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8
찬은 짧게 휘파람을 불며 넓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세기의 결혼식이다. 그들의 바람대로 언론이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고성을 기준으로 거의 5km 지점부터 보안 요원들이 즐비했다.
그 지역 일대가 모두 루이스가의 소유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머리 위로 보안용 드론이 지나가는 것에 잠시 시선을 뒀지만 이내 그의 시선은 사람들이 가득한 정원으로 향했다.
맑고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든 가을의 야외 결혼식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햇볕은 따스했고 간간이 부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고운 색을 입은 나뭇잎들이 하늘거리면서 떨어졌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시우와 그의 옆에 꼭 붙어서 시우를 챙기는 에반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다.
사랑의 서약에 이어 가벼운 입맞춤으로 공식적인 결혼식이 끝나고 자유로운 파티가 시작되자 찬은 조용한 2층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화이트 바탕에 짙은 감색 포인트를 더한 웨딩 장식은 고급스러웠고, 음식이나 분위기 모두 나무랄 것 없이 완벽했다. 겨우 100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참석한 결혼식은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군청색의 정장을 맞춰 입은 에반과 시우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사와 가벼운 포옹을 나누는 것을 지켜보는 찬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모두의 축하 속에서 환하게 웃는 그들보다 자신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월등하게 큰 키와 체격 덕분에 예찬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호탕하게 웃는 얼굴에 시선이 닿았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인지 턱시도 같은 옷을 입은 러쉬가 껑충거리며 예찬에게 달려들자, 예찬은 신난 러쉬와도 놀아 주고 있었다.
“졸지에 투명 인간 됐네.”
사람들과 섞여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함께 식사하는 동안에도 예찬은 제게 어떤 말도 걸지 않았다. 스치듯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역시나 먼저 시선을 피하는 건 그였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저와 마주치면 그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계속해 예찬만 눈으로 쫓을 것이 불 보듯 뻔해 찬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일요일 돌아가는 비행기 편이 예찬과 같았다. 다른 시간대에 표가 있다면 바꿔야겠다. 이렇게 멀어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은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시간을 갖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이등석으로 봐야 하나.”
일등석에 빈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검색하려 손끝을 움직이던 찬은 제 손에서 휴대전화가 쓱 빠져나가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는지 기다려 주려고 했더니, 이번엔 회피성 도망?”
방금까지 정원에 있던 예찬이 앞에 있었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예찬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이럴 때면 예찬과 자신의 직업에 회의가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 관리는 필수였기에 감정을 숨기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여상스러운 목소리까지 더해지자 찬은 그의 생각이나 감정을 넘겨짚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나랑 말도 안 하려고?”
“형인데 말 바로 하지?”
변명거리조차 떠오르지 않는 찬은 그의 손에서 제 휴대전화를 받아 오며 복잡한 감정을 숨겼다.
“형이 형답게 굴어야 형이지.”
“나중에 이야기하자. 여기 에반이랑 시우 결혼식장이야. 너랑 감정싸움 할 생각 없어.”
계속해서 삐딱하게 나오는 예찬의 행동에 찬은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는 그의 행동에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아섰다.
“이거 놔. 안 잡는다며, 그런 거 이제 안 한다며. 내 마음대로 하라며.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하는 중이야.”
어차피 힘으로는 예찬을 이길 수 없기에 적당히 말로 해결하려고 했다.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예찬 때문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찬은 손목을 비틀었다.
손목을 비트는 제 행동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목을 놓아주는 것과 동시에 예찬이 저를 끌어안자 찬은 벗어나려 하기보다 가만히 있었다. 섣불리 예찬을 자극해 일을 크게 만들기보다 적당히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자니 예찬의 옷에 은은하게 배어 있는 페로몬이 제일 먼저 찬에게 다가왔다.
일부러 제가 느낄 수 있도록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밴 그 페로몬에도 찬은 흔들렸다.
