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07화 (107/187)

107화

한의원에서 진료받는 상준과 시우를 찍은 에반은 바로 SNS에 업로드했다.

에반이 SNS에 올린 사진의 온도 차는 너무나도 극심했다.

상의를 탈의한 채, 등에 빼곡히 침을 맞고 있는 상준의 사진엔 어떤 정성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반면 창가 자리에서 붉고 따뜻한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노을을 받으며,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잠든 것처럼 보이는 시우의 평온한 얼굴 사진엔 애정이 가득했다.

“야! 너 사람 차별하냐?”

에반이 올린 SNS를 확인한 상준이 또 한 번 버럭 했지만, 에반은 그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무슨 차별이에요. 형 자리가 노을빛이 안 드는 어두운 안쪽 자리였고, 그렇게 엎드려 있는데 어떻게 얼굴이 잘 나오는 사진을 찍어요. 대신 댓글은 형 이야기 하는 게 훨씬 많잖아요.”

그래, 비밀 연애 아닌 비밀 연애를 하는 커플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상준은 그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야만 했다.

“놀러 가고 싶다.”

“그러게. 오는데 보니까 한 일주일만 지나면 낙엽 다 지겠더라. 이럴 땐 캠핑인데, 좀 서늘하게 춥다 싶을 때가 캠핑의 꽃이잖아. 너무 덥고 추울 때는 힘들고. 딱 지금 같을 때.”

“형, 캠핑 가 봤어요?”

“어릴 때 부모님과 많이 다녔지. 텐트 치고 밖에서 고기 구워 먹고. 그 잔열에 고구마도 굽고. 별도 보고. 침낭에서 잠도 자고.”

SNS에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던 에반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진 않았지만, 이내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SNS가 아닌 메시지 창을 열었다. 못 할 게 뭐 있는가? 캠핑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 * *

“이걸 보고 목적지까지 찾아오라고요?”

제작진이 건넨 지도를 받아 든 찬의 표정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내비게이션이 나온 게 언제인데, 갑자기 지도라고요?

“네. 저희가 지도 확인 다 했으니 잘 찾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두 팀 중 먼저 도착한 팀에게는 큰 상품이 있을 것이니 기대해 주시고요.”

시우는 에반이 받은 지도를 가져와 펼쳐 보았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본 적은 없는데.

“여기를 기점으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니 참고해 주시고요. 무엇보다 안전 운전이 제일입니다. 차량 내비게이션은 이미 저희가 손을 봐 둬서 접속이 안 될 겁니다. 차량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니 추후 확인해서 혹시나 휴대전화에 있는 내비게이션 사용한 것이 드러나면 바로 무효 처리됩니다.”

제작진의 설명을 들은 멤버들은 이미 준비된 차량에 올랐다. 굳이 팀을 나눌 것도 없었다.

누가 운전할 것이냐는 것을 두고 예찬과 상준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이 에반은 당연히 운전석으로, 시우는 말없이 조수석으로 향했다.

현시점으로 시우는 운전면허가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2집 활동이 끝나면 제일 먼저 운전면허부터 따야 할 것 같다.

“진짜 캠핑할 줄은 몰랐네.”

“다들 지쳤으니까 좀 쉴 시간도 필요하잖아.”

“형! 형! 들려요?”

안전벨트를 하고 출발하자 제작진이 준 무전기에서 예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 어떻게 써?”

“거기 옆의 버튼 누르고 말해 봐.”

“예찬아, 왜?”

무전기를 들고 이리저리 만지던 시우는 에반이 알려 준 대로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중간에 휴게소 들를 거에요?”

예찬의 질문에 시우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쉬면서 가야지. 오늘 일정 급한 거 없잖아.”

아니. 내 손 말고 무전기를 가져가라고. 무전기를 들고 있는 제 손을 끌어 제 입가에 대고 말하는 에반을 보며 시우는 피식 웃었다.

“오! 상품 욕심 없나 봐?”

무전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저쪽 상황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미 이긴 게임입니다.”

상준의 목소리에 에반이 여유 있게 대답했다. 잠시 이런저런 짧은 대화가 오갔지만, 이내 무전은 잠잠해졌다.

눈을 뜨면 숍으로 가고, 밴에 타라면 타고 내리라면 내리고, 음악 방송이면 거기 맞춰서 춤추고 노래하고, 인터뷰면 미리 준비된 답안에 맞춰서 대답하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머리가 어디에든 닿으면 자고, 배가 고프면 눈에 띄는 음식을 먹었다. 계속 반복되는 일정에서 추가된 것은 아침마다 먹어야 하는 지독하게 쓴 한약이었다. 도대체 이걸 왜 돈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것인가? 회의에 빠진 시우의 앞에는 꽉 막힌 벽 같은 에반이 있었다. 다른 것들은 다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한약 앞에선 왜 그렇게 강경한 것인지.

애원하고 빌고 애교를 떨어도 에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엔 다디단 초콜릿이 있었다.

평일 낮 시간 이동하는 차량이 많지 않은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시우는 제가 들고 있는 지도를 확인했다. 도대체 얘는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 묻지도 않고 운전을 하는 건가?

“너 어딘지 알아?”

시우는 지도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이걸 보고 어떻게 찾아가.

“뭐 어디든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뒤에 스태프 차량도 따라오잖아. 문제 되면 무전 오겠지.”

“이러다 부산 가겠네.”

