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어두운 침실.
곱게 잠들어 있는 시우의 앞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에반의 얼굴은 흠뻑 젖어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상준의 작업실을 나왔는지, 어떤 정신으로 이곳까지 왔는지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미래를 말하지 않은 이유가.
같은 공간 다른 시간대를 말하던 우리의 대화가 엇갈리지 않은 이유가.
오늘 제게 이별을 말한 이유가 시우가 적어 내려간 가사에 모두 녹아 있었다.
‘가사를 보면 뭔가 간질간질하고 달달한데, 시우는 이 가사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게 저주받은 운명이라더라.’
상준의 그 말을 끝으로 에반은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저주받은 운명.
절묘하게 떨어지는 설명이었다. 시우가 어떤 감정을 품은 채, 수없이 쓰고 지우고 고치길 반복하며 이 가사를 써 내려갔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수수께끼처럼 이어지는 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다. 알아봐 주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우는 이렇게라도 풀고 싶었나 보다.
알아봐 달라고. 제발 기억해 달라고.
아니. 이건 타인에게 알아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는 기억을 이렇게라도 남겨 놓고 싶었을 것이다. 시우가 고르고 고른 단어들은 사라져 가는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 주는 단서가 되는 것들이었다.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이마에 닿았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시우의 얼굴 여기저기를 누볐다.
얼마나 긴 시간을 갇혀 있었을까?
가끔 느껴지던 그 사무치는 외로움과 끝도 없는 어둠이,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시커먼 수렁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 같던 모습은 모두 착각이 아니었다.
시우는 자신과 똑같이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끝에 남는 것이 허무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노력하고 도전하고 또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워 나간 것이다.
끝이 정해진 시간을 돌고 돌고 돌면서.
남들보다 뛰어난 안무 습득 능력도, 생방송에서 일어나는 숱한 돌발 상황에도 태연했던 이유가, 지난 시간대 ‘Journey’ 멤버들과 어울릴 당시 모든 곡의 안무를 선보였던 이유 역시 이미 다 알고 있어서였다.
어쩌면 시우는 뜨지 못하고 묻히는 수많은 지망생 중 한 명으로 계속 이쪽에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루시퍼’는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매번 ‘루시퍼’의 메인은 자신이었던 것을 시우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눈으로 자신을 봤을까? 개인 활동을 하지 않으려는 제게 시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일갈했다.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네가 갈 수 있는 그 끝이 어딘지 넌 알지 못하며, 그 길을 제가 막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시우는 자신을 기억한다면 왜 저는 몰랐을까.
반복되던 그 긴 시간 중 에반이 시우를 본 건 지난 시간대가 처음이었다.
‘나 해외 투어 콘서트 해 보고 싶어.’
‘뮤직 어워드에도 초대받아서 가 보고도 싶어.’
‘해 보고 싶은 게 진짜 많아.’
‘내가 다 한다고 했잖아. 해외 투어 콘서트도 하고 싶고, 뮤직 어워드도 가 보고 싶어. 그리고 너랑도 잘 지내고 싶다고 했잖아. 진짜 바보 멍청이야. 에반. 으…… 이런 애가 뭐가 좋다고 내가 이러고 있나 몰라.’
진심이었다. 시우는 항상 진심이었고 숨기지 않았다.
아이돌의 삶도, 자신과의 연애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회귀했을 때 남는 것은 기억뿐일 테니까.
잠든 시우를 쓰다듬는 에반의 손길과 눈빛에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 * *
느릿하게 눈을 떴던 시우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제 몸이지만 제 몸이 아닌 것 같다.
평소 잠버릇대로 엎드린 자세로 눈을 감고 있던 시우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고, 이내 그 손은 목덜미를 덮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꼭 감은 시우의 눈썹이 젖어 들었다. 옅게 떨린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베갯잇에 동그란 흔적이 생겼다.
굳이 눈을 떠 확인하지 않아도 이 공간에 혼자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진하게 남아 있는 에반의 페로몬만이 조금 전까지 그가 여기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몸을 뒤척여 바로 누운 시우의 손이 이번엔 아랫배를 덮었다.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이별을 고하는 저를 두고 나갔던 에반이 언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그를 품고 있었다. 부드럽게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그 손길과 입술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지금껏 수많은 밤을 보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늘 한계라 생각했고, 그 이상은 없다고 여겼다.
잔뜩 화가 났으면서도 슬펐고, 격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에반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이로써 지금껏 어떤 식으로 에반이 자신을 배려했는지도 확실히 깨달았다.
베개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제 허리를 잡고 끝도 없이 파고들던 에반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시우는 그의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에반의 이는 기어이 제 목에 박혀 들었다.