예찬이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다. 예찬이 옳은 결정을 하지 못한다면 제가 그리해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매번 나보다 나이 많다고 그러더니,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몰라. 오늘 결혼하는 저 사람들 보고도 뭐 느끼는 거 없어?”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하는 예찬의 가슴에 두 팔을 짚었다. 조금은 기분이 괜찮아진 것 같으니까, 지금이 그의 품을 벗어날 가장 좋은 기회였다.
“느끼긴 뭘 느껴. 다음 주부터 새 작품 대본 리딩 할 생각에 머리가 아픈데.”
두 팔에 힘을 싣자 예찬은 순순히 뒤로 물러나 주었다.
“알겠어.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할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비행기 표 바꾸는 짓은 하지 말자. 나 평생 안 보고 살려고? 그러고 싶어도 우리 오션이야. 그리고 우리 사는 건 형 말대로 스케줄이 겹치는 것도 아니고 금전적으로 힘든 것도 아닌데 굳이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긴 하더라고. 어차피 거기 형 집이니까 내가 나가야지, 뭐. 그만 숨어 있고 나와서 파티 즐겨. 형 좋아하는 마카롱도 많고, 화이트 와인도 괜찮더라.”
당장이라도 어떤 결정을 내릴 것처럼 하더니 그저 한번 끌어안았다가 놓고 제가 제안했던 모든 것을 들어준다는 예찬을 바라보는 찬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소리 없이 들어왔던 것처럼 소리 없이 예찬이 나간 공간엔 찬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 *
창가에 서서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정원을 보던 시우는 에반이 다가오는 것을 창을 통해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살포시 저를 뒤에서 안아 주기에 몸의 힘을 빼고 그의 가슴에 편히 기대섰다.
“기분이 어때?”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복잡한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미 혼인신고도 했고, 에반과는 계속 함께였다.
결혼식이라는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은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후에 시작한 결혼식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고, 모두가 돌아간 지금 커다란 고성엔 에반과 자신 둘뿐이었다.
늘 자신을 불안하게 하던 회귀에 대한 트라우마도 이제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회귀가 이루어지던 시점들을 모두 지나갔다. 가끔 불안해하는 제게 에반은 늘 같은 말들을 속삭였다. 또다시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가 자신을 찾겠노라고.
“이상해.”
뒤에서 편안히 끌어안는 것 다음으로 제 머리와 볼에 입을 맞추고 이내 제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에반의 머리에 손을 댔다.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에반의 모습에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행복한 게 아니고?”
“사람들이 축하해 줘서 좋았어.”
“또?”
“뭐가 또야. 그러는 넌 기분이 어떤데?”
시우는 몸을 돌려 에반을 끌어안았다. 은은한 그의 페로몬과 함께 일정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처음엔 자신과 조금의 인연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우연히 방송이 한번 겹쳤을 뿐 잠시 방송에서만 보고 다시 남이 될 사람이었다. 하늘의 별이라 여기던 사람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호의를 무시하고, 허락도 없이 제 마음에 자리를 잡는 그를 뿌리치고 밀어내려던 시간도 많았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시간 속에서 먼저 자신을 알아봐 준 에반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남들 모르게 각인을 하고 혼인신고를 한 것보다 더. 길거리에서 끌어안아도 되고, 키스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고,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나와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좋아. 무엇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방법으로 너와 나를 완전히 묶어서 이제 조금 안심이 된다고 할까?”
이렇게 꼭 붙은 상태에서 에반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 그의 몸을 통해 웅웅거리며 들리는 말이 참이 좋았다. 어쩜 이렇게 달콤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잘하는지. 반면 매번 그에게 제대로 된 고백 하나 못 하는 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도.”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에반이 모두 해 버렸다. 다음 주면 언론에 우리의 결혼 사실이 알려질 것이고, 한동안 외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 주, 촬영하면서도 촬영 팀 외에 보안 팀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촬영하는 것들도 파파라치는 찍어 댔다.
