄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정원을 보는 시우는 아직 제가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랫배를 조금 내놓고 그 위에 작은 무언가를 올리고 있었다.
끝이 붉은 것이 연기도 조금 나는 것 같은데……. 작은 불씨를 배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 상준처럼 헐벗고 고슴도치가 되어 있는 것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반대일까?
그나저나 시우에게 언제 어떻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설사 시간이 난다고 해도 이런 심각한 대화에 앞서 지친 시우를 재우는 것이 먼저였다.
시우가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은 에반은 그의 귀에 꽂혀 있는 무선 이어폰 한쪽을 가져와 제 귀에 끼웠다. 다른 사람의 노래도 아니고 얘는 무슨 오션 1집을 듣고 있어.
“안 뜨거워?”
어느새 자신을 보고 있는 시우에게 에반은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돌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그가 오메가이든 히든 오메가이든 적어도 언론에 시달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따뜻해. 나도 뜨거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적어도 상준 형처럼 고슴도치가 되진 않았잖아.”
“야! 고슴도치라니! 나도 아프진 않다고.”
시우의 말에 바로 상준이 버럭 했다.
“아냐. 아까 나 들어왔을 때, 상준 형 침 맞는 중이었는데, 몇 군데서 피 났었어.”
“말하지 마! 김시우. 그런 말 하지 마.”
피를 싫어하는 상준이 극구 부인했다.
“원래 안 좋은 자리는 피가 좀 날 수 있다더라.”
시우의 말에 대환까지 끼어들자 그들만 있던 조용한 치료실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아, 이런 걸 SNS에 올려야지. 팬분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
여기서 가장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 에반이 일어났다.
“자……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콘셉트 좀 잡고 찍읍시다.”
그의 말에 방금까지 편안하게 있던 상준과 시우가 분주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