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반갑게 엄마와 안부를 주고받던 에반이 휴대전화를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엄마와 통화를 끝낸 시우는 저를 지켜보고 있는 그의 허벅지를 툭 때렸다. 왠지 계속해서 그에게 말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수십 년의 시간을 산 건 자신인데, 매번 에반의 도움을 받고 어떤 상황에서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그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제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말없이 모든 일을 그의 방식으로 수습한 것이다.
“우리 어디 가는지 말 안 해 줬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기에 시우는 다른 주제를 끌어왔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처음엔 조각난 기억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에반의 설명과 함께 차분히 정리되고 있었다.
“호텔은 불편할 거고. 고성은 겨울에 추워서 시내 가까운 곳에 지낼 만한 곳이 있어서 거기로 가려고.”
“아…….”
어떤 질문을 하든 가장 이상적인 대답을 내놓았기에 시우는 손을 들어 이마를 긁적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차 안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시우는 고개를 차창 쪽으로 돌렸다. 그사이에도 그의 시선은 제 옆에 있는 에반에게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눈뜨자마자 병원을 돌아다니고 급한 이야기를 나누고 났더니 밀려드는 건 민망함이었다. 괜스레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던 시우의 시선이 제 옷에 닿았다.
제가 캐리어에 넣었던 옷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오버사이즈 니트에 루스핏 트레이닝복 바지. 이것을 제가 입은 기억이 없으니 저를 챙긴 건 에반이었을 것이다. 바지에 문지르던 손으로 다시금 머리를 쓸어 넘기던 시우의 손이 멈췄다.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이 6일인데,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은 것이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미안.”
허공에 멈춘 제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에반의 손길에 이어 사과의 말이 들리자 시우는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사고는 같이 치고, 수습은 에반이 다 했는데…….
“응?”
“뮤직 어워드에서 네게 설명부터 해야 했는데.”
나지막하게 말을 꺼내는 에반은 시우의 손목에 감겨 있는 붕대 위를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었다. 가수석에 도착한 자신을 그가 거칠게 잡아끌었던 그 자리였다.
“우리 할 이야기 많지?”
그 말을 꺼내면서도 차마 시우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어디서 어떤 대화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에반이 말한 히든 오메가는 뭘까? 알파, 오메가 쪽에서 권위가 있다는 페이든조차 지금 시우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반은 서슴없이 히든 오메가라는 단어를 말했고, 후발현이 아닌 히트 사이클이라고 단정 지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떠오른 것은 ‘페어’라는 단어였다.
“절대 짧지 않은 이야기겠지.”
쉽사리 질문을 하지 못한 시우만큼이나 에반의 대답은 느렸고, 그마저도 끝이 흐려졌다.
시우는 재촉하지 않았고, 에반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에반이 어루만지던 시우의 손목이 그에게 더 가까워졌다. 새하얀 붕대 위에 에반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몰라 에반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던 시우는 에반과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색의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호수는 아주 맑았고, 에메랄드빛을 띠는 푸른빛을 뿜어냈다. 잔잔한 물결조차 없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느껴졌다.
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마주한 호수에서 본 것은 일렁임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파동이 일었다. 그와 함께 이제는 본능적으로 쫓게 되는 시원한 박하 향이 산들바람처럼 시우를 감쌌다.
그와 함께 진지하던 시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도, 눈꼬리가 예쁘게 접힌 것도 아니었다. 언뜻 보면 시우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에반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네 몸부터 챙기고.”
에반의 손이 시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윙크하는 순간, 시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저었다.
홀렸다. 그런 말 외에는 지금 제가 겪은 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새 시우는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아담한 이층집 앞에 있었다.
그리고 저돌적으로 제게로 뛰어드는 러쉬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나 제 다리 사이를 돌아다니는 록시의 애정 공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부모님은 다른 곳에서 지내시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쉬면 돼.”
얼떨결에 제 다리에 매달리는 록시를 안아 든 시우는 에반의 설명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성은 추워서 집사님 오실 때, 데리고 와 달라고 했어. 얘들 보고 싶다며.”
록시, 시우 힘드니까 이리 와, 라고 말하며 안고 있던 록시를 데려가는 그의 행동에 손을 내린 시우는 제 옆에 딱 붙어서 걷는 러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보다 조금 앞서 걸으며 짐은 이미 방에 가져다 뒀고, 뭘 먹고 싶어 할지 몰라 죽과 수프를 모두 준비해 달라고 했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시우의 혀끝이 살짝 나왔다가 들어갔다.