제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에반의 것이 부푸는 것을 느낀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잇자국이 손끝에서 느껴지고 불편함이 느껴지는 아랫배에 손을 올려 둔 시우는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시도조차 하지 않던 각인과 노팅을 에반은 단번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끝내 버렸다.
왜…… 울었어?
끝끝내 에반을 밀어내지 못한 이유는 그의 감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 모질게 밀어내지 못하고 제게로 파고드는 그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적정선을 두려는 에반에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매달리고 애원하던 건 자신이었는데, 지난밤의 에반은 꼭 저를 닮아 있었다.
정말 마지막인 것 같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은 시우는 한 손을 짚어 몸을 지탱하려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드럽고 푹신한 이불의 감촉 대신 손안에서 구겨진 것은 종이였다.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자겠지.
이 종이가 제 손이 닿는 위치의 침대 위에 있다는 건 에반이 일부러 뒀다는 것을 의미했다.
차마 읽을 용기가 생기지 않아, 시우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얇은 속 커튼만 드리운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주황빛 빛을 보아 늦은 오후인 것 같았다.
이 종이만 두고 어디를 갔을까? 뭐가 적혀 있을까?
MBX 환의와의 스캔들은 어떻게 됐지?
밤새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하.”
깊은 한숨을 내뱉은 시우는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잡았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든 받아들여야 했다.
나의 페어를 만난 순간을 기억해.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떨렸거든.
놀란 표정마저 예뻤던 너.
도망가기 바쁘던 너.
우린 너무 같아.
고양이 머리띠와
흑표범 머리띠를 했잖아.
You’re not alone.
It’s our story.
반복되는 내 삶에
모든 것을 놓고 싶은 스물세 살의 나를
지켜 준 건 너였어.
아름다운 노을 속 빛나던 널 기억해.
내게 전화 안 한 건 너무했어.
우리 함께 한 버스킹.
자두에 밀린 내 진심.
I’m with you.
It’s our love story.
네게 세상을 주고 싶었어.
모두 망쳐 버린 건 나.
끝내 전하지 못한 고백.
뫼비우스의 띠를 달리는 내게
끝없이 꼬이는 시간의 틈에 사는 내 전부는
이제 너야.
내가 할게.
내가 찾을게.
내가 다가갈게.
이제 우리 사랑만 하자.
It’s our destiny
baby, I love you.
반복되는 내 삶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스물한 살의
나와 함께하는 건 영원한 우리야.
시우는 단정한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하얀 종이 위로 동그란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기어이 물방울 하나가 글자 위로 떨어지고 글자가 흐릿하게 번졌다.
끝까지 다 읽었지만, 시우는 다시금 처음부터 읽고 있었다.
줄을 그어 지운 흔적도 복잡하게 넣고 뺀 흔적도 없다.
하얀 종이에 깔끔하게 쓰인 글 위로 계속해서 물방울이 떨어져 여기저기 잉크들이 번졌지만, 시우는 계속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해 읽고 또 읽었다.
한 손으로는 종이를 든 채, 다른 손으로 에반이 만들어 놓은 각인의 흔적을 더듬었다.
흠뻑 젖어 버린 눈을 한 시우의 입술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퍼지고, 종이를 내려놓은 시우는 급히 손으로 젖은 얼굴을 닦았다.
드디어 몇 번이나 고치고 고쳤던 가사가 완성되었다.
더 이상 손댈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시우는 얼른 이불을 젖히고 두 발을 침대 아래로 내렸다. 지금 당장 에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방금까지 무거워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던 몸이 절로 움직였다.
“일어났어?”
시우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에반이 침실 문을 여는 것이 더 빨랐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페로몬이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시우를 감쌌다.
“말을 해 줬어야지!”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는 달콤한 솜사탕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는 시우의 불퉁한 말에도 에반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가사. 마음에 들어?”
“이리 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시우에게로 다가간 에반은 침대 아래에 몸을 낮춰 앉았다.
“나도 좀 물어야 할 것 같아. 네겐 거절권 따윈 없어.”
간밤에 제가 물고 빨아 통통 부은 붉은 입술이 실룩거리고 젖은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지만, 역시나 시우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 전에 콩나물해장국부터 먹는 건 어때?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잖아. 아! 후식으로 아이스홍시도 있어. 자두는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서.”
시우를 올려다보며 에반은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할머니가 끓인 거?”
방금까지 차갑게 굴던 시우는 어디 갔나요? 방긋 웃으면서 되묻는 시우의 목소리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응. 일단 먹고 물고 싶은 만큼 물 기회를 줄게.”
굳이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시간은 많고 많으니까.
혼자 만들고 혼자 간직한 채 조금씩 꺼내 보는 기억이 아닌 둘이 함께 만들어 가는 추억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