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그들의 공개 연애 – 팬 미팅 편 (3)
게임은 게임이고 벌칙은 벌칙이었기에 시우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 상자 안으로 손을 넣어 마구 휘저었다. 오늘 팬 미팅에 참여하신 팬들이 직접 적어서 넣은 수많은 종이가 손끝을 스쳤다. 하나를 집은 시우는 종이를 펴 보지 않고 곧바로 상준에게 넘겼다.
“자, 첫 번째 질문입니다. ‘시우 오빠, 러쉬가 좋아요? 록시가 좋아요?’ 이건 저도 궁금했던 사항입니다. 누가 좋아요?”
“상당히 어려운 질문을 해 주셨는데요. 지금 이 자리에 러쉬와 록시가 없는 것에 감사하며. 고양이인 록시를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더 좋아합니다.”
다음으로 뽑은 종이를 상준에게 건네주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두 번째 질문이고요. ‘코코야, 그래서 에반이랑 언제 결혼할 거야?’ 이거 시우 씨 잘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시우에게 쏠렸다. 이거 낯설지 않은 상황인데, 조금 다른 점이라면 완전한 침묵이 아닌 웅성거리는 소리는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 이거 내가 제일 궁금해. 우리 언제 결혼해?”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던 에반의 말에 웅성거림은 폭소로 변했다.
일단 ‘Not yet.’은 이미 써먹었고, 제법 고민하는 척 턱을 만지며 커다란 눈을 깜박이던 시우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Someday.”
시우의 대답에 에반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숙였고, 멤버들은 박장대소했으며 팬들은 진심 당황했다. 설마설마했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코코는 거절의 말을 하지 않았다. 콘서트에서 에반이 한 프러포즈가 장난이라 여긴 이가 더 많았던 탓이다.
“에반 씨, 힘내세요. 거절은 안 했으니까.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오늘 질문을 보아하니 여기 계신 분들 콘서트 사건 및 라이브까지 다 챙겨 보신 것 같군요.”
상준의 재치 있는 입담에 팬들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이래서 어떻게든 게임에서 이기려고 했던 것인데.
“나, 딸!”
“이 형은 낄낄빠빠 몰라요? 죄다 자기가 대답하려고 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시우 대신 대답한 에반은 잔소리를 퍼부으며 제 옷을 잡고 끌어당기는 예찬의 힘에 밀려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딸이래요.”
수습 불가. 그냥 되는대로 살자.
이미 공개 연애가 되어 버린 마당에 부인하는 것이 더 곤란할 지경이었다.
에반의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는 그를 원망할 수 있었지만, 제 입으로 내뱉은 ‘각인’이라는 단어를 상기한 시우는 자리로 돌아가며 작게 대답했다.
시우에 이어 다음 게임에서 진 예찬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한 후, 마지막 이벤트로 넘어갔다.
무작위로 번호를 뽑은 후, 그 번호의 팬분이 무대로 올라와 멤버들과 함께 간단한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시우는 제 옆에 선 남성분과 시선을 맞추고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조금 전 일대일 대면에서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제 얼굴만 뚫어져라 보다가 내려간 분이었다.
“자, 팀은 정해졌고요.”
다섯 명의 팬이 올라오고 제 눈인사를 받아 준 팬과 어색한 것 같은 가벼운 인사를 나눈 시우는 게임을 진행하는 상준을 바라보았다.
별생각 없이 편하게 서 있던 시우는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에반의 손길에 거칠게 이끌려 뒷걸음질 쳤다. 제 의지가 아니라 에반의 힘에 떠밀린 것이었기에 비틀거려야만 했다. 겨우 몸을 바로 한 시우의 앞엔 에반의 넓은 등이 있었다.
“씨발…….”
에반이 거친 말을 쓰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거친 욕설과 함께 에반은 시우의 옆에 섰던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 올린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팬 미팅장이 어수선해지고, 시우는 제 어깨를 잡고 더 뒤로 당기는 찬의 손에 이끌려 몸을 움직였다.
“오메가는 무슨. 베타 주제에 각인 같은 소리 하고 지랄하네. 네까짓 게 에반한테 어울리…….”
급하게 보안 요원들이 뛰어 들어오고, 그 남자가 끌려 나가며 기괴하게 웃으며 떠들어 대는 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무슨…….”
미처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시우는 여전히 저를 보호하듯 어깨를 감싼 채,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수습하는 것을 지켜보는 찬의 옷깃을 잡았다.
“저 정신 나간 새끼가 방금 알파 페로몬 풀었어. 그것도 너 노리고.”
찬의 말에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제 하관을 가렸다. 지금껏 에반에게서 이런 페로몬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사소한 것으로 투덕거리다 에반이 삐지거나 화가 났을 때 불안정한 페로몬이 흘러나오긴 했었다. 에반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점차 더 지독해지자 시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미친 새끼들.”
