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44화 (144/187)

144화

시작은 시우였지만, 끝은 에반이었다.

밤새, 아니 해가 뜨는 것까지 보고서야 잠들었던 시우는 자신을 끌어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에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움직일 생각도 없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제 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그 얼굴만을 응시했다.

진짜 잘생겼네. 착하고 성격도 좋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제게 맞춰 주는 그였다.

이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했던 적이 없는데, 요즘 들어 제 성격이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에반과 함께 있을 때면 무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잠시라도 떨어지면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괴팍한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불안함과 초조함부터 찾아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항상 에반을 찾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공기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의 페로몬이라도 찾으려 들었다. 갈수록 에반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에반과 이런 깊은 관계를 나누지 않았다. 그의 배려이자 서로의 스케줄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바심이 났다. 술에서 얼핏 깬 시우는 제 옆에 잠들어 있는 에반에게 결국 손을 뻗었다.

자신만큼이나 에반도 자신을 원한다고, 여전히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그렇게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구경하지만 말고 키스해 달라고 했잖아.”

잠긴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는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에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 * *

따스한 커피를 마시며 시우는 한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커다란 수조 속에 한 사람이 있었다. 컷 소리와 함께 유연하게 물속을 헤엄친 에반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수조 근처로 모여든 스태프들이 그와 의견을 주고받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시우의 눈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태프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공기를 가득 머금은 에반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방송 일이라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계속해서 따뜻한 물을 추가한다고 해도 이 날씨엔 금방 물이 식었다.

공식적으로 휴식기였지만 에반에겐 개인 활동이 꾸준히 들어왔다. 개인 인터뷰나 CF 제의, 화보 촬영, 영화나 드라마까지 본격적으로 뜰 수 있는 기회였다. 한데 그 모든 것을 고사하고 그저 오션 활동에만 집중하겠다는 에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인 활동을 할 시간이 있으면 자신과 시간을 보내겠다는 에반의 등을 떠민 것은 시우였다. 그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커리어를 망치면서까지 그 자리에 있고 싶진 않았다.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던 에반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유명한 잡지 표지가 그의 얼굴로 도배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기에 안달이 나는 건 시우였다.

같은 안건으로 깊은 대화를 수없이 나눴다. 에반은 시우에게 급한 스케줄이 없다면 제가 하는 개인 활동에 동행해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처음부터 같이 가는 것이 타인의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이면 시우는 응원처럼 그의 촬영장을 찾기도 했다.

갈피를 못 잡던 시우와 에반은 서서히 일과 연애의 균형을 잡아 가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에반의 오피스텔에서 여유를 즐겼다. 가끔은 예전에 서로의 마음을 열게 해 준 호텔 라운지에서 술잔도 기울였다.

“추운데 적당히 끝내지. 방금 것도 좋았는데…….”

스태프가 물을 빼내고 뜨거운 물을 추가하는 것을 보며 시우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물에 담가 놔야 속이 시원한 건지. 수중 촬영만큼 힘든 것도 없었다.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게 멀찍한 곳에 선 채로 커피를 마시던 시우는 제 옆에 서는 이를 보고는 곧 그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커피 가져다드릴까요?”

오늘 그들과 동행한 이는 대환 형이었지만, 지금 제 옆엔 명훈 형이 있었다.

“아니. 날씨가 많이 춥지?”

“저보다 에반이가 더 춥죠.”

시우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내 둘은 수조 안에 있는 에반을 보고 있었다.

이 상황, 낯익은데.

참 재밌게도 이번 시간대에선 예전 시간대와 겹치는 일이 참으로 많았다.

그 생각에 고개를 살짝 저으며 피식 웃던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명훈을 바라보았다.

처음 맺은 관계가 비틀려서 그럴까. 시우는 명훈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메인 매니저이기도 하지만 그는 멤버들을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제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넸겠지.

오늘 시우가 에반의 일정에 동행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시우가 운전면허 시험을 치는 날이었다. 시우는 오늘을 위해 나름의 계획도 세웠다.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건 식은 죽 먹기와 다름없었다. 당연히 합격할 테고 그길로 제가 봐 둔 차를 사러 갈 생각이었다.

‘같이 가.’

‘너 오늘 촬영 있잖아. 대환 형이 너랑 동행한다고 했지? 그럼 명훈 형이랑 둘이 다녀올게.’

‘싫어. 나랑 같이 움직여.’

기어이 제가 시험 치는 것을 봐야 한다고 우긴 에반 때문이었다. 앞으로 두 시간 안에만 촬영이 끝난다면 그와 같이 움직일 수 있었다. 촬영이 더 길어진다면 먼저 가야 하겠지만, 시우는 굳이 에반에게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에반…….”

“방해 안 되잖아요.”

명훈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표정을 굳힌 시우도 같이 말을 꺼냈다.