가득 담긴 바구니에 무언가를 넣으려고 하면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처럼 에반과 영원히 함께하기로 마음먹고 루이스가의 사람이 되는 순간 영원한 자유를 잃었다. 이제 외출을 하려면 경호원을 동반해야겠지. 일거수일투족을 파파라치들이 찍어 댈 것이 분명했다.
조금이나 남아 있던 모든 자유를 포기한대도 그가 좋은 걸 어떡해.
지옥 같던 긴 시간 조금의 빛도 없는 어두운 터널을 헤맨 이유가 에반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면.
끝없는 좌절과 막막하던 미래가 이런 달콤함을 주기 위함이었다면.
감내할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힘든 시간을 잘 견뎌 낸 제가 이렇게나 기특한 순간은 없었다.
“에바나. 에반. 에반 루이스.”
시우는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에반의 심장이 점차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쓰다듬고, 머리에 입을 맞추는 그 행동이 그의 기분과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
“사랑해.”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에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힘차게 뛰고 있는 그의 가슴에 대고 속삭이는 순간 폭발하듯 에반의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코코. 나도…….”
“으읍…….”
감정과 기분을 숨기지 않고 넘치는 페로몬을 막지 않은 에반은 시우에게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을 깜박였을 땐 혼자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방심하고 있던 에반을 강하게 밀치고 욕실로 뛰어가는 시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코코?”
“그…… 페로몬 좀 당장 치워.”
결혼 첫날밤.
에반은 방문에 기대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옆에 가기만 해도, 아니 자신의 페로몬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는 순간 헛구역질을 하는 시우에게 쫓겨난 탓이었다.
외전 2-9
몸을 뒤척이며 따스한 체온을 찾아 움직이던 시우는 이상한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더 크고 더 따뜻하고 더 단단해야 하는데,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자신을 안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린 시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엄마. 언제 왔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시우는 엄마의 포근한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저보다 작은 엄마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에반이 전화해서 왔지. 속은 괜찮아?”
엄마의 손길을 느끼던 시우는 그제야 지난밤 일을 떠올렸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겠는가. 에반이 가까이만 오면 속이 뒤집히는데.
미치도록 불편한데 그렇다고 시원하게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내는 것도 아니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불편한데, 구토를 하려 해도 헛구역질만 올라올 뿐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괜찮아진 것 같아 차가운 물로 입을 헹구다가도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엎드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안절부절못하고 등을 쓸어 주던 에반이 물을 가지러 나가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고통이 가신 가슴과 배를 만지며 혼자 멍청히 서 있던 시우는 에반이 물을 들고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몸을 숙여야만 했다.
등을 두드려 주고 걱정하던 에반이 주치의에게 연락하겠다며 휴대전화를 찾으러 나가자, 뒤집혔던 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멀쩡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한 것도 잠시 찝찝함에 양치질을 하던 시우는 에반의 등장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몇 번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에반이 옆에 없으면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정말 에반을 방 밖에 두고 혼자 침실에 앉았을 땐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결혼 첫날밤 시우는 에반을 방 밖으로 쫓아낼 수밖에 없었다.
온종일 긴장한 상태로 결혼식을 치르고 속이 뒤집혀 힘겨워하던 시우는 일단 쉬면 괜찮을 것 같아 침대에 잠시 누웠었다. 잠깐만 쉰다는 것이 그만 잠들고 말았나 보다.
“에반이 그 이야기도 했어?”
“너 계속 토하려고 했다며.”
“진짜 별 이야기를 다 했네. 피곤하고 스트레스받아서 그랬겠지. 뭐 그런 걸로 엄마한테 전화를 해? 의사 부른다더니 의사는 오지도 않고. 거기다 에반이 전화했다고 바로 오는 엄마는 또 뭐야. 엄마 오늘 오후에 이탈리아 가야 하잖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해? 내 아들이 아프다는데?”
