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61화 (161/187)

외전 1. Merry Christmas (1)

독한 양주가 담긴 작은 잔을 든 시우는 창가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린 시간.

은은한 조명이 정원을 밝히고 있었고, 그 위로 아침부터 내린 눈이 소복소복 쌓여 갔다.

장작을 가득 채워 넣은 벽난로에선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바로 앞에 있는 2m가 넘는 커다란 트리 아래로 선물 상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오디오에서 나오는 잔잔한 캐럴이 시우가 있는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단번에 잔 안에 든 호박색 액체를 꿀떡 마시자, 독특한 맛과 함께 식도와 위가 따뜻해졌다. 이게 몇 잔째더라. 얼음도 넣지 않은 채, 스트레이트로 양주를 연거푸 마신 시우의 입술이 아래로 축 처졌다.

“9시…… 45……분.”

잘 보이지 않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살짝 머리를 흔들고 눈을 조금 길게 감았다가 뜬 시우는 느릿하게 시계가 가리키는 바늘을 읽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눈 때문에 길이 많이 막히네. 사랑해.]

휴대전화를 켜자 조금 전 에반이 보내 놓은 메시지가 떴다. 오후에 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온다던 그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그 이름만으로도 들뜨고 행복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날.

시우는 커다란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더군다나 오늘은 쉽게 볼 수 없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심심하다.”

러쉬나 록시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들은 에반의 부모님 댁에 있었고. 집안일을 돌봐 주시던 분들도 모두 휴가를 떠났다.

양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벽난로 앞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시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게임도 지겹고 한국은 이른 아침일 테니 마땅히 연락할 사람도 없는 와중에 시간을 보내기 적합한 것이 떠오른 것이다.

스물다섯.

데뷔 6년 차인 오션은 현재 각자의 생활에 더 열중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해체를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제가 선택한 일을 착실하게 해 나갔다.

예상대로 찬은 연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예찬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상준은 디렉터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에반은 가업을 잇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고. 자신은…….

예능이나 방송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냥 빈둥거리는 신세였다. 공부든 뭐든 제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에반의 뜻에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한 채 벌써 3개월째 영국에서 빈둥거렸다.

늘 같은 시간만 맴돌다 스물다섯이 끝나 가는 지금까지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이 시간대에 멈추는 것일까? 또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연말까지 쉬겠다고 선언한 상태인데, 해가 지난다면 뭐든 결정해야 했다.

어쨌거나 지금부터 할 일을 결정한 시우는 분주히 움직였다.

이윽고 아름답게 꾸민 트리 아래 자리를 잡은 시우는 싱긋 웃으며 과감히 버튼을 눌렀다.

“메리 크리스마스, 니모.”

말꼬리가 길어지긴 했지만, 인사를 한 시우는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흘러나오는 캐럴을 따라 불렀다. 지금 시우가 선택한 것은 라이브였다.

라이브로 흥한 자 라이브로 망할지 몰라도, 어쨌거나 지금은 소통할 수 있는 니모가 있다는 것이 더없이 즐거웠다. 알딸딸한 느낌과 함께 우울했던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비록 제 옆에 에반은 없지만, 이 시간에도 함께해 주는 니모가 있었다.

“우와. 지금 한국은 해도 안 떴잖아요.”

한글이 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보며 시우는 소매로 하관을 가린 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화면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 또 영국이냐, 에반은 어디 있냐는 질문을 확인한 시우의 눈꼬리가 새초롬히 올라갔다.

“에바니 아까 낮에 나갔는데, 아직 안 왔어요. 밖에 눈 오는 거 보이죠? 화이트 크리스마스. 다들 크리스마스이브 잘 보내고 계신가요? 선물도 많이 받으시고요?”

시우는 트리 아래 무수히 쌓여 있는 상자와 큰 창 너머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본 니모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여기는 밤 10시가 다 됐고……. 아……! 술은 쬐금 쬐금 마셨습니다.”

시우는 몸을 살짝 틀어 뒤에 쌓여 있는 선물 상자 중 하나를 집어 앞으로 가지고 왔다.

“할 것도 없고 에바니가 올 때까지 여기 있는 선물 하나씩 풀어 볼게요. 이게 왜 이렇게 많냐면 12월 1일부터인가 에바니가 막 여기에 상자들을 갖다 두더라고요. 그러고는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야지 풀어 볼 수 있다고 해서 그냥 쌓아 놓고 있었어요. 언박싱……. 상자 풀어 보는 거니까 언박싱 맞죠.”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해체한 시우는 상자 안에서 연분홍색의 니트를 꺼냈다. 화면에 니트를 보여 주고는 또 다른 상자를 앞으로 가져왔다.

“다 옷이랑 장신구네요.”

니트에 이어 아이보리색의 코트도 나왔고, 시우가 좋아하는 귀걸이와 팔찌, 반지도 몇 개 나왔다.

상자를 푸는 시우의 두 볼은 발그스름했고, 가끔 상자를 풀다가 헛손질을 하긴 해도 아슬아슬하게 라이브를 이어 가고 있었다.

“올해까지는 쉬고 내년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중이에요.”

잠시 집중해서 화면을 보고 큰 눈을 깜박이던 시우는 익숙한 제 휴대전화 벨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자, 에바니 전화 안 받습니다. 댁은 어서 오기나 하세요.”

