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19화 (119/187)

119화

신인이라는 위치는 참으로 불안했다. 순식간에 인기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르게 추락할 수 있는 연예계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나 매한가지였다. 더군다나 혜성같이 나타나 시장을 흔들기까지 하면 모두의 시선이 그리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올해는 신인상이겠지만, 내년이면 대상일 테지.

에반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무심한 눈빛으로 화려한 무대를 응시했다. 지겹고 지긋지긋하다. 단지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동경을 가득 담아 눈을 반짝거리며 그곳을 보고 환호하는 시우 때문이었다.

“아……! 형, 저 미쳐 버릴 것 같아요. 다다음이 우리 무대잖아. 어떡해, 심장 터질 것 같아.”

“넌 말을 해도. 심장이 터진다가 뭐냐.”

“그럼 심장 터질 것 같은 걸 그렇다고 하지 뭐라고 말해요.”

옆에서 들리는 상준과 예찬의 대화에 에반의 손이 시우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뮤직 어워드가 시작되고 제게는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던 시우의 맑은 눈이 자신을 향했다. 메이크업 팀이 공들여 놓은 그의 입술은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움직이고 ‘왜’라는 입 모양이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기껏 불러 놓고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않는 제가 이상한지 조금 더 다가오며 다시금 ‘왜?’라고 말하는 입술에 시선이 붙박였다.

키스하고 싶다.

단순하면서도 강한 충동에 에반은 오른손으로 왼손에 착용하고 있는 시계를 만졌다. 부르거나 말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쓰다듬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시우는 더 묻지 않고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에반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확실히 시우의 페로몬이 짙어졌다.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짙어지고 옅어지는 일은 흔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감정을 품는다는 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거기다 지금 시우는 어떠한 성적 자극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해맑고 즐겁게 뮤직 어워드를 즐기고 있었다. 시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제게 생긴 것이라면? 상대의 페로몬에 이렇게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였다.

곧 그들이 무대에 오를 차례인지라 스태프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에반의 시선은 계속해서 시우에게 닿아 있었다.

무대 아래까지 오션의 일거수일투족을 담는 카메라가 따로 붙었고, 긴장된다며 장난치고 호들갑을 떠는 멤버들의 뒤에 선 에반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본무대에 올라가면 이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 낼 프로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이런 팀을 꾸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바로 옆에서 시우와 찬이 긴장을 풀겠답시고 손깍지를 끼고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고서야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수없이 듣고 부른 노래. 수백, 아니 수천 번은 반복해서 췄던 춤. 이번엔 그나마 시우가 메인이 되면서 동선과 춤사위가 바뀌긴 했지만, 베이스로 하는 동작은 같았기에 어려움 따위는 없었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니까.

실수는 없었다. 무대는 완벽했고 팬들의 호응도 좋았다.

속된 말로 무대를 찢어 놨다고 말하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명훈의 손길에도 에반의 시선은 시우에게 닿아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붉어진 볼. 힘들어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의 얼굴엔 희열이 가득했다. 제겐 식상한 일련의 모든 과정이 시우에겐 처음일 테니까. 첫 무대, 첫 시상식. 첫…… 첫…… 첫……. 그러니까 저렇게 설렐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

“어디 안 좋아?”

땀을 닦고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 주는 코디의 손길을 받으며 멍하니 서 있던 에반은 상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니라…….”

“응?”

다들 기쁘고 즐거운 상황에서 에반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자 덩달아 상준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 갔다. 얼마 전 텐트에서 나눈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곧이어 그의 눈은 급히 시우를 찾았다.

아닌데. 신이 난 시우는 무대에서 했던 동작을 보이며 예찬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시우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그가 문제가 아니라면……? 에반을 다시 본 상준은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오늘 아침에도 알파들은 약을 챙겨 먹었고, 시우 역시 반쯤 울면서 도대체 난 이걸 언제까지 먹어야 하냐고 진저리를 치며 한약을 삼켰다.

“지금은 아니고요. 아직은 아니고, 저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아니길 바라고 있어요.”

스태프에게 들리지 않게 귓속말로 속삭이는 에반의 낮은 음성을 들은 상준은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두서없는 그의 말에 조용한 곳에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지만, 그럴 곳이 없었다.

이미 뮤직 어워드는 3분의 1 이상 진행되었기에 두어 시간이면 끝날 행사였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냥 제가 오버하는 거.”

언제 표정을 굳히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냐는 듯, 이내 빙긋 웃으면서 제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에반의 뒷모습을 보는 상준의 표정은 밝아지지 못했다.

공식적인 뮤직 어워드는 두어 시간 후면 끝나긴 하겠지만, 그 뒤로 가벼운 뒤풀이도 있을 것이며, 호텔로 돌아가 간략하게나마 라이브도 해야 했다. 공식 활동이 마지막인 것도 알려야 하고, 오늘 남아 있는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 * *

“좋겠다.”

실수 없이 무대를 끝내고 다시 가수석으로 돌아온 시우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상식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뭐가?”

“상 받는 거요.”

