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전용기에 탑승하자마자 자리에 앉은 시우는 높은 부츠부터 벗고는 체중이 쏠려 아픈 발을 손으로 주물렀다.
“우와. 진짜 이게 인간이 신는 거 맞아?”
시우가 벗어 던져 놓은 부츠에 관심을 가진 예찬이 이리저리 돌려 보다 슬쩍 자신의 팔뚝을 옆에 대어 보았다. 다리는 엄두가 나지 않으니 그나마 엇비슷한 튼튼한 팔을 가져다 댄 것이다.
“예찬아. 그거 명품 협찬 받은 거야. 장난치다 망치면 곤란해.”
오션 멤버들에 이어 비행기에 탑승한 코디의 말에 예찬은 얼른 신발에 있는 태그를 확인했다.
그냥 의상 벌칙 아니에요? 그런데 명품 협찬까지 받았어요?
순간 어깨에 걸치고 있던 퍼 재킷을 옆으로 툭 던지던 시우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시우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형, 괜찮아요? 그런데 윗도리는 또 왜 그래요? 이 추운 날씨에 왜 어깨를 다 내놓고 있어요? 혹시 그것도 명품인가요?
예찬은 거칠게 옆 좌석에 내동댕이쳐진 퍼 재킷을 집어 들어 안을 확인했다.
“시우, 너 클러치는 어쨌어?”
시우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온 막내 코디의 말에 시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처음에 줄 때부터 미리 설명해 주든지, 그럼 좀 더 소중하게 다뤘을 거잖아요.
방금 코디가 말하고 예찬이 확인하는 걸 같이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사실이었다.
진짜 전부 명품을 협찬받아 온 것이라고? 도대체 왜?
여자 연예인도 아니고 벌칙으로 여장 한번 하는데 명품 협찬이 웬 말인가.
“클러치. 여기요.”
아니, 그 클러치는 왜 또 네가 들고 있어? 진짜 안 어울리게?
갑자기 등장한 에반이 내민 클러치를 받은 코디는 제가 들고 있는 시우의 옷을 받아 가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럼 여기서 젤 비싼 게 뭔데요?”
예찬의 시선이 시우의 몸 여기저기를 누볐다. 그럼 저 어깨 다 드러낸 니트도 그렇고, 만들다 만 것 같은 바지도 명품이라고?
“저기 시우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 국내 공식 가격 6000 정도. 클러치가 2000?”
큐빅 잔뜩 박아 놓은 줄 알았던 클러치를 살피면서 무심한 듯 툭 던지는 코디의 말에 시우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고는 오른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얼른 빼 코디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꼭 사진 찍을 때 오른손으로 클러치 들라고 했던 거구나. 협찬인데 확실하게 찍혀 줬어야지. 나름 그녀들이 시킨 포즈를 다 기억하고 기자들에게 찍힌 것을 떠올린 시우는 혼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코디들이 주는 옷을 입고 클러치를 든 채 긴 시간 화장을 받으며 쓸데없이 고퀄리티라고 웅얼거렸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고퀄리티였다.
그러니까 결국은 오늘 착용한 것들 다 합치면 억대라고요?
“뭘 새삼스럽게 그래? 예찬이 네가 지금 착용하고 있는 시계 가격 생각하고 말해. 시우는 화장 지울 때, 속눈썹부터 떼야 하는 거 알지?”
그들의 대화는 곧 이륙한다는 기장의 말에 멈췄다.
일단 이륙해야 옷을 갈아입고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시우는 서둘러 안전벨트를 했다. 이미 부츠도 퍼 재킷도 코디가 가져갔기에 괜히 어색해 니트를 손으로 끌어 올려 어깨를 대충 덮었다.
“적당히 다른 옷도 많았잖아.”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건네주며 에반이 한마디 하자 시우는 멋쩍어 괜히 주렁주렁한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차마 스커트보다 반바지가 나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옆트임 심하게 들어간 타이트한 롱 스커트가 떠오르자 얼른 머리를 털었다.
그거나 이거나.
줄 거면 그냥 제가 갈아입을 옷을 주지, 왜 코트를 주고 그래.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시우는 에반의 체취가 가득한 코트를 덮었다. 방금까지 입고 있던 옷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비행기 뜨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어.”
“아까는 예쁘다고 잘만 해 주더니. 그렇게 보기 싫었냐? 옷부터 갈아입어. 나도 알거든. 진짜 이상한 거?”
자신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던지는 말에 마음까지 상한 시우는 입술을 쭉 내민 채 삐죽거렸다. 사람들 앞에서는 예쁘다고 하고 막 자랑하는 것 같더니, 역시 사람들 앞이라서 그랬나 보다.
스태프들과 멤버들이 다 착석하고, 마지막까지 둘러보던 승무원까지 다 지정된 자리에 앉자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안을 밝히고 있던 불도 꺼져 주위가 어둑해졌다.
“…….”
고개를 숙여 제 맨발을 바라보며 비행기가 활주로를 빠르게 달리는 것을 느끼던 시우의 두 눈이 일순간 동그래졌다.
자신의 볼을 감싼 뜨거운 손 그리고 제 입술에 닿은 이 감촉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빠른 속도에 비행기가 살짝 흔들리고 묵직한 기분과 함께 이륙하는 와중에도 시우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에반의 손이 시우가 덮고 있는 그의 코트 안으로 들어왔다. 짧은 가죽 바지만 입은 채, 꼬고 있던 허벅지에 큰 손이 닿았다. 낯선 감각에 놀라 파드득거리는 것보다 에반의 혀가 시우의 혀를 감싸는 것이 빨랐다.