에반의 전화인 것을 확인한 시우는 화면을 향해 말하곤 또 다른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던 시우는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올라가던 채팅창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라면 신경을 썼겠지만, 알코올의 지배 아래 들어간 시우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션 에반 : 코코…… 당장 라이브 꺼.]

[오션 에반 : 김시우, 화면 보라고!]

[오션 에반 : 너 또 내일 후회한다. 제발……. 그럼 선물 뜯는 것이라도 그만하자, 시우야.]

채팅창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씩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 주는 시우와 달리 채팅창을 주시하던 니모들은 난리가 났다. 갑자기 채팅창에 에반이 나타날 줄이야. 그리고 지금 그는 시우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휴대전화가 울리자 정말 귀찮았는지 시우는 아예 전원 버튼을 눌러 꺼 버렸고, 답답한 에반이 그에게 의사를 전할 방법은 채팅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반이 열심히 그를 폭주를 막으려 했지만, 이제 채팅창 따위는 까맣게 잊은 시우에겐 그의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

“아, 덥다.”

갑작스러운 시우의 행동에 라이브를 보던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이내 하얀 반소매 티셔츠가 나오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라이브를 지켜보는 모든 이는 시우가 취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코코영사해 : 시우야, 제발 채팅방 좀 봐 줘.]

[에코뽀에버 : 에바니의 소리 없는 아우성 ㅋㅋㅋㅋㅋㅋㅋ]

[에코단소원성취 : 그런데 저기 상자에 뭐가 있길래??????? 응?????????]

에반이 나타난 이후로 채팅창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지만, 역시나 그것은 시우에게 닿지 않았다.

“어! 이건 찬이 형이 준 거예요.”

그리 크지 않은 상자를 집은 시우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션 에반 : 난 분명히 말렸다.]

잠시 조용하던 에반이 한마디를 남기는 것과 동시에 채팅창이 출렁였다. 하지만 캐럴을 따라 부르며 상자를 푸는 시우의 얼굴엔 환한 웃음만이 가득했다.

“이게 뭐야…….”

상자를 열어 본 시우는 뜬금없이 들어 있는 토끼 머리띠를 집어 들었다. 뭘 이런 걸 선물해. 팬분들이 주신 각종 동물 머리띠만 해도 처치 곤란이었다.

“무슨 크리스마스 선물로 토끼 머리띠? 잘못 보낸 게 아닐까요?”

손에 든 토끼 머리띠를 휙 하니 뒤로 던져 버린 시우는 이번엔 그 상자 안에서 하얗고 몽글몽글한 것을 꺼냈다.

“이건 또 뭐야? 패스…….”

화면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토끼 꼬리로 추측되는 것 역시 허공을 날아 시우의 뒤로 사라졌다.

“저 안대 많거든요?”

귀여운 안대 역시 쿨하게 패스해 버린 시우는 마지막으로 핑크색 부드러운 천으로 예쁘게 장식한 장난감 수갑을 꺼냈다.

“이 형이 장난치나…….”

라이브를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의 동공이 불안하게 떨리고 설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되새기느라 잠시 채팅창이 멈췄다. 이래서 에반이 선물 상자 여는 것만이라도 하지 말라고 애원한 것인가?

다양한 생각을 하는 이들을 두고 여전히 술에 취해 이성이 반쯤 날아간 시우는 장난감 수갑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역시나 뒤로 던졌다.

“선물을 주려면 제대로 된 걸 줘야지. 나중에 찬이 형한테 한 소리 해야겠어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시우는 방금 것보다 조금 작은 상자를 또 가져왔다.

“이건 예찬이가 준 거.”

상황이 어쨌건 혼자 신이 난 시우의 손에서 그 박스마저 활짝 열렸다.

“에???”

잠시 안을 들여다보고 작은 소리를 내뱉은 시우는 그대로 한참을 그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김시우!”

모두들 예찬은 또 어떤 것을 보냈나 궁금해하는 시점에서 훅 들어오는 에반의 목소리에 니모들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까지 재밌게 보고 있던 라이브가 끝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까지 늦을 일이 아니었다. 눈이 내리는 것을 감안해서 조금 일찍 출발했는데, 앞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로 에반은 꼼짝없이 차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시우에게 상황 설명도 하고 충분히 사과도 했는데, 뜬금없이 라이브 시작을 알리는 알람음에 에반은 머리털이 쭈뼛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았다.

다행히 운전기사님이 계셨기에 휴대전화로 라이브에 접속한 에반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볼이 발그스름하고 같은 단어를 두 번씩 말하는 걸 보니 혼자 한잔했구나. 한데 소주와 맥주는 없을 텐데. 지금 집에 있는 술은 양주와 와인, 샴페인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시우 혼자 양주를 마셨다는 것이고, 뜬금없이 선물을 뜯겠다는 말에 에반은 라이브를 멈추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 전화가 걸려 온 것을 보고는 상큼하게 웃으며 휴대전화 전원까지 꺼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시우의 모습에 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형이 좋은 거 보냈으니까 크리스마스이브 뜨겁게 보내.’

예찬과 찬이 보낸 크리스마스 선물이 도착한 날, 찬은 제게 따로 전화를 걸어 그 말을 전했던 것이다.

겁도 없이 풀어 헤치던 상자 중 찬의 것을 뜯는 순간 에반은 모든 것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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