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51화 (151/187)

151화

제법 많은 시간을 주었지만, 회의장을 뜨는 이가 없었기에 에반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공간에서 에반이 만드는 소음이 더 크게 울려 나갔다.

“제가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서……. 일단 오늘은 없는 것으로 알고 가겠습니다. 정리할 기회는 언제든 있으니까 허튼소리 제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해 주세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돈지랄한다거나 갑질한다 이런 말도 포함해서. 물론 시우와 제 관계에 대해서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 또한 여러분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소속사가 아티스트 관리 제대로 못 하는 거 소속사 문제 맞잖아요. 그럼.”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드 사이로 거리를 내려다보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처음엔 그냥 가십 같은 가벼운 스캔들이었겠지만, 이제부터는 거대 소속사들의 힘겨루기 같은 양상이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에반은 이 기회에 MBX의 소속사를 눌러 버릴 생각이었다. 아니면 깔끔하게 먹어 치워 산산조각 내든가.

“직원 차 아무거나 하나만 빌려줘요.”

회의실을 나온 에반은 회의실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대환이 누군가의 차를 빌리러 간 사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무음에 무진동으로 해 놓은 휴대전화엔 그사이 수많은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가 쌓여 있었다.

“여기.”

차 키와 함께 샷을 추가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잔을 받은 에반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신경 쓰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시우를 더 달래 주고, 젖은 머리도 더 말려 줬어야 했다. 흔들리는 시우에게 믿음을 주고, 뭐라도 좀 챙겨 먹일 것을. 그러고 나서 움직여도 됐을 텐데.

나름 해결책을 찾고 이 상황을 이겨 내려는 시우를 제멋대로 재워 버렸다. 더 들어 보듬어 줄 것을. 그 속상한 마음을 더…….

“저 골 빈 윗대가리들에게도 언질 주긴 했지만, 제 허락 없이 어떤 인터뷰도 없을 것이고, 추가 기사도 없을 거예요. 혹시나 그런 쓸데없는 짓 할 것 같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일단 멤버들 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시우는 제가 챙길게요.”

차갑고 진한 커피를 마신 에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환에게 당부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국산 소형차를 찾은 에반은 홀로 움직였다.

숙소에서 예찬과 찬을 만난 에반은 곧바로 상준의 작업실로 향했다. MBX의 환희와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어떻게든 끼워 맞추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동안 온갖 꼬투리를 다 잡아 댈 것이 분명했다.

멤버들과 적당히 말을 맞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딱히 맞출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MBX 환희와 같이 있었다는 그날 시우가 멤버들과 있었다는 알리바이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알리바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시우는 항상 멤버들과 함께했었다.

“시우는?”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시우부터 찾는 상준의 말에 지금껏 굳어 있던 에반의 얼굴에 조금의 편안함이 찾아들었다.

예찬과 찬도 시우부터 챙기더니…….

“오피스텔에 있죠.”

소파에 몸을 묻으며 앉은 에반은 상준이 건네는 생수병을 받았다.

“새로 기사 뜬 거 봤다.”

“그 개새끼가 얼마나 쓰레기인지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 처음부터 싹을 뿌리째 뽑아야죠.”

“악플러도?”

“알아서 처리한다고 해서 믿고 있었더니, 말만 그렇게 해 놓고 제대로 진행한 게 없어서 이번에 묶어서 제대로 처리하려고요.”

소파에 기대 눈을 감은 채, 상준의 말에 대답하던 에반은 낯선 선율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꽤 달달한 것이 사랑 노래로 딱이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작업한 곡 내놓으라고 했더니 최근에 만든 곡인 것 같았다.

미니 앨범에 들어가기엔 너무 부드러운 것 같은데…….

“봄이네, 봄. 우리 앨범이랑은 좀 그렇지 않아요?”

지금 당장 시우에게 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에반은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머리가 무겁다. 이별을 말하던 시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언젠가 한 번 제 말을 꼭 들어 달라던 그 거래 조건을 지금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시우의 말대로 그는 제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부터 이별을 생각했을까?

처음부터 시우는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재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나눴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늘 입을 다물었다.

시우가 보는 우리의 미래는 어땠을까?

‘나중 일은 나중에. 지금이 중요하잖아.’

무슨 생각인지 계속 같은 곡을 틀어 놓은 상준을 흘깃거린 에반은 다시 눈을 감았다. 페로몬에서 묻어나는 그 감정을 읽고 그것에 맞춰서 대해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모진 말을 내뱉는 그 말대로 움직여 줘야 할까?

집에 가서 시우를 깨운다면 아마도 휴대전화를 켜고 기사 내용부터 확인하겠지. 제가 원하는 대로 관계를 부정하는 기사 내용에 안도를 하겠지만, 아마도 또 똑같은 말을 꺼내 놓을 것이다.

정리하고 같은 그룹의 멤버로 돌아가자고 할 것이다.

