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풍경은 좋은데.”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차 안엔 은은한 커피 향이 가득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 위엔 노을이 아름다운 색상을 만들어 냈다.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힌 시우는 넋을 놓고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와 팝송이 번갈아 흘러나오고 붉은 해가 사라지며 어둠이 찾아오는 것까지 지켜보는 사이 조금씩 마시던 커피도 바닥을 보였다.
이렇게 좋은데 다 같이 드라이브 나오자니까.
해외로 CF 촬영을 간 에반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에게 드라이브를 권했지만 모두 다양한 이유를 대면서 거절했다.
그나마 가장 직접적인 대답을 한 이는 상준이었다.
‘요절하기엔 내가 너무 젊어서……. 작곡은 좀 했어?’
운전경력이 몇십 년이 넘는 걸 어찌 이들이 알까? 그들의 눈에 시우의 면허는 아직 도장조차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제가 원하던 스포츠카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에반이 사 준 SUV를 몰고 밖으로 나온 시우는 망설임 없이 차를 몰았다.
한적한 교외 노을을 보기 가장 좋은 자리에 주차한 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히 혼자 시간을 보내는 시우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겉으로는 편안하고 느긋해 보일지 몰라도 시우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잡념들이 들끓었다.
[코코, 어디야?]
에반의 메시지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촬영 시작했어? 거긴 따뜻하지? 좋겠다.]
[차 몰고 나갔다며. 밤 운전 힘드니까 대환 형이라도 불러.]
같은 시간 휴대전화를 들고 메시지를 나누고 있었지만, 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 운전 잘해.]
메시지를 보내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시우는 젖혀 놓은 의자를 바로 세웠다. 3박 4일 일정의 개인 CF였고, 휴가 삼아 같이 가자는 에반의 권유를 마다한 건 자신이다. 내일이면 돌아오는데,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문지르는 시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메시지 대신 영상통화가 들어오는 것을 본 시우는 조금 남아 있던 커피를 마저 마셨다. 목을 가다듬고 머리를 살짝 흔들며 낮게 가라앉은 제 텐션을 올렸다.
“촬영했어?”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 톤으로 말을 꺼낸 시우는 햇살 가득한 배경에 있는 에반의 얼굴을 보고는 손도 살짝 흔들었다.
“오전에 하고 지금은 햇살이 뜨거워서 잠시 휴식 중. 차 안이야? 저녁은?”
부서지는 햇살과 아름다운 바다. 바람에 살짝 날리는 에반의 머리카락까지 본 시우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돌아가서 먹어야지.”
“보고 싶다.”
“뭐래. 지금 보고 있잖아.”
솔직한 에반과 다르게 시우는 마음에 있는 말을 꺼내 놓지 못했다. 애써 웃음을 짓고 있는 시우의 손끝은 화면 속 에반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보고 있지만 만질 순 없잖아. 같이 올 걸 그랬어.”
“나도 여기서 할 거 많거든? 상준 형이랑 작업도 해야 하고.”
“옆에 네가 없으니까 잠이 안 와. 나 어제도 못 잤어.”
“난 잘만 잤는데?”
에반의 투정에 시우는 얼른 그를 놀렸다. 계속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스태프가 에반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촬영이 끝나면 한국은 늦은 밤일 테니, 메시지를 넣어 놓겠다는 말과 내일 또 연락한다는 인사를 끝으로 화면에서 에반의 얼굴이 사라졌다.
“실은 나도 못 잤어.”
이제 까맣게 변한 휴대전화를 보며 시우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숙소나 소속사에 있다가는 미쳐 버릴 것 같아 뛰쳐나왔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시우의 두 볼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어디를 봐도 무엇을 해도 너만 생각나. 내 세상엔 너밖에 없는 것 같아서 무서워. 내 가방에 여권도 있어. 비행기만 타면 네 옆에 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전하지 못한 진심이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쯤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에반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자신을 발견한 시우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첫날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에반 없이 혼자 잠들었다가 일어난 둘째 날 아침부터였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눌러 놓은 어두운 감정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에서 벗어나려 미친 듯이 움직였다. 연습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지칠 때까지 안무 연습을 하고, 상준 형이 제게 준 곡을 반복해 들으면서 한 자라도 적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추악한 감정을 머금은 어둠은 자신을 조금씩 먹어 치워 갔다. 목을 죄는 두려움에 시우는 주인이 없는 에반의 침대로 파고들었다. 그의 향을 가득 머금은 에반의 베개를 끌어안은 채, 먼동이 트는 걸 지켜봤다.
괜찮다고. 에반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저 역시 그렇다고. 우리에겐 문제가 없고 잘해 낼 수 있다고 수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얗게 밤을 지새운 시우는 상준의 손에 이끌려 식탁에 앉았지만, 앞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커피만 들고 일어난 시우는 저도 모르게 제 방이 아닌 에반의 방으로 향했다.