열기를 가득 품은 혀와 혀가 얽혀 들었고, 에반의 손은 훤히 드러난 시우의 맨살을 거침없이 쓸었다. 비행기의 소음이 그들이 부스럭거리는 모든 소리를 잠재웠다.
꼬고 있던 다리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시우의 고개가 젖혀졌다.
“…….”
에반의 입술이 멀어지자 시우는 얼른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거칠어진 호흡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도 없었다. 입술을 떼었다간 어떤 소리가 새어 나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
시우의 입술을 놓은 에반의 입술이 향한 곳은 훤히 드러나 있는 시우의 쇄골이었다. 조금 전 시우가 끌어 올렸지만 어느새 흘러내려 버린 니트 때문에 에반의 뜨거운 입술은 시우의 쇄골과 어깨 목선을 거침없이 탐했다.
“흣…….”
결국 여린 시우의 살결을 희롱하던 에반이 이를 세워 어깨를 약하게 무는 순간, 몸을 잘게 떤 시우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갔다. 그리고 갈 곳을 잃고 말아 쥐고 있던 시우의 두 손이 에반의 어깨에 닿았다.
“저희 비행기는…….”
방금까지 꺼져 있던 불이 다시 들어오고, 기장의 안내 멘트가 나오고 나서야 시우에게 닿아 있던 에반이 뒤로 물러났다.
“명훈 형, 제 노트북 가방 못 보셨어요?”
“찬이 형, 라면 먹을래요? 비행기에서 먹는 컵라면이 난 제일 맛있더라.”
안전벨트를 풀고 움직이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우는 흘러내린 에반의 코트를 얼른 끌어 올렸다. 그러다 이내 옆에 있는 자신의 옷을 발견하고는 젖은 제 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나……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에반을 볼 용기가 나지 않은 시우가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안전벨트를 풀고는 덮고 있던 코트를 에반을 쳐다보지도 않고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제 옷 뭉치를 들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바로 앞에 기내에서 신을 슬리퍼가 있었지만,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해 맨발이었다.
“하…….”
시우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제 코트를 움켜쥔 채, 에반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바로 앞에 시우가 신지 않고 그대로 놔둔 슬리퍼가 보였다. 가져다줘야 하는데……. 얼굴을 쓸던 손이 이번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일단 잔뜩 성이 난 제 것부터 좀 어떻게 하고.
그러니까 그냥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모두 자리에 착석하고 살짝 어두워진 틈을 타 입술만 살짝 훔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매끄러운 시우의 다리에 손이 닿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처음엔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다음엔 스치듯 손을 잡는 것에 행복해했다.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했는데…….
언제까지 제 품에서 편안하게 잠든 시우의 맑은 얼굴을 지켜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래 욕심이라는 것은 만족이라는 것이 없었다. 커지면 커졌지 줄어드는 법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녀석이니까.
“미쳤네, 미쳤어. 김시우, 너 돌았냐고.”
옷을 들고 화장실로 도망친 시우는 세면대 앞에 선 채, 긴 인조 속눈썹을 떼다 손을 내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그때 비행기 안내 방송만 아니었다면, 제가 그를 덮쳤을 것 같다.
아직도 몸이 뜨겁고, 제 다리엔 그의 손이, 목덜미엔 그의 입술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손을 들어 제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에 어깨를 만지던 손을 치우자 어깨에 옅은 잇자국이 보였다. 곧이어 찾아든 생각은…….
각인.
한동안 알파, 오메가에 대해 찾아보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페어를 검색할 때면 항상 나오는 단어 ‘각인’. 성관계 중 서로의 어깨를 강하게 물어 잇자국을 남기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연인이 된다고 모든 알파와 오메가가 각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은 이혼이라도 하면 되지, 각인은 깨는 방법이 없기에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워워. 아니야, 아니야. 오버다, 오버. 김시우. 그러지 말자.”
순간 몇 번 보았던 에반의 탈의한 상체가 떠오르자 얼른 머리를 흔든 시우는 두 손으로 제 볼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그러고는 인조 속눈썹 끝을 잡고 세게 당겼다.
“아오, 아파라.”
확 당겨 버린 탓에 제 속눈썹이 몇 개 같이 뽑히자, 눈물이 찔끔 났다.
“좋은 생각, 맑은 생각. 아! 뮤직 어워드 퍼포먼스.”
치렁거리는 가발을 벗어 옆에 내려놓은 시우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가발 하나 벗었다고 이렇게 시원하나? 두피를 긁적거리던 시우의 시선이 옆의 샤워부스로 향했다.
“그냥 씻을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세면대 한쪽에 올려져 있는 파우치를 열었다. 코디 팀에서 씻으라고 가져다 둔 것 같았다. 클렌징 오일을 꺼내 볼과 이마를 문지르며 시우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짙은 화장을 지워낸 시우의 시선이 다시 샤워부스에 닿았다. 장시간 비행이었다. 단거리였으면 국내선을 이용하겠지만, 연말의 복잡한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다는 에반의 단호한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진짜 전용기를 띄워버릴 줄이야. 과거의 오션이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가 이걸 타게 될 줄은 몰랐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다들 친한 스태프들과 멤버뿐이다.
옷을 벗은 시우는 망설임 없이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온도의 따스한 물이 몸 위로 쏟아졌다. 정말 이렇게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아늑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눈을 뜰 때, 에반의 얼굴을 보는 것도 함께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멤버들과 어울리는 모든 시간이 꿈같이 다가왔다.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은 그런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