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13화 (113/187)

113화

갑갑함에 머리를 든 시우는 떠지지 않는 눈을 껌벅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만 들었을 뿐인데도 방금과는 다른 싸한 기온이 느껴졌다.

어둑어둑한 빛이 들어오는 곳을 두리번거린 시우는 엎드려 있는 몸을 웅크렸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제게 한쪽 팔을 내어 주고 잠든 에반이 보였다.

2인용 침낭에 꼭 붙어 잤으니 갑갑할 수밖에. 텐트 안에 에반과 둘이 있는 것을 확인한 시우의 입에서 작은 하품이 흘러나왔다.

시우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아직 멍한 머리로 오늘 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정오쯤 출발한다고 했고, 그 전까지는 자유 시간이라고 한 것이 떠오르자 갑자기 억울해졌다. 더 잘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깼는데 다시 누워 자는 것도 그렇고.

진하게 커피나 타 먹고 아침 산책이나 할까? 시우는 눈을 비비던 손으로 이번에는 부스스하게 떠 버린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

“이제 8시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옆에서 꼬물거리는 시우의 행동에 어설프게 잠이 깬 에반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만지는 시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영화 다 못 봤어.”

“활동 끝나고 시간 많을 때 다시 보면 되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시우를 향해 에반의 몸이 움직였다. 눈뜨자마자 내뱉는 말이 영화를 끝까지 못 봤다는 투정일 줄이야. 에반은 거의 다 깬 것 같은 시우를 품으로 당기며 눕히는 것보다 그에게로 몸을 굽혀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는 것을 택했다.

“응. 놔줘. 나 나갈래.”

제 머리를 만지던 손으로 에반의 머리를 슬슬 쓸어 주던 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밖에 추워.”

자신의 품으로 더 파고드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기 다람쥐 있대. 나가서 보려고.”

“내 옷 입고 가.”

“응.”

시우는 평소와 다르게 에반이 쉽게 자신을 놓아주자 머리를 긁적이며 간이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렸다. 트레이닝복 바지에 후드 티셔츠만 입고 있었기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서 에반이 시킨 대로 한쪽에 있는 그의 패딩을 껴입고 텐트 지퍼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 추운데 좋다.”

찬기를 머금긴 했지만 싱그러운 숲속의 아침 공기를 가득 들이마신 시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그가 비틀거리며 숙소로 가는 모든 모습이 야외에 설치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리고 시우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텐트 안에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 일어났네요.”

숙소로 들어간 시우가 제 옷으로 갈아입고, 캠핑장 주위 산책로를 따라 혼자 느긋하게 아침 산책을 즐기고 돌아오니 숙소는 일어난 멤버들로 분주했다.

예찬과 찬은 거실에서 콘솔 게임을 하고 있었고, 에반은 아침 식사를 제가 준비하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거실에 있는 흔들의자를 차지한 상준은 헤드셋을 착용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만지고 있었다.

“코코. 시간 맞춰 잘 왔네. 딸기잼? 밀크잼도 있어.”

“오! 밀크잼이 있어? 나 밀크잼.”

패딩을 벗어 든 시우는 곧장 넓은 부엌 가운데 있는 아일랜드 식탁 앞으로 갔다.

맑은 알람음과 함께 토스터에서 잘 구워진 식빵이 튀어 오르자, 에반은 집게로 그것들을 집어 접시에 옮기고는 새 식빵을 다시 채워 넣었다.

“알겠어. 어서 씻고 와.”

옆에 계란과 베이컨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스크램블드에그를 하고 베이컨까지 구우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에반의 말에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시우가 지나간 자리엔 도토리 두 알이 놓여 있었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주워 온 것인가. 에반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귀여운 도토리 두 알을 손끝으로 집어 제 옷 주머니에 쏙 넣었다.

“다들 편하게 쉬셨어요?”

식탁에 둘러앉아 취향대로 아침을 먹는 멤버들 앞으로 피디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미 그들이 일어나 움직이는 순간부터 숙소엔 카메라 감독님들로 가득했다.

“벌써 갈 시간이에요?”

예찬은 토스트 한 조각을 들고 딸기잼을 바르면서 시계를 보았다.

“식사 끝나는 대로 정리하고 떠나면 되는데, 다름이 아니라 벌칙 수행자 결정해야 하잖아요.”

뜬금없이 벌칙 수행자를 결정하자는 말에 시우는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물고 피디를 바라보았다. 아침 먹다 말고 게임이라도 해야 하나요?

“어떻게 정해요?”

시우의 마음을 읽은 듯 에반이 말했다.

“편하게 평소대로 생활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에반 씨, 오늘 아침 식사 때 무엇을 제일 먼저 드셨어요?”

피디의 질문에 에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할까. 그냥 가까이 있는 것을 먹지 않았을까?

“어! 저! 저! 저 알아요! 에반 형은 베이컨 먼저 먹었고, 시우 형은 커피 마셨어요.”

다들 그걸 어떻게 알아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볼 때 번쩍 손을 들고 흔든 예찬이 빠르게 말했다. 넌 뭘 그런 걸 기억하냐는 찬의 말에 예찬은 찬이 형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식빵을, 상준 형은 오렌지주스를 먼저 마셨다는 말을 덧붙였다.

“에이, 설마 누가 먼저 뭐 먹었냐로 결정하거나 그런 거 아니죠? 시우가 커피 먼저 마셨으니까 시우가 한다든가……. 아니야. 우리 피디님, 그렇게 결정하시진 않을 거예요. 맞죠?”

