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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38화 (138/187)

138화

“가자.”

원하든 원치 않든 제 머리에 공룡 머리띠를 씌운 에반이 시우의 손을 살그머니 잡아 왔다.

“밖이야.”

그냥 그렇게 잡아도 되는데. 바로 앞에서는 예찬이 춥다는 찬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둘이 뭐라고 이야기 나누더니 예찬은 끌어안았던 찬을 놓아주고는 곧 어깨동무를 했다. 찬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둘은 장난을 치면서 어깨동무를 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멤버들 사이에서 어깨동무를 하거나 가볍게 끌어안거나 손을 잡는 행동들은 어색하거나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에반이 무안할 정도로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시우는 고개를 숙인 채 먼저 걸었다.

“코코.”

이내 에반이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또 불퉁한 마음이 생겨났다.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건 자신이다. 화를 내거나 자신의 이런 행동으로 인한 불만을 꺼내야 하는 건 에반이었다.

“미안.”

결국 사과의 말까지 들어 버린 시우가 발을 멈추자, 나란히 걷고 있던 에반 역시 멈춰 섰다. 곧이어 시우가 착용하고 있던 마이크를 끄자, 에반 역시 마이크를 껐다.

“내가 잘못한 거잖아. 네가 왜 사과를 해?”

“네 삶에 과하게 개입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너무나도 쉽게 수긍하는 그의 말에 시우는 입술만 달싹일 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자신을 다시 그날로 되돌리는 것 같았다. ‘Journey’ 촬영 중 처음으로 느꼈던 가슴 통증. 그건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자신을 뒤흔들고 사라진, 끔찍할 정도로 힘겹던 그 감정은 에반의 것이었다.

계속 지난 시간대의 에반과 지금의 에반이 겹쳐 보였다.

비슷한 상황이어서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시우는 손을 들어 쓰고 있는 머리띠를 만졌다.

“우리 놀이공원 간 적 있지?”

어떤 말을 할지 정하지 않았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응.”

“……예찬이도.”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적신 시우는 이제는 꽤 멀어진 예찬과 찬을 바라보았다. 주위에선 스태프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멈춰 서 있는 사람은 자신과 에반뿐이었다.

“예찬이도 있었지.”

“머리띠도 썼잖아.”

찬과 바꿀 거라고 하더니. 예찬이 쓰고 있는 기린 머리띠에 시선을 둔 시우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하얀 입김이 몽글거리며 나왔다.

“핫도그랑 아이스크림도 먹었고.”

날씨가 참 좋았다. 사람들도 많았고, 놀이공원에서 놀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이렇게 춥지도 않았고, 이렇게 어둡지도 않았다.

“거기 둘 빨리 와! 심박 수 측정기 달아야 한대!”

멀리서 자신들을 부르는 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식 시간에 회전목마 탈래?”

“회전목마?”

“타고 싶어서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 아니야?”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같은 장소를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빨리 오라고!”

찬의 목소리가 또다시 끼어들자, 에반이 시우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에반의 손에 이끌려 걷는 시우의 눈에 화려한 빛을 밝히고 있는 회전목마가 들어왔다. 즐거운 음악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회전목마를 둘러싸고 아이들을 보는 부모님으로 가득해야 할 공간엔 그 무엇도 없었다.

불만 밝힌 회전목마는 멈춰 있었다. 모든 게 끝난 것처럼.

계속 반복하던 제 삶 역시 멈춘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한 걸음 정도 앞서 걷는 에반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쪽 손은 너무나도 시린데, 그와 맞잡고 있는 손은 한없이 따스했다.

어둠 속으로 스며들려는 자신을 에반은 빛으로 이끌었다. 제가 품고 있는 어둠보다 그가 가진 빛이 더 큰 것 같았다.

이름을 부르면 돌아볼 것을 알지만, 시우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길 뿐 에반을 부르지 못했다.

“상준 형은 포기해야겠죠?”

“상준이? 오늘 명장면은 상준이가 뽑아 주겠네. 이거 완전 상준이를 위한 게임이구만.”

“상준아, 아직 타지도 않았는데 벌써 105면 어떡해?”

“우리 데뷔 전에 다 같이 왔을 때. 저 롤러코스터 타고 30분 뻗었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때 뻗었던 게 너였어? 난 왜 예찬이로 기억하고 있었지?”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시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우리 놀이공원 왔었구나. 내 기억에 없는 이 시간대의 시우도.

코디의 도움을 받으며 심박 수 측정기를 다는 에반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윙크를 해 왔다. 씁쓸했던 미소는 이내 자연스럽게 변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휘청거리는 제 마음과 달리 처음부터 에반은 수천 년을 살아온 거목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혼자 있으면 한없이 암흑으로 끌어당기는 감정에 휘둘리다가도 에반과 함께 하는 순간 거칠게 날뛰던 부정적인 것들은 자취를 감추고 평온함이 찾아왔다.

“너 또 입술 깨물었어? 입술도 잘 트는 애가.”

심박 수 측정기를 착용한 시우는 제 얼굴을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립글로스를 입술 보호제로 교체하는 현숙을 향해 장난스럽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얼씨구. 이런다고 잔소리 안 할 것 같아? 이거 너 줄 테니까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발라. 알겠어?”

“아싸! 득템.”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든 이곳은 촬영장이었고, 그들 주위엔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과장되게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시우의 모습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앉는 거죠?”

예찬의 말에 시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심박 수 측정기를 모두 착용하고, 다들 마이크도 손에 들었다. 촬영 시간 단축을 위해 두 명, 세 명으로 나눠 바이킹의 끝쪽에 앉아 한 번에 촬영을 끝내는 건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다면 체격이 작은 편인 상준, 찬, 시우가 한쪽에. 반대쪽엔 체격 좋은 에반과 예찬 둘이 앉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었다.