시우는 엄마의 품에 편안히 안겨 있었다. 이렇게 엄마한테 안겨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얼마 전 집에 갔을 때도 처음 집에서 엄마를 만났을 때와 헤어지기 전 잠시 포옹을 하긴 했지만 그건 찰나의 시간이었다.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등도 쓸어 주던 엄마의 손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꽤 긴 시간 시우는 혼자였다. 가족이 있지만, 혼자만의 비밀을 가진 이후 저도 모르게 그들과 거리를 뒀었다. 제게 일어난 불행이 그들에게까지 옮아갈까 두려웠었다.
꼭 그러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아프다 힘들다고 말하면 엄마는 언제든 자신을 이리 안아 주셨을 것이다.
“나도 엄마가 제일 좋아. 엄마 최고야.”
아침부터 우울한 생각이 몰려오자 시우는 얼른 입을 열었다.
“다 큰 애가 오늘따라 왜 이래. 나한테 이러지 말고 네 짝한테나 이러세요. 에반이가 걱정을 많이 하더라.”
“걘 원래 뭐든 다 과하게 생각해. 엄마 온 김에 더 놀다가 가라 하고 싶은데. 엄마 내일이나 모레 갈래? 여기서 좀 놀다 가. 내가 연락해서 일정 바꿀게.”
“네 걱정 해 주는 사람한테 그리 말하면 못써. 그리고 아빠 혼자 호텔에 두고 왔는데 가 봐야지. 너 괜찮은 것도 봤고. 난 또 혹시나 했지.”
“뭘 혹시나 해?”
“할머니 되는 줄 알고?”
엄마와 오랜만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시우는 황당한 말에 파드득거리며 그녀의 품을 벗어나 일어나 앉았다.
“엄마!”
“베타 집안이라 이런 건 나도 생각 못 했지만, 네가 오메가이고 에반이 알파인데, 엄마가 이런 말도 못 해? 시아는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 시아가 시집가서 애 낳는 것보다 네가 더 빠르잖니.”
“헐.”
아무리 그래도 제가 엄마와 임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시우는 멍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거기다 너 에반이 옆에 있으면 속 불편해했다며. 내가 말 안 했었니? 너희 둘 다 얼마나 요란스러웠는지, 시아 때는 뭔지 몰라서 헤매다 6주 때 알았다만, 넌 한번 해 봤다고 4주도 안 돼서 알았잖아. 증상이 똑같으니 어찌 몰라. 네 아빠가 옆에만 오면 속이 뒤집히는데 이걸 누구한테 말해도 들어 줘야 말이지.”
“…….”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며 시우의 손이 슬금슬금 움직이다 자신의 아랫배에 멈췄다.
“그런데 또 널 보니 아닌 거 같기도 하네. 엄마는 아침에도 힘들었거든. 속이 비면 입덧이 더 심해져서 비스킷 같은 거 늘 손 닿는 데 두고. 아이고, 그건 겪어 봐야 알지, 말해서 누가 알아.”
“엄마, 입덧 심했어?”
늘 조심하다가 피임을 하지 않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사이 히트나 러트도 오지 않았었기에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래도 조심하지 않은 건 사실이고, 노팅까지 잘 이어지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최근엔 모든 관계가 자연스럽게 노팅으로 이어지고 있긴 했다.
“내가 말 안 했었어? 시아한테 말했었나? 어쨌거나 너 낳을 땐 너 낳기 전날까지 입덧했지. 몸무게 늘지 않는다고 의사 선생님한테 얼마나 혼났는데. 시아가 3.1kg였고 네가 2.8kg였나? 하여튼 둘 다 작은 편이었지.”
“에이. 아니야. 아닐 거야.”
엄마의 말을 듣던 시우는 대충 부인하며 손을 휘적거리다 노크 소리에 문을 바라보았다. 방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지켜보던 시우는 다급히 제 입을 손으로 막고는 침대를 구르듯 내려가 침실과 붙어 있는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다급하게 사라진 시우를 바라보던 엄마의 시선은 처음엔 조심스럽다가 우당탕거리는 소음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에반에게로 향했다. 그러곤 서둘러 시우를 따라가려는 에반의 팔을 잡아 세웠다.
