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21화 (121/187)

121화

탈취제에 절여진 채로 시우는 제 앞에 서 있는 에반을 노려보았다.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제게 이럴 순 없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어떤 설명도 없는 일방적인 에반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뮤직 어워드 시상식 도중 일어난 일이다. 더군다나 생방송 중이라 보는 눈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곳에 있는 카메라가 몇 대이며, 자신들을 찍고 있었을 직캠까지 떠올리니 눈앞이 아찔했다.

한 손으로 미간을 짚어 눈을 가린 채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에반을 노려보던 시우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일단 질척하게 젖은 재킷부터 벗었다.

“셔츠도.”

누군가가 벗은 재킷을 받아 들며 하는 말에 시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목에 채워진 단추부터 하나씩 풀었다.

사고는 에반이 쳤는데,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험한 말을 할 것 같았다. 한 개, 두 개, 세 개……. 단추를 착실히 풀던 시우는 제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을 빠르게 뿌리쳤다.

“건들지 마. 누나, 저 뭐 입으면 돼요?”

이를 악문 시우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듯 발음이 부정확한 말이 흘러나왔다.

“니트에 코트 입는 게 괜찮을 것 같아. 슬랙스는 괜찮지?”

“네.”

단추를 하나 더 풀려던 시우는 몸을 틀어 현숙이 들고 있는 니트를 낚아채어 대기실 한쪽에 있는 파티션 뒤로 들어갔다. 에반과 쓸데없는 기 싸움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셔츠를 벗어 옆에 있는 의자에 대충 던져 놓고 니트를 입었다.

“넌…… 내가 왜 이러는지.”

“말하지 마. 여기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니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니트를 끌어 내리고 파티션을 나가려던 시우는 제 앞을 가로막는 에반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쉽사리 비키려 들지 않는 그의 몸을 어깨로 툭 밀고 나와 의자에 앉는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우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머리가 아프다.

무언가가 가볍게 두드리는 것 같으면서도 지끈거리는 불쾌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뜨거운 드라이어의 바람이 두피에 닿자, 머리로 열이 몰렸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답답함에 시우는 괜히 주먹만 세게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많은 스태프가 대기실에 있었지만, 헤어드라이어의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죄송해요.”

손톱이 손바닥에 흔적을 새길 만큼 세게 쥐고 있던 주먹을 푼 시우는 딱딱하게 굳었던 턱의 힘을 빼고 입을 열었다.

“에반이 과하긴 했지만, 이해를 못 할 것도 아니니…….”

말끝을 흐리는 현숙의 목소리에 시우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제야 바닥에 덩그러니 있는 통이 보였다. 탈취제. 페로몬 탈취제. 통에 쓰여 있는 상표를 눈으로 확인한 시우는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탈취제 통, 화장실에서 만난 환희. 자신을 보고 놀라던 루이의 커다란 눈. 그와 함께 황급히 코와 입을 막던 팬텀. 조각조각으로 보이던 것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수히 찾아봤던 알파, 오메가의 자료에서 보았던 것.

이전의 시간대에서 제게 페로몬을 덧씌웠던 에반. 페로몬으로 장난을 치던 알파들. 그리고 그걸 조금도 모르는 베타.

오메가, 후발현. 우스운 소리다.

회귀? 회귀를 얼마나 했는지 못 센다고? 다 필요 없다.

더러운 말을 지껄인 환희라면 제게 역겨운 페로몬을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에반은 화가 났겠지.

“사과해야 할까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시우는 겨우 입술을 놓고 말했다.

“사과는 네가 아니라, 네게 그런 짓을 한 알파가 해야지.”

멍하니 생각에 빠진 사이 시우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물고 있던 입술 위로 틴트가 발렸다.

“분란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일언반구 없이 대기실을 나가 버린 에반 대신 스태프에게 사과의 말을 건넨 시우는 대기실을 나갔다. 속이 어떻든 기분이 어떻든 지금까지 어둠이 가득 내려앉았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해.”

가수석으로 가려던 시우는 옆에서 들리는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나중에…….”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시우는 다시 발을 떼었다. 이내 제 옆으로 다가오는 에반의 손길을 피한 시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보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게도 잘 읽히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방금 시상식에서도 분명 자신을 안정시켜 주던 그의 감정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제게 넘어오지 않았다.

몸을 수그린 채 가수석으로 돌아가자 대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멤버들에게로 다가가자 상준이 슬쩍 몸을 움직여 찬과 자신의 사이에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시우는 고민할 것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잠시 당황하고 놀라서, 화가 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 때문인지 한번 찾아온 두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과하게 탈취제를 뒤집어쓰고 기침을 한 탓에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쭉 이어질 줄 알았으면 두통약이라도 먹었을 것이다.

