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29화 (129/187)

129화

“여기서 하면 되려나.”

허리에 두 팔을 올린 채 주위를 둘러본 시우는 오른손으로 제 왼쪽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마치 처음 방송하는 것처럼 긴장되고 떨렸다. 일주일 만에 니모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본의 아니게 잠수를 타 버린 상황이라 어떤 변수가 생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제대로 된 대화 좀 하나 싶다가 어영부영 에반의 꾐에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지난 저녁 제가 샤워를 하면서 본 흔적들은 참으로 많이 가라앉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흐릿해지던 흔적 위로 새로운 흔적들이 잔뜩 생겨 버렸다.

목이 갑갑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보트넥 상의를 즐겨 입는 제겐 제대로 몸을 가릴 만한 것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에반의 검은색 터틀넥 니트를 입었다.

에반에겐 빈틈없이 핏되며 라인이 살던 터틀넥 니트가 한순간 루스핏이 되고 어깨선이 팔뚝까지 내려왔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붉은 기가 다 가시지 않은 채 살짝 부은 눈을 가리려 역시나 에반의 사각 뿔테 안경도 빌렸다.

“뭘 그렇게 긴장해?”

“너 때문이잖아.”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뒤에서 저를 껴안으며 볼에 입을 맞추는 에반의 이마를 손끝으로 밀어 버렸다.

어떻게 된 인간이 그만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힘들다고 했더니 그럼 가만히 있으란다. 제가 다 한다고.

“길게 할 생각 말고 그냥 잘 지낸다, 괜찮다 이렇게만 해.”

“하……. 다 망했어.”

어제저녁엔 거슬리긴 하지만 그럭저럭 들을 만한 목소리가 나오더니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진짜 노트와 펜도 준비했다. 니모들과 의사소통은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니야.

“어차피 다 알게 될 거 그냥 같이 라이브 하면 안 되는 거야?”

계속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이미 그들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오션 멤버와 매니저는 둘 사이를 알고 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의 연애 사실을 공개하자는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냥 찬이 형과 예찬이처럼 같이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자는 것이었고.

“내 페로몬 너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며.”

제가 오메가인 것을 아는 사람은 에반과 병원 관계자들뿐이다. 더불어 제가 오메가인 것을 타인에게 들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새로운 것을 또 알아냈다. 시우 역시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맡지 못했다. 병원에선 후발현과 동시에 히트 사이클을 겪은 오메가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 알파 페로몬 노출 검사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우가 후발현 케이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오메가 형질에 알파 페로몬을 개입시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에반의 반대가 가장 심했으니, 하고 싶어도 못 한 검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집사님께 양해를 구해 그에게 페로몬을 풀어 달라고 했을 때, 시우는 그의 페로몬을 조금도 맡지 못했다. 페로몬을 맡지도 못할뿐더러 뮤직 어워드에서처럼 그 페로몬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아채지 못한다.

에반은 그것조차 막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알파들이 더러운 페로몬을 묻혀도 시우가 모르니, 그는 방어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불안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맡지 못하는데, 들킬 이유가 없잖아.”

시우의 말에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에반도 시우도 일단 시우가 오메가인 것을 밝히지 않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로 인한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설사 밝힌다고 해도 히든 쪽이 아니라 후발현이라고 얘기해야 할 테고, 복잡한 상황에 얽히고설키는 건 둘 다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애하는 건 밝혀도 되잖아.

연인이라는 것을 밝히면 진득하게 제 페로몬을 묻혀도 상관없었다. 대놓고 시우가 제 것이라는 흔적을 잔뜩 남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시우는 지금 그것조차 못 하게 막는 것이다.

“에바나.”

시우는 몸을 돌려 불만이 가득 어린 에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 제게로 가까이 당겼다.

“어젯밤에 내가 뭐라고 했어?”

에반이 미간을 찌푸린 채 쉽게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알고 모르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말했지? 너랑 내 감정이 다른 사람의 흥밋거리가 되는 게 싫은 거야. 그러니까 쉿, 비밀인 거야. 사랑해.”

할 말을 끝낸 시우는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에반이 저를 끌어안기 전에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재빨리 도망가는 시우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라이브 장소는 거실로 정해졌고, 라이브에 필요한 장비들은 테이블에 모두 세팅해 놓은 상태였다. 따스한 햇살이 가득 들이쳐 따로 조명은 필요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화면에 비치는 제 모습을 꼼꼼히 확인한 시우는 자연스럽게 말리기만 한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매만져 볼륨을 살렸다.

“라이브 잘해.”

테이블에 따뜻한 보리차가 든 머그잔을 내려놓은 에반이 계속해서 시우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록시를 안아 들었다.

“너 다른 곳에 가 있어.”

“왜?”

“하여튼 너 없는 거야. 알겠지?”

라이브와 브이로그를 에반 덕분에 몇 번 말아먹은 전적이 있는 시우로서는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에반이 록시와 러쉬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고 나서야 라이브를 켰다.

“…….”

라이브를 켜는 것과 동시에 폭주하듯 접속자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는 한 손을 들어 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고 있었지만,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대충 뭐 했냐, 어디냐, 괜찮냐 이런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안녕…….”