오른쪽에는 예찬, 왼쪽에는 에반. 체격 좋은 둘 사이에 앉은 시우는 마치 든든한 벽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이러면 제가 더 작아 보이잖아요.”

시우의 불만은 피디에서 전해지지 않았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장면을 뽑아내서 시청률을 올리는 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선입견이라는 건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든든한 알파 사이에 있는 작은 베타. 솔직히 오메가이면 더 좋겠지만 시우가 베타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제작진이 그린 그림은 뻔했다. 여린 시우가 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양쪽에 있는 알파들에게 의지하는 그런 것 말이다.

1년째 같이 촬영하는 그들이 제게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니, 실제로 시우가 운동을 잘하고 놀이 기구 타는 걸 즐긴다는 건 중요치 않았다.

놀이 기구를 무척이나 잘 타지만 무서운 척하면 된다. 제기차기를 한 번에 스무 개 정도는 무난히 하지만, 한 두어 번 차고 엉뚱한 곳으로 날리거나 비틀거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어떤 노래가 나올지 모르니까 이어폰에 집중해 주시고요. 시우 씨, 괜찮아요?”

시우는 건너편 끝에 앉은 찬이 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을 하자, 두 손을 위로 들고 붕붕 흔들었다.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바로 건너편에서 나 죽는다고 소리치고 제 파트를 놓친 채 노래 대신 비명을 지르는 상준이 착실하게 분량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예찬과 에반의 사이에서 안전바는 잡지도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마이크를 든 채로 안무도 가볍게 하는 시우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시우에게 이번 게임은 자유 이용권 세 장을 이미 손에 들고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수없이 부른 노래에서 제 파트를 놓칠 리가 없었다. 바이킹이 상승 중이든 하강 중이든 노래를 하는 시우의 음정은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역시나 건너편의 상준을 보면서 웃고 떠들며 바이킹을 타던 에반의 한 팔이 제 뒤로 오기 전까지는 심박 수가 100을 넘을 이유도 없었다.

“…….”

어차피 바이킹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 손으로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에반의 손이 몸을 들썩거리며 즐거워하던 시우의 엉덩이에 닿았다. 시우가 깜짝 놀라 노래를 부르는 에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은 에반의 손이 제 손에 딱 들어오는 말랑한 시우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순간, 시우의 심박 수가 110을 찍어 버렸다.

저를 보고 짓는 그 미소가, 랩을 하느라 낮아진 목소리가, 그리고 한 번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엉덩이를 주물러 대는 손길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지금 이 상황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 촬영 편에 X맨이라도 있는 건가? 무난히 세 장을 얻을 수 있었던 시우는 에반의 발칙한 행동으로 인해 달랑 한 장을 받고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획득한 것은 추첨을 통해 팬들에게 나눠 준다는데 어떻게든 한 장이라도 더 얻어야지, 왜 방해해서는! 에반을 보는 시우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놀이공원에서 놀이 기구를 타면서 할 수 있는 게임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바이킹에 이어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정해진 구역에서 정확히 손 하트 일곱 번 만들기 같은 미션이 계속 이어졌다. 매번 상준은 다 실패를 했지만, 놀이 기구 난이도에 따라 심박 수도 80~110 정도로 조절되었다.

“에반이는 그렇다 치고 시우 너는 뭐냐?”

범퍼카를 타고 벽이나 코너에 붙은 풍선을 정해진 시간 안에 다 터트리는 게임을 끝내고 나온 시우는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면허증만 없을 뿐 운전 경력이 어마어마하니까요, 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큰 체격을 잔뜩 구긴 채 범퍼카를 타야 했던 에반과 달리 움직이는 것이 편했던 시우가 에반보다 짧은 시간에 미션을 해 냈다.

“운전면허 없잖아요!”

“저 운전면허 학원 등록했어요.”

진행을 하는 찬의 말에 시우는 얼른 대답했다. 운전을 하지 못했을 때는 몰랐지만,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한 시우에게 차가 없다는 건 큰 스트레스였다. 운전면허증과 차만 있다면 가슴이 답답하거나 생각이 많아질 때, 드라이브라도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디를 가려고 하면 항상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정산금도 적지 않게 들어왔으니, 사고 싶은 차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어? 진짜요? 우리한테 그런 말 없었잖아요.”

“면허 따고 차도 사면 멤버들과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운전은 누가 하고요?”

“제가 면허 따고 제 차를 산다니까요?”

“시우 씨, 우리 생명은 소중해요. 자, 마지막 미션을 앞두고 각자 얼마나 모았는지 확인해 볼까요?”

시우가 직접 운전해서 드라이브를 가자는 말에 멤버들은 농담을 건넸고, 이야기가 길어지자 찬은 얼른 손에 들고 있는 큐시트를 확인했다.

“에반이 제일 많고, 상준이가……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미션을 할 텐데요. 여기서 역전도 가능하니 상준 씨 힘내십시오.”

“힘이 안 나요. 심장이 너무 아픕니다.”

상준은 제 왼쪽 가슴을 문지르면서 자리에 주저앉았고, 시우는 얼른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상준의 등을 쓸어 줬다. 진짜 못 타겠다고 하고 편집해 달라고 하지, 이 형도 참 무식하게 이걸 다 소화하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다 보이는데도 버티는 것을 보니 예전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여러분, 아시죠? 역시나 우리 촬영 팀은 꼭 이런 걸 넣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신의 집’. 아……! 요즘 누가 ‘귀신의 집’에 들어가요?”

상준의 등을 토닥이던 시우가 찬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직 자이로드롭 안 탔잖아. 보통 그런 것이 하이라이트 아니었어? ‘귀신의 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시우의 심박 수가 잠시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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