‘형, 에반 형 방에 뭐 있어?’
예찬의 말에 시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길로 숙소를 벗어나 소속사로 향했다. 연습을 하던 시우는 어느 순간 연습실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제 시선은 춤을 추는 제 모습이 비치는 거울이 아닌 출입문을 향해 있었고, 머릿속엔 에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요즘 에반은 회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미니 앨범의 기틀이 잡히고, 메인 곡도 정해졌다. 곧 녹음도 들어가야 하고, 안무 팀에서 안무를 짜는 중이라고 들었다. 최근에 에반은 연습실에 온 적이 없고, 출국하는 날 오전에도 회의에 참석했던 것이 떠올랐다.
여기보다 그곳에 에반의 흔적이 더 많으리라.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와중에도 제가 에반의 페로몬을 찾고 있다는 것까지 인지한 시우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멤버들에게 연락을 했다.
에반과 관계없는 곳,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거절을 당한 시우는 홀로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다.
주차장에 세워만 놓고 한 번도 몰지 않아 새 차 냄새가 가득한 공간에서도 시우는 제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진짜 미쳤나 보다.”
겨우 이틀이다. 에반 없이 보낸 시간이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 밤만 지나면 그가 돌아오는데, 이미 제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입 안 여린 살을 깨문 시우는 꾹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소매를 끌어 얼굴을 닦았다.
퇴근 시간.
꽉 막힌 도로에서 거북이 운행을 하는 시우의 손끝이 옅게 떨렸다.
갑갑함에 계속해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아랫입술을 만지던 손끝이 살짝 일어나 있는 입술을 죄다 뜯어 냈다. 비릿한 피 맛조차 인지하지 못한 시우의 손끝에서 입술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멈춘 시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형. 저 잘 거니까 깨우지 마세요.”
숙소로 들어간 시우는 거실에 있는 찬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짧게 제 용건만 말하고 에반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근 시우는 옷을 벗지 않은 채, 그의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미친 듯이 그리웠던 에반의 페로몬이 순식간에 저를 감쌌다.
베개, 침대 시트, 이불, 온종일 찾아 헤매던 것이 그곳에 가득했다.
상준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보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잠금을 풀었지만, 일정 시간 사용하지 않은 휴대전화는 다시 잠금 모드로 돌아갔다.
“시우. 여기 있는 거 맞아요?”
“그런 것 같은데?”
“언제 들어갔는데요.”
“나도 잘 모르지. 어젯밤 9시쯤 잔다고 그 방에 들어가는 건 봤는데.”
찬과 짧게 대화를 나눈 상준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에 닿았다.
오후 7시.
지난밤 9시쯤 에반의 방으로 들어간 시우가 지금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고 덜컥거리며 걸리는 느낌에 손잡이를 놓았다. 노크하고 이름을 불렀지만, 안에선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 3시쯤 노크했을 때도 답 없었어.”
“형, 계속 집에 있었어요?”
“아니, 아침에 나갔다가 그때쯤 들어왔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하는 찬을 본 상준은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았다.
어제 오후에 같이 드라이브를 가지 않겠냐는 말 이후 시우에게선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우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에반의 연락에 확인차 숙소에 들어온 상준이었다.
“난 나간다.”
어쩐지 갖춰 입고 있는 것 같더라니, 찬이 나가자 상준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에반에게 전화를 걸려는 찰나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숙소 도착했어요?”
“어. 어젯밤 9시쯤 숙소 들어와서 네 방에서 잔다고 들어가는 걸 찬이 형이 봤다는데. 다들 외출하고 그랬으니까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네.”
“제 방이요?”
“그래, 네 방. 그런데 문이 잠겨 있어. 노크하고 이름도 불러 봤는데 대답이 없네.”
“거기 있는 건 확실해요?”
“네 방문이 절로 잠길 일은 없잖냐. 현관에 시우 신발 있어.”
“저 지금 비행기 타니까 그냥 두세요. 제가 챙길게요.”
잠시 침묵하던 에반은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온 김에 씻고 편하게 잠이나 자자.”
며칠째 작업실에서 지내다 에반의 재촉에 숙소에 들어오게 된 상준은 기지개를 켜며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에반의 방문을 흘깃 보았다.
몇 시간 연락 안 된다고, 안달 내기는. 하긴 그런 게 연애였다.
착륙하자마자 휴대전화를 켠 에반은 여전히 시우가 제 메시지를 읽지 않은 것부터 확인했다. 메시지 확인도 하지 않고, 연락도 없고. 연락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숙소에 있는 제 방에 있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숙소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진하게 느껴지는 자두 향에 에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고요한 페로몬은 시우가 깊이 잠들어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상준의 말대로 잠겨 있는 문을 연 에반은 선뜻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방 안엔 은은한 달빛이 들이쳤다. 그 달빛은 어질러진 방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천천히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간 에반은 문을 닫고는 그 문에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