시우를 설득하기 위해선 우린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오직 시우에게만 반응하는 자신과 제 페로몬이 없다면 넌 그때의 그날처럼 본능적으로 둥지를 짓게 될 것이라고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우에겐 상처가 될 것이다. 그렇게 가까스로 시우를 설득하고 이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우린 행복할까? 시우는 언제나 가슴 한쪽에 이별이라는 카드를 들고 살 것이며, 자신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불안감을 품고 지낼 것이다.

각인도 맺지 않은 지금 시우가 원하는 대로 이별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더 깊어지기 전에 매번 끓어오르는 욕구를 누르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제 품에서 희열에 들떠 있는 시우를 보거나, 하얗고 가는 목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때면 당장이라고 그와 각인을 맺고 싶었다.

시우가 자신과 같은 회귀자라면.

또 떠올리고 만 생각에 에반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추측일 뿐 확신이 들지 않았다.

시우가 회귀자라면, 지난 시간대의 일을 자신처럼 모두 알고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과 시우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면 쉽사리 섞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회귀 후 공항에서 다시 만난 시우가 어땠지?

부모님이 있는 고성으로 가는 동안 무슨 말을 했더라. 시우는 창밖을 보고 있었고.

“미치는 법도 가지가지네.”

시우가 자신과 같은 회귀자라는 전제를 두고 모든 상황을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저 자신이 한심해 에반은 한숨을 쉬며 몸을 바로 했다. 여기서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가게?”

“가야죠. 혼자 뒀잖아요. 자고 있겠지만.”

소파에서 일어나려던 에반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종이를 몇 장 주웠다. 소파 아래로 반쯤 또는 그 이상 들어가 있던 것들이었다.

“정리 좀 해요. 찬이 형한테 매일 정리하라는 잔소리 들으면서도 아직 못 고쳤어요?”

추스른 종이를 상준에게 건넨 에반은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꺼냈다.

“야, 왜 너까지 그러냐. 여긴 내 공간이지 숙소 아니라고. 여기서도 내가 정리 제대로 안 한다는 잔소리 들어야겠냐?”

“찬이 형에게 여기 한번 들르라고 해야겠네. 찬이 형 왔다 가면 단번에 싹 정리되잖아.”

에반은 구석에 쌓여 있는 박스를 발로 툭 쳤다.

“이거 내 거 아니야. 어제 시우가 너 끌고 간다고 서두르다가 흘렸나 보다. 갖다줘.”

“뭔데요?”

방금 주워 준 종이를 보던 상준이 다시금 제게 돌려주자 에반은 가지고 가기 편하게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시우가 작사한 거. 지금 틀어 놓은 이 곡. 이거잖아.”

“아……. 시우한테 줬다는 곡이 이거였어요? 말랑말랑하니 코코에게 잘 어울리네. 미니 앨범에 코코 싱글로 넣어야 하나?”

“일단 완성되는 거 보고. 벌써 몇 번이나 갈아엎었는지. 난 다 괜찮았는데, 나보다 더한 완벽주의자야.”

“곡 다시 틀어 봐요. 한번 맞춰나 보자.”

정리했던 종이를 펼쳐 든 에반은 다시 시작된 곡과 가사를 맞춰 볼 수 없었다. 종이를 든 에반의 손이 떨리고 허겁지겁 종이를 넘기는 그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생겼다.

딱 저 같은 동글동글한 필체로 쓴 가사는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중간에 줄을 그어 지워 버리기도 하고, 여기저기 글을 첨부했다가 빼낸 흔적이 가득했다.

“하…….”

종이를 들고 서 있던 에반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 장의 종이를 옮겨 다니며 가사 내용을 이어 가는 에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너를 처음 만난 비행기를 기억해.

스타와의 만남은 그랬어.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너.

거침없이 다가오던 너.

우린 너무 달라.

양파 때문에 울고

파스타 때문에 웃었지.

It's my mystery.

Only my story.

반복되는 내 삶에

모든 것을 놓고 싶은 스물세 살의 나를

지켜 준 건 너였어.

네가 찍어 준 내 사진을 기억해.

전해 주지 못한 노란 새를 기억해.

커피 때문에 웃고

자두 때문에 울었지.

It’s my secret.

Only my love story.

세상을 내게 준다는 네게

내가 준비한 건 이별.

끝내 전하지 못한 헤어짐.

뫼비우스의 띠를 달리는 내게

끝없이 꼬이는 시간의 틈에 사는 내 전부는

이제 너야.

영원히 기억할게.

그때의 너도 지금의 너도.

우리의 추억이 날 살게 할 테니.

It's my destiny.

Only my sad story.

반복되는 내 삶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스물한 살의

나와 함께하는 건 지금의 너야.

곡이 끝났는데도 종이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에반을 본 상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하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사가 아니긴 했다.

이 가사로 뭘 전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시우는 그저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주받은 운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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