과하다. 진짜 과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반은 제게 너무 과한 사람이었다.
그의 배경이라든지 외모라든지, 이런 다정다감한 성격까지.
이런 사람이 도대체 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까? 저는 애교가 있거나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챙겨 주는 것도 잘 못하고, 배려심도 부족하다.
“에바나…….”
“코코, 우리 시간 많아. 일단 밥부터 먹자.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그 작은 머리로 뭘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제 마음을 읽은 듯 안고 있던 록시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제 어깨에 팔을 두르는 행동에 시우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현관에서 집사님과 인사를 했는데, 차마 냉정하게 그의 팔을 치워 내지는 못하고 슬쩍 어깨를 움직였지만, 에반의 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대화도 없이 조용한 식사를 마친 후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온 시우는 멍하니 서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연노란색의 머리카락에 짙은 갈색 눈동자를 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수십 년을 봐 온 얼굴인데, 오늘따라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한 손을 들어 볼을 만지자, 거울 속의 사람도 제 볼을 만지고 있었다. 볼을 만진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고, 헐렁한 니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이 닿은 곳은 자신의 아랫배였다. 불과 몇 시간 전 초음파 기계가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곳.
오메가.
진짜 오메가라고? 그 박하 향이 정말 에반의 페로몬이며, 이성이라는 것을 모두 날려 버린 그 고통이 정말 히트 사이클일 줄이야.
무한 회귀는 그렇다 쳐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션의 멤버인 것부터 해서, 음악 방송 1위, 뮤직 어워드 신인상까지.
여전히 한 손을 배에 대고 다른 손으로 아랫입술을 만지던 시우는 급히 몸을 움직여 니트를 벗었다.
“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던 시우의 온몸이 붉어졌고, 끝내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려 버렸다. 목선, 쇄골, 어깨, 가슴, 복부에 새겨진 생소한 흔적들은 그날 밤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지금 제게 일어나는 일 중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에반이었다.
에반 루이스.
그는 끝없이 제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고, 입에 담기 민망한 말까지도 그는 너무나도 달콤하게 말했다.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몸이 달았다.
눈을 가렸던 손으로 열기가 오른 두 볼을 톡톡 두드린 시우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와 진실한 대화를 할 시간이었다.
어서 씻고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서 에반과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 샤워를 하던 시우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가슴, 쇄골. 그래, 그건 어떻게 이해해 볼 텐데, 거품이 잔뜩 인 샤워 볼로 몸을 문지르던 중 발견한, 다리에 남은 무수한 자국들까지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종아리 뒤에 있는 잇자국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에반.
이 꼴로 병원에 있었다고? 조도가 낮긴 했지만, 복부 초음파 할 때는 배도 내놨는데?
“미쳤네. 내가 누굴 욕해.”
처음 화살은 에반에게 향했지만,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둘씩 맞춰지며 그의 위에서 허리를 돌렸던 제가 떠오르자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록시와 러쉬를 데리고 집사님까지 별채로 가시자, 넓은 공간엔 에반과 시우 단둘만 남았다.
겨울의 밤은 빨리 찾아왔고, 거실 한쪽에 있는 벽난로에선 장작이 타고 있었다.
이렇게 어색하고 적적할 줄 알았으면 록시라도 두고 가시라고 할 걸 그랬나? 머쓱함에 목선을 만지던 시우는 벽난로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오션 멤버 단체 채팅방으로 들어갔다.
찬이 형과 함께하는 일본 여행이 재밌는지 예찬이 보내 놓은 사진이 가득했다.
바쁘게 활동했던 멤버들 모두 제가 원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에반은?
고개를 든 시우는 머그잔을 들고 다가오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왜? 새삼스럽게 애인이 너무 잘생겼어?”
어쩜, 저렇게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일까? 하긴 대뜸 제 얼굴이 마음에 드냐고 묻던 그였다.
“응. 어디 하나 빠질 것 없이 완벽하게 내 스타일이라서 문제야.”
제게 내민 머그잔을 받아 든 시우는 농담처럼 제 진심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어떤 질문을 했을 때, 솔직하게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서울 만큼 그는 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솔직했다.
반면 자신은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대답을 할 줄 몰랐는지, 에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이내 소파 옆에 있는 스탠드를 끈 에반은 시우의 옆자리가 아닌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도 돼.”
이제 넓은 거실을 밝히는 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따스한 빛을 발하는 벽난로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