혼잣말을 들었는지 되묻는 상준의 말에 시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람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지, 언제는 뮤직 어워드에 참여해서 이렇게 가수석에 앉아 보는 것이 꿈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참여하고 보니 그래도 상 하나는 받아 보고 싶었다.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무대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끽해야 제가 서 봤던 곳은 음악 방송 무대거나 나중엔 돌고 돌아 지방의 작은 행사장 같은 곳이었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제가 어떤 정신으로 이곳에 앉아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 같았다. 바로 앞뒤, 옆에 앉아 있는 인기 가수들부터 해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람들의 환호성. 깔끔한 정장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진행을 하거나 시상하는 배우들까지.

TV로만 보던 것들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

이 순간 다시 회귀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고 또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을 돌고 돌면서 이 시간을 꺼내고 또 꺼내 보면서 거기에 상 하나 받은 기억도 더하면 더 좋잖아.

지금 시우는 신인상 후보를 정리해 놓은 영상을 보고 있었다. 물론 오션의 이름도 올라가 있지만, 너무나도 쟁쟁한 신인 리스트를 보노라니 그림의 떡같이 느껴졌다.

이내 영상이 끝나고 수상자가 적혀 있는 봉투를 여는 걸 보면서도 시우는 기대 없이 발끝만 까딱거렸다.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받으면 좋으니까 팬텀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팬텀 쪽을 본 시우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있는 루이를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순수할 때다. 귀여울 때고.

한데 이쪽에 확실하게 수상자가 있는지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카메라가 이쪽에, 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오션!”이라는 단어가 들려오자 시우는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이어 옆에 앉아 있던 상준 형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와! 우와!”

커다란 예찬이 껑충껑충 뛰고, 찬이 형이 주위를 보며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서야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상하러 가야지.”

주위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숙이던 시우는 제 등에 닿는 손길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에반이 자신을 내려다보았고 그의 손이 등을 받치는 힘에 얼떨결에 같이 발걸음을 떼었다.

앞에 있는 단을 올라가며 시우는 아랫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고 이끌었기에 그리 갔고, 멈추길래 멈췄다. 동시에 눈앞이 계속 흐려졌다.

예찬이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찬이 형의 손엔 신인상 트로피가 들려 있었다. 에반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가슴이 시큰거리고 눈에 열기가 몰렸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환하게 웃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참으려 했지만, 눈가에 몰린 열기는 결국 방울이 되어 볼을 타고 흘렀다.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눈물을 가리려 고개를 숙이면서 그대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겉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던 시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소매를 끌어 닦을 수도 없는데.

아주 철없을 시절 상을 받는다면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며 생각하던 것이 참으로 많았다. 수상 소감까지 연습해 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전혀 몰랐다. 이런 기분일 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고 그간 수없이 반복했던 시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떨림이 가득한 찬이 형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찬이 형에 이어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상준 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바보야. 좋은 날인데, 왜 울어.”

귓가에 들리는 명확한 에반의 목소리에 여태껏 숙이고 있던 시우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따라 움직인 시우는 제 뒤에 서 있는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원체 무덤덤한 건 알고 있었지만, 떨림도 기쁨도 슬픔도, 어쩌면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이건 필시 제 것이 아닌 에반의 것이었다. 휘몰아치던 감정들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 갔다.

“울어도 이쁘긴 한데, 팬분들께 얼굴을 보여 줘야지.”

따스함을 가득 담은 에반의 큰 손이 다가와 시우의 젖은 볼을 슬쩍 쓸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관객석을 가리키자 절로 시우의 얼굴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상준 형의 목소리에 이어 이번엔 큰 소리로 환호성부터 내지르고 보는 예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울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고 있던 시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기뻐해야 하는 일이 맞다. 헤매기만 하던 과거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었다. 오션이라는 이름으로. 제게 가장 듬직한 믿음이 되어 주는 에반과 함께, 이 무대에 같이 서 있는 멤버들과 동고동락하는 지금을 살고 있었다.

젖어 있던 시우의 눈에 빛이 돌았고, 꼭 깨물고 있어 한껏 붉어진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어쩔 줄 몰라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빠졌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던데…….”

겨우 웃음을 찾은 시우의 귓가에 장난스러운 에반의 목소리가 다시 스며드는 순간 시우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에반의 손이 곱슬거리는 시우의 뒷머리를 쓸고 어깨를 가볍게 잡고 돌려세우고 나서야 시우는 제대로 관객석을 볼 수 있었다.

“너도 한마디 해야지.”

예찬까지 소감을 마친 것인지 에반이 다시금 속삭이자 어느새 시우는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누가 안겨 줬는지 모르겠지만 시우는 두 손으로 묵직한 트로피를 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겨우 한마디를 꺼냈는데, 다시금 목이 콱 메어 왔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입을 다물었던 시우는 혀끝을 내밀어 빠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에 오히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가족부터 팬, 멤버, 스태프,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떠올랐고, 결국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누군지 모르겠다. 또 멤버 중 한 명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무대 아래로 이끌었기에 시우는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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