“내가 가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결혼 소식과 2세 소식을 같이 들을 줄 정말 몰랐는데, 어쨌거나 지금부터 몇 달 동안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 그거밖에 방법 없어.”
웃으며 욕실로 들어가는 어머님을 보던 에반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아! 엄마. 아니라니까.”
헛구역질 몇 번 후, 차가운 물에 세수하던 시우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의 얼굴에 서린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고는 버럭 외쳤다.
“알겠어. 네가 아니면 아닌 거지. 엄마는 그냥 걱정돼서.”
“아, 엄마. 얼른 가. 아빠 기다리겠다.”
시우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엄마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아까는 놀다 가라며.”
“아니야. 내 생각이 짧았어.”
“몸조심하고.”
“아니라고!”
계속해서 자신을 살피며 미소를 짓는 엄마의 등을 떠미는 시우의 손속엔 사정이 없었다.
늦은 밤 제가 걱정돼서 와 준 엄마의 등을 떠밀며 내보낸 시우가 다음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은 에반이었다.
하지만 3m 정도 거리를 두고는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그 모습에 시우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울 엄마가 뭐라고 했지?”
시우는 제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물러서서 말을 하는 에반을 노려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별말씀 안 하셨어. 참 휴대전화는 확실히 꺼 뒀지?”
그러자 에반 역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어젯밤에 끄는 거 봤잖아. 그건 그렇고 너 왜 자꾸 도망가.”
둘의 결혼식에 관련된 공식 발표는 다음 주 월요일로 준비했다. 영국 시간 기준 월요일 오전 10시. 한국 시간으로 오후 6시였다. 영국은 기사로, 한국은 기사와 소속사 홈피에 그들의 동영상이 동시에 업데이트되도록 맞춰 놓았다.
혹여 그 전에 기사가 뜨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될 때까지는 이쪽에선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것이라 예상하기에 일을 해야 하는 에반과 다르게 시우는 결혼식이 끝남과 동시에 휴대전화를 껐고, 최소 일주일은 고성에서 조용히 지내기로 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네가 또 불편해할까 봐.”
다시 다가가자 역시나 뒷걸음질 치는 에반을 보던 시우는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의사가 아니라 엄마한테 전화했어?”
중구난방 제멋대로 날뛰는 기분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말에 강하게 부인했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싶어 얼떨떨하고, 기쁘면서도 불안감이 몰아쳤다. 이 상황에 자신을 피하는 것 같은 에반의 행동이 심하게 거슬렸다.
무조건 좋아해야지. 너도 원하는 거라고 말해야지. 이 미적지근하면서 피하려는 반응에 화가 났다.
“아무래도 어머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아서.”
며칠 전부터 시우의 페로몬이 불안정했다. 시기상 히트 사이클이 올 때가 되었고, 결혼 준비로 예민해져 있었기에 에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처음 그 이질적인 향을 맡은 것은 결혼식 도중이었다.
떨림과 긴장, 불안과 초조 속에 행복함까지 뒤섞인 복잡한 시우의 페로몬을 느끼며 에반은 최대한 편안한 감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서로의 페로몬과 감정이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을 안 이후로 늘 그러려고 노력하던 참이었다.
제가 잘못 느낀 것인지 그 향이 금세 사라져서 결혼식에 참석한 알파의 페로몬을 잘못 느낀 것인가 하며 무시했었다.
하지만 어젯밤 시우를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에반은 시우의 페로몬 사이로 이질적인 향을 느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껏 갈무리하고 있던 페로몬을 편하게 푸는 것과 동시에 비례하듯 그 향도 강해졌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갈 때면 그 향은 방어하듯 더 강한 향을 내뿜었고, 동시에 시우는 헛구역질하며 불편해했다.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하나였기에, 의사가 아닌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었다.
“너도 엄마처럼 생각하는 거야?”
“아마도.”
머뭇거리는 에반의 말을 들은 시우는 손끝으로 자신의 코를 막았다. 그리고 서슴없이 그에게로 향했다. 역시나 뒷걸음치던 에반이 창에 막힐 때까지 밀어붙인 시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