촉이란 건 그런 것이었다. 분명 대환과 같이 움직였는데, 그를 돌려보내고 명훈이 여기 있다는 건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남의 입을 빌려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할 말이 뭔지 너무나도 뻔히 잘 알고 있었기에 시우는 명훈의 말을 망설임 없이 끊어 버렸다.

제 마음만 숨기면 되는 줄 알았다. 제가 피하면 되는 줄 알았다.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제게 남을 것이 뭘까?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이제야 배우고 있었다.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법도, 어떤 것을 싫어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타인들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다. 그러니까 그 정해진 시간 안에서라도 행복하고 싶은데, 이런 일을 겪을 때면 그것조차 제겐 사치인 것처럼 느껴졌다.

멤버들도 매니저도 지금껏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에 암묵적 동의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제 머릿속이 꽃밭이어서 그런 것일 뿐. 현실은 냉정하고 차가웠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신인가? 에반에게 말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제게 먼저 말을 꺼내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에반보다 자신을 포기시키는 것이 편할 테니까. 지금 제일 잘나가고 소속사에 많은 관여를 하고 있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제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거나 에반이 이 관계에 시들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훈만의 생각이라기보다 그가 지금 하는 말은 소속사의 입장일 것이다.

“조심하고 있잖아요.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그냥 잠시만 이대로 두면 안 돼요? 에반이를 망치는 건 제가 싫어요. 조금이라도 에반에게 피해가 갈 것 같으면 제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리고 에반이에게도요.”

명훈은 시우의 단호한 말에 어떠한 제스처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촬영 중인 에반을 보고 있었다.

“김시우, 너희가 어려서 아직 모르나 본데…….”

에반만을 보던 명훈이 이번엔 휴대전화를 만지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익숙한 상황과 익숙한 대접에 시우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역력한 그 행동은 이 상황의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명훈은 의도적인 이런 행동으로 시우의 기를 꺾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맥없이 당하기엔 시우가 살아온 시간과 겪은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명훈 형, 그만요. 그 이야기 계속하시면 에반이가 화낼 거예요. 촬영 중지 시키는 거 보고 싶으세요?”

또다시 그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 버리자 명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명훈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시우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 이제 겨우 스물한 살. 그에겐 새파랗게 어린 놈이 맹랑하게 대드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버렸던 감정이다. 외면하고 버리고 짓밟았지만 처참하게 방치된 채로도 꾸역꾸역 자라난 감정이었다. 보듬어 주고 품어 주고 힘든 것을 알고 달래 주지는 못할망정 패대기치고 핍박해도 결국 커 버린 마음이다.

제게도 인정받기 그렇게 힘들었던 마음이 타인에게까지 구박받는 건 원치 않았다.

내 마음이다. 내 사랑이다. 이제 제가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줄 귀하디귀한 감정이었다.

탕-.

명훈과 시우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끝낸 건 에반이었다.

“봐요. 에반이 화내잖아요.”

명훈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인 시우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수조에 있는 에반을 향하자, 조금의 빗나감도 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에반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전히 물속에 갇힌 채로 에반이 큰 손으로 수조를 거세게 친 것이다.

흔들리는 제 감정이 페로몬에 녹아들지 않도록 하고 싶었지만, 시우는 아직도 그것을 익히지 못했다. 그리고 제가 어디서든 희미하게 스며 있는 그의 페로몬을 느끼듯 에반 역시 제 페로몬을 느낀 것이 확실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우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빨리 촬영 끝내. 나 운전면허 시험 치러 가야 해.”

크게 말할 필요도 없다. 시우는 입 모양만 벙긋거려 제 의사를 전달했다.

“명훈 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촬영이 끝나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온 에반은 대번에 그것부터 물어 왔다. 아직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본 시우는 혀를 차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운전면허 시험 준비 잘했냐고.”

대충 둘러대는 시우의 손이 에반의 어깨에 닿긴 했지만, 몸을 낮춰 주지 않았기에 고개 좀 숙여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거짓말.”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해? 추우니까 차 탈 때까지 후드 벗지 마.”

숙여 달라고 부탁을 하고 나서야 몸을 낮춰 주는 에반의 머리 위로 그가 입고 있던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끌어 올려 씌워 주었다.

“무슨 이야기 했냐니까?”

“뻔한 이야기. 운전면허 따는 건 좋은데 운전 조심해라. 사고 조심해라. 음주 운전은 절대 안 된다. 사회면도 안 된다. 그런 말.”

“속아 줄게.”

시우는 제게 어깨동무를 하는 에반의 팔을 피하지 않았다.

“나 차 사면 너부터 태워 줄게.”

명훈의 시선이 자신과 에반에게 닿아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시우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냥 운전은 내가 하면 안 될까?”

진심이 담긴 에반의 말을 시우는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운전 잘하는데 왜 그렇게 제가 운전하는 걸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