시우를 감싸고 있던 찬은 시우를 제 뒤로 세우며 조금 더 물러났다. 알파인 찬과 에반, 예찬에게 오메가들이 페로몬을 풀고 달려드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시우를 상대로 이런 일은 없었기에 모두 당황한 상태였다.
팬 미팅에 온 몇 명의 팬들이 급히 코와 입을 막는 것과 예찬이 무대 뒤로 따라 내려가려는 에반을 잡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뚝뚝 끊겨 보였다.
폭발하듯 이곳을 가득 채웠던 에반의 페로몬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괜찮아?”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온 대환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에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굳은 표정과 꽉 쥐어진 주먹이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에반이랑 시우. 잠시 내려가자.”
대환의 말에 무대 아래로 내려간 시우는 자신을 끌어안는 에반의 품에 얌전히 안긴 채 그의 등을 토닥였다. 무대에 남은 멤버들이 팬들과 소통하며 상황을 수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동을 피운 이는 경호원들과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놀란 스태프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 괜찮아.”
에반이 너무 강하게 끌어안아 숨이 막히고 허리와 등이 아팠지만, 시우는 진심을 담아 속삭이듯 말했다. 귀여운 케이티에게도 질투를 하던 에반이다.
끌려 내려가며 외치던 말이 떠올랐다. 형질 이야기. 제가 실수로 흘린 말이 이렇게 돌아왔다.
알파인 그는 아무래도 페로몬을 제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의 형질을 확인하려 한 모양이다. 아무리 숨기려 한다고 해도 짧은 순간 강한 페로몬에 노출되면 알파나 오메가라면 자연스럽게 방어적으로나마 제 페로몬을 드러내는 것을 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페로몬을 뿜는 것을 알아챈 에반이 격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제게 에반의 페로몬을 잔뜩 묻혀 놓은 것은 이미 알고 있고, 이제는 그러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지금 에반에게도 제 자두 향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제 옆에 서 있었던 상대는 제게서 에반의 페로몬이 짙게 나는 것을 확인하고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팬이 아닌 에반의 팬으로 둘의 사이를 인정하는 것 같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라이브 때 보았던, 어울리지 않는다, 에반이 아깝다, 헤어져라, 이런 글들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이만하면 그만해도 되지 않아?”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에반의 투정에도 시우는 그의 뒷머리와 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돌로 최정상에 서고 싶은 제 꿈은 이뤄졌고, 계속해서 회귀가 반복되더라도 함께해 줄 연인이 있다.
자신의 욕심이 일을 이렇게 만든 것 같다.
제가 친 사고에 에반은 몇 가지 안을 제시했었다. 끝까지 숨기고 시우가 원하는 만큼 연예인 생활을 하는 것과, 모든 것을 밝히고 연예인 생활을 그만두는 것. 아니면 둘의 사이를 밝힌 후 연예인 생활을 이어 가는 것. 그리고 에반은 솔직하게 우리 둘에게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시우는 조금만 더. 스물다섯까지만 더 하자고 했다.
기본적으로 회귀는 5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
스물셋 정해진 날에 회귀하지 못했지만, 스물다섯의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우겼다.
이번에 회귀하지 못한 건 이번 시간대의 시작이 스무 살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때쯤이면 상준은 디렉터로, 찬은 연기자로, 이미 예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예찬에게도 큰 피해를 줄 것 같지 않았다.
“……정말 그만할까?”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던 시우는 제 몸을 타고 에반의 페로몬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제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아니. 괜한 말 또 꺼내서 미안해.”
천천히 자신을 놓아주며 읊조리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발끝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에반이 더 멀어지기 전 아주 짧게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대었다.
“이번 활동 끝나고 멤버들하고 다 같이 의논해 보자. 우리 둘만 결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김시우, 이제 나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네.”
에반은 고개를 젖혀 자신을 보면서 종알거리는 시우의 입술에 다시 제 입술을 대었다. 옆에서 흠흠하는 대환의 헛기침 소리만 없었어도……. 키스가 아닌 뽀뽀에서 멈춘 에반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대환을 쳐다보았다.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달달한 눈빛으로 시우를 보던 눈빛이 어쩜 그리 짧은 순간 바뀔 수 있는지.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뻔뻔해진 대환은 왼손을 들며 제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켰다.
“팬 미팅 마무리해야지.”
“언행일치 안 되는 에반 씨, 손은 빼고 말합시다.”
시우는 어느새 크롭 티 안으로 들어와 제 등을 쓰다듬고 있는 에반의 손목을 턱 하니 잡으며 대환의 눈치를 봤다.
불미스러운 소동으로 마지막 게임은 흐지부지되어 버렸고, 에반과 시우가 무대로 복귀 후 간단한 마무리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팬 미팅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