입술을 만지던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다른 손을 가볍게 흔들며 시우는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 미친 듯이 올라가던 채팅창이 좀 잠잠해져서 읽을 만했는데, 갑자기 또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하자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채팅창을 잘 보기 위해 앞으로 몸을 숙였다.

“이거…….”

다들 눈도 좋아. 어찌 이걸 다 봤대? 자신의 손을 본 시우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손등에 있는 링거 자국과 그 주위의 멍을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목의 붕대도.

에반의 옷이 제게는 헐렁하다 보니 두 손을 들자 소매가 흘러내려 붕대를 감은 팔목도 훤히 보였다.

“제가…… 큼…… 목소리가 죄송합니다.”

말로 설명을 하려다 거슬리는 제 목소리에 얼른 입을 다문 시우는 준비해 놓은 종이에 빠르게 글을 썼다.

[감기. 어제 병원. 링거. 목소리 죄송합니다.]

또 한 번 채팅창이 들썩였다. 괜찮은데, 감기라는 핑계 말고는 댈 것이 없었다.

목을 가라앉히려 머그잔의 물을 마신 시우는 다시 목을 가다듬어 보았다.

“아……. 아, 음. 그냥 말해요?”

종이에 글자를 적던 시우는 목 상태만 괜찮다면 목소리를 들려 달라는 글에 이어 건강을 걱정해 주는 말. 신인상을 축하해 주는 말. 생일 축하까지 정신없이 올라가는 팬들의 채팅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에반이 저 시키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그래요.

갑갑한 거 싫어하지 않냐고 왜 터틀넥을 입었냐는 말에는 춥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춥기는요. 이 집 난방 엄청 빵빵해서 더워 죽겠어요. 거기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자연 햇살은 어떻고요.

소파에 두 다리를 올려 양반다리를 한 시우는 옆에 있는 쿠션에 살짝 기댔다. 그냥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50명 남짓한 분들과 소담하게 라이브를 할 때는 이런저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수십만이 넘어가는 숫자를 보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시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곧장 휴대전화를 확인한 시우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예찬이 전화 왔어요. 라이브 봤나 봐요. 스피커 폰으로 받아 볼게요.”

“형!!! 형!!!!!!! 시우 형!!!!!!!!! 시우 누나, 보고 싶어요.”

아. 이런…….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채팅창이 순식간에 ‘ㅋㅋㅋㅋㅋ’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어쩜, 첫마디가 시우 누나니.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반가워요. 니모~~ 우린 어제도 봤죠?”

니모에게 인사를 하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예찬이 연이어 인사말을 건넸다.

“시우 누나 못 봐. 볼 생각 하지 마. 일본 여행은 즐거우세요?”

가만히 두면 계속 그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아 시우는 대화 주제를 슬쩍 바꿨다. 그러자 찬이 형과 뭘 했다, 뭘 먹었다, 지금은 뭘 한다 이런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목소리 들으니…… 형, 푹 쉬긴 해야겠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 뭐 해요?”

다 좋은데 왜 대화의 끝이 그 질문일까? 지금껏 니모들의 질문에도 애써 피하고 있던 답이었다.

“전 지금 쉬는 중이죠.”

적당히 얼버무리며 제 무릎 위로 살포시 올라오는 록시의 부드러운 등을 쓸었다. 예찬과 대화 중인데,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야옹거리며 록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등을 쓸어 주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는 듯 록시가 앞발을 시우의 어깨에 올리며 안겨 들자, 시우는 꼭 안아 주며 그 작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엇, 록시 안녕!”

“록시, 인사해.”

대번에 록시를 알아본 예찬의 말에 시우는 록시의 앞발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그러면서 말랑한 록시의 핑크 젤리까지 보여 주었다.

“그럼 형, 푹 쉬고 감기도 빨리 낫고. 우리 나중에 봐요.”

이제 뭘 타고 또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예찬은 전화를 끊었다. 예찬과의 통화를 끝낸 시우는 놀아 달라고 보채는 록시의 앞발에 입술을 맞추며 장난을 쳤다.

“록시도 니모 보고 싶었나 봐요. 저 정말 편히 잘 쉬고 건강해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엔 무슨 말을 할지 어떨지 걱정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시우는 정말 편하게 라이브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커다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제 품에서 벗어나 카메라 앞에서 알짱거리는 록시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깜빡 잊었다. 예전에 옹이와 같이 라이브를 한 적이 많다 보니, 위화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언제 록시가 들어온 거지? 아, 니모들이 록시를 아나? 록시가 에반이네 고양이인 것도 아시려나?

화면 앞에서 알짱거리는 록시 때문에 채팅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긴 한낮이지만 이제 니모님들은 주무실 시간이죠? 좋은 밤 되시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얼른 라이브를 끝낼 생각이었다. 시우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러쉬!!!!!!!!!!! 거긴 안 돼.”

“우리 다음에 봐요.”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에반의 외침. 그리고 러쉬가 거실로 난입했다. 동시에 시우의 손이 종료 버튼을 클릭하긴 했다.

“…….”

“…….”

에반과 시우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과연 이 장면이 들어갔을까? 들어가지 않았을까? 러쉬가 빨랐을까? 시우의 손이 빨랐을까.

“또…… 망했다.”

시우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그냥 라이브를 하지 말까 봐. 분명 자신과 라이브는 맞지 않았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