지나치는 도로 표지판을 확인한 시우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부산 가고 싶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기 앞에서 좌회전인가 보다.”

“좌회전? 알겠어.”

길을 말해 준 시우는 미리 제작진이 준비해 준 음료와 먹거리가 든 작은 가방을 열었다. 오늘 촬영은 ‘Ocean Story’였다. 멤버들을 고생시킬 이유가 없었기에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었다.

“커피? 아메리카노 있고, 라테 있어.”

“아메리카노. 거기 귤 좀 줘.”

시우의 설명에 에반이 대답하자, 시우는 아메리카노와 귤을 꺼냈다. 에반이 먹기 쉽게 아메리카노엔 빨대를 꽂아 두고, 귤을 집어 들어 손바닥으로 굴렸다.

신호에 걸리자, 에반은 휴대전화를 조작해 드라이브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을 틀었다.

“활동 끝나면 여행 좀 다녀야겠어. 진짜 좋다.”

차창을 조금 연 시우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많은 추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깐 귤 한 조각을 운전 중인 에반의 입에 넣었다.

“가고 싶은 곳 있어?”

시우가 주는 귤을 받아먹은 에반은 좌측이 아닌 우측으로 핸들을 돌렸다.

“야! 야……! 왼쪽! 좌회전!”

“아……! 그랬어? 표지판을 잘못 봤네.”

“으이그. 지도 다시 봐야 하잖아.”

시우는 손에 들고 있던 귤을 제 입에 넣고는 다리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코코. 여행 가고 싶은 곳 어디냐고.”

“한적하고 조용하고 자연을 많이 볼 수 있는 곳? 흐음, 길이 이렇게 되면 국도 타야 하나? 고속도로가 빠를 텐데.”

에반의 말에 대답하고는 집중해서 지도를 보는 시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우는 검지 끝을 지도에 대고 길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전체적으로 큰 지도가 제일 앞 장이었고, 뒤로 넘기면 부분 지도들이 있었기에 얼른 지도를 팔랑거리며 넘겼다.

“우리 집에 갈까?”

“응? 영국에 가자고? 러쉬랑 록시 보고 싶네. 걔들 잘 지내지?”

“잘 지내겠지.”

“오! 저기 앞에서 좌회전이래. 너도 봤지?”

마침 지나치는 도로 표지판에서 방향을 확인한 시우는 귤 하나를 더 꺼냈다.

“봤어.”

시우의 손에서 껍질이 홀랑 벗겨진 귤은 에반과 그의 입 속으로 사이좋게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우와 에반은 카메라 앞에서 할 수 있는 무던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좌회전!! 좌회전. 아까 좌회전이라고 했잖아.”

좌회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또 우회전하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냥 내가 운전을……. 하, 운전면허. 나 왜 운전면허 확인 안 했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시우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퍽퍽 쳤다.

“시우 씨, 지금 지도 확인하고 계세요?”

역시나 무전기에서 제작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째야. 시우는 실실 웃고 있는 에반을 흘겨보았다.

“죄송해요. 에반이가 착각했대요.”

“다음번에 꼭 좌회전해서 고속도로로 진입해 주세요.”

오죽했으면 제작진이 이런 말을 할까. 이쯤 되니 스무 살. 운전 초보라서 그런 것인지 의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들었지?”

“응.”

“대답은 잘해요.”

뾰로통한 시우의 말에 에반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지 마!”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웃음을 감추지 못한 에반이 능글맞게 받아치자, 시우는 아예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촬영은 핑계다. 시우가 여유롭게 캠핑하며 쉬고 싶다고 했기에 휴식기에 촬영할 기획안을 앞으로 당겼다.

적당히 분량도 나온 것 같고, 지금부터 제가 저지를 일을 시우가 알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에반은 슬슬 페로몬을 풀었다. 제 페로몬의 변화를 느꼈는지, 흘깃 자신을 보는 것 같았지만 큰 움직임은 없었다.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에반은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지도가 완벽하게 들어가 있었다. 제작진이 준비했다는 상품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냥 쉬엄쉬엄 가면서 잠이 부족한 시우도 재우고, 경치 좋다는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해 지기 전에 캠핑장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제작진이 말한 방향이 아닌 다른 쪽으로 핸들을 꺾는 에반의 입에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에반 씨, 시우 씨. 지도 보는 것이 어려우신가요?”

다른 방향으로 향하자 곧바로 제작진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제가 표지판을 또 잘못 봤네요. 이렇게 된 거 한 군데 들렀다가 가죠.”

“네?”

“근처에 전망 좋은 카페가 있더라고요. 제가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어차피 가다가 휴게소든 어디든 잠시 들러 쉴 거잖아요.”

제작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에반은 무전기를 꺼 버렸다. 시우가 자는데 괜히 삐빅거리고 울려서 방해받을 이유가 없었다.

아, 카메라를 어떻게 가리지? 꺼 버리는 건 너무 티가 날 것 같고. 무언가로 가리기에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카메라를 가려야 손도 잡고 잠든 얼굴도 구경하고 할 텐데. 이래서 비밀 연애는 불편하다니까.

신호에 걸리자 에반은 핸들에 엎드려 깊게 잠든 시우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에반은 얼른 몸을 움직였다. 곧 조수석 의자가 편안하게 뒤로 젖혀지고 에반의 재킷이 시우를 감쌌다.

그 모든 행동을 끝낸 그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