정곡을 찌른 찬의 말에 피디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거기다 뒤에서 작가님들이 웅성거리는 모습까지 보이자 멤버들 모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매번 너무 식상한 걸 제안하더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편하게 쉬면 된다고 했다. 결국 뭘 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뻔한 것으로 선택한 모양이었다.

“설마요. 우리 피디님과 작가님들이 얼마나 대단하신데, 그렇게 허무한 걸로 정하겠어요? 지금부터라도 뭘 하든지 하겠죠.”

그런 제작진을 놀리듯 상준이 남은 오렌지주스를 쭉 마시고 말했다.

“그게요. 어떻게든 여러분들이 편하게 쉬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요. 그럼 아주 간단한 게임으로 정합시다”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피디가 내미는 잡지를 받아 들었다. 잡지를 본 예찬이 박장대소를 했다. 하긴 이것보다 간편하고 정확한 게임이 어디 있겠는가.

“알겠어요. 사람 수로 할 거예요?”

짝다리를 짚고 삐뚜름하게 선 에반이 손끝으로 잡지를 빠르게 넘기며 안을 대충 훑어보았다. 그런데 패션 잡지도 아니고 뜬금없이 낚시 잡지?

“보시면 아시겠지만 낚시 잡지잖아요. 그러니 물고기 수로 하겠습니다. 보지 않고 임의로 잡지를 펼쳤을 때 물고기 수가 많으신 분이 이기는 겁니다.”

“나부터 해도 돼?”

피디의 말에 잡지를 들고 있던 에반이 시우에게 묻자 시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벌칙, 그게 뭐 대수인가. ‘Ocean Story’에서 하는 벌칙은 뻔했다.

조만간 뮤직 어워드 때문에 해외로 나가야 하고, 그렇다면 출국 때 입든지 입국 때 입든지 벌칙 의상일 것이다. 겨울이니까 모자를 씌우거나 그러겠지, 뭐.

시우의 행동에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그럼 제가 먼저 하겠다고 대답한 에반이 장난스럽게 한 손으로 잡지를 잡고 마구 펄럭거렸다.

“자, 합니다.”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일부러 분위기를 잡은 에반 때문에 다들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보는 쪽이 아닌 카메라를 향해 잡지를 펼친 에반은 앞에 있는 제작진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리고 결과를 알지 못하는 멤버들의 시선도 제작진에게 닿아 있었다.

그때 에반이 펼친 페이지를 찍고 있던 카메라가 흔들렸다. 카메라 감독님을 시작으로 스태프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뭐? 물고기 안 나왔어요?”

갑자기 불안해진 에반이 자신 쪽으로 잡지를 돌렸고, 멤버들은 우르르 그의 근처로 몰려들었다.

“난 몰라.”

어깨 너머로 에반이 펼친 페이지를 확인한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대로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펼친 페이지 제목은 [멸치, 그들의 여정] 그리고 세는 것이 불가한 어마어마한 멸치 떼 사진이 두 페이지에 걸쳐 있었다.

“우리 시우, 어떡하니.”

분명 걱정하는 단어들의 조합인 것 같지만, 전혀 걱정스럽지 않은 말투로 말한 상준이 에반의 손에서 잡지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한 장씩 착착 소리를 내며 넘겼다. 마지막 장까지 그가 넘기는 것을 지켜본 모든 이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어느 페이지에서도 에반이 펼친, 멸치 떼가 찍힌 사진보다 많은 물고기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벌칙 수행자는 시우가 되었고, 너무나도 뻔하고 예상 가능한, 제작진이 원할 때 출입국 어느 시점에서 시우는 그들이 원하는 벌칙 의상을 입기로 했다.

* * *

“너무 즐거워하시는 거 아니에요?”

시우는 평소보다 훨씬 더 들떠 보이는 스타일리스트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들은 정말 진심을 다해 이 일에 임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 언제였던가? 예찬이처럼 팅커벨 날개를 달든가, 아니면 상준 형이 썼던 토끼 귀 달린 모자를 쓰는 것 같은 쉬운 것으로 하면 안 되나?

“절대 우리가 즐거워서 하는 건 아니고, 대충 하면 그것도 그렇잖아. 하려면 잘해야지.”

평소에도 제게 친절하고 꼼꼼하게 잘 챙겨 주는, 이모뻘 되는 현숙의 말에 시우는 더 토를 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행거에 걸려 있는 옷이라든가, 뒤쪽에 있는 막내 코디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자니 영 께름칙했다.

“그래도 너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예찬이거나 에반이었으면 진짜…… 상상 불가잖아.”

“저도 포기해 주시면 안 돼요?”

“에반이면 좀 괜찮지 않았을까?”

저도 포기해 달라는 시우의 말은 그녀들의 대화에 묻혀 버렸다. 에반이면 괜찮지 않겠냐는 말에 시우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모습을 그려 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다른 코디가 사이즈를 어떻게 구할 거냐고 반문하자 또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도 이건 쓸데없이 고퀄리티라고요.”

“요즘 연말이라 공항을 이용하는 연예인들이 많아서 웬만한 건 다 묻히잖아. 오늘만 해도 너희랑 겹쳐서 출국하는 연예인이 한둘이야? 우리 시우가 어설프게 묻히는 꼴은 내가 또 못 보지.”

“……이거 진짜 아무도 몰라요?”

코디가 들고 있는 옷을 본 시우는 한참을 망설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웅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본 현숙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이런 행동을 보였다는 건 이미 시우가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뜻했으니까.

“멤버, 매니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너만 따로 가는 거잖아.”

“에바니도요?”

“에반이 어떻게 알아?”

모두가 확실하게 모른다는 확답을 들은 시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짤이나 사진으로 남아 돌고 돌겠지만, 자신도 한 번쯤은 에반을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보다 그의 반응이 제일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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