손을 올려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가 뗀 시우는 얼른 아래로 내려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저 새끼 맞지?”

물이라도 마시면 답답한 속이 풀리고 머리부터 내려오는 열기가 가라앉을까 싶어 옆에 있던 생수통을 집던 시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동시에 반쯤 들어 올렸던 생수병이 바닥을 굴렀다.

“…….”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얼마 굴러가지 않은 생수병을 잡은 시우는 몸을 바로 하면서도 찬을 바라보지 않았다.

“심했어요?”

떨림을 숨기고 태연을 가장하며 시우는 생수병을 열었다.

“지금 살인 나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찬 역시 무덤덤하게 대답했기에 타인의 눈에는 간단한 말을 나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을 조금 머금어 바싹 바른 입 안을 축인 시우는 과장되게 빙긋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건너편 가수석에 있는 환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시우는 생수병을 다시 내려놓았다. 방금까지 즐겁고 행복하던 뮤직 어워드가 악몽처럼 다가왔다. 엉망진창 다 꼬여 버렸다. 역시 제 인생이 그렇지. 제 주제에 신인상이라니.

지금껏 모든 것이 너무 순탄하게 풀린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두통은 심해지고, 입 안은 마르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던 컨디션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처지는 몸에 오히려 힘을 줘 허리를 펴고 앉은 시우는 무대 위를 누비는 가수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음악을 즐기는 사람처럼.

하지만 이내 시우의 두 눈은 에반을 찾았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 다리를 꼬고 거만한 포즈로 앉은 에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리만 꼰 것이 아니라 팔짱까지 낀 채, 한쪽 턱을 슬쩍 들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시우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에반이 보고 있는 곳엔 환희가 있었다. 알 리가 없잖아. 제가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상준 형은 환희가 화장실에 왔었던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어서 우연히 본 것일까?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갑갑함이 쉽게 가시지 않아 리듬을 타듯 팔을 가볍게 움직이며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린 시우는 다시금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남은 뮤직 어워드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인기상을 누가 받았는지, 올해의 가수상을 누가 받았는지 그런 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갈수록 심해지는 두통과 머리에서 시작된 열이 온몸에 녹아들었다.

지독한 열감기에 걸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여전히 방싯방싯 웃었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누구보다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을 모두에게 과시했다.

마지막 수상자가 발표되고 환희가 속한 그룹이 수상 소감을 끝냄과 동시에 모든 가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야 했고, 주위 가수들과 선배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일단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이 줄어든다면, 모든 것을 찍고 있는 카메라만 사라진다면 쉴 시간이 주어질 것이었다. 남은 일정을 떠올리자 아득해졌다. 뒤풀이와 라이브라…….

일단 대기실로 가서 상비약으로 구비해 둔 감기약부터 먹어야겠다. 어떻게든 일정이 끝날 때까지 버텨야 한다.

“더워?”

“네?”

“볼이 좀 붉은 것 같아서.”

상준의 말에 시우는 두 손을 들어 제 볼을 감쌌다. 확실히 열감이 있구나.

“이거 코트 때문에요. 재킷보다 두꺼워서 더워요.”

일부러 코트를 펄럭거리며 말하는 순간 시우는 제게 훅 다가오는 싸한 박하 향에 본능적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아까 대기실에서 가수석으로 돌아온 이후 계속해서 그에게로 향하는 제 시선을 잡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를 쫓는 시선을 어쩌지 못해 아예 반대편인 상준 쪽으로 몸을 틀고 무대만 꿋꿋이 바라보았던 그 노력이 일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그와 함께 들끓던 열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지금껏 떨어져 있던 에반이 제게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시우는 슬쩍 몸을 움직여 예찬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나누는 넓은 무대에서 그를 완벽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조금만 더 버텨.”

분명 웃고 있었다. 힘든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제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느슨하게 팔을 두르며 속삭이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조금 전부터 그의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데, 제가 불편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단 한 번 그와 감정 공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 시간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에반은 제 감정, 제 상황을 모두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이 없었다. 계속해서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고, 그러던 사이 어느새 시우는 멤버들과 대기실에 도착해 있었다.

“다들 피곤할 테니까 라이브는 지금 여기서 간단하게 하고 이동하자.”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코트를 벗으려던 시우는 명훈을 바라보았다. 원래 일정은 호텔에서 하는 것 아니었나?

“지금 여기서요?”

“그래. 한 5분에서 10분 내외로 짧게.”

솔직히 호텔까지 돌아가 다시 모이고 라이브를 하는 것이 더 번거롭긴 했다. 그랬기에 명훈의 말에 다들 별말 없이 대기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이미 이들을 찍기 위해 카메라들이 따라다녔기에 금세 촬영 준비가 끝났고, “니모!”라는 찬의 외침과 함께 라이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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