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73화 (173/187)

외전 2. 12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드넓은 정원 산책도 했다.

그러다 호수 앞 벤치에 앉아 넋 놓고 백조들이 떠다니는 것도 구경했다.

집사님이 준비해 주시는 대로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낮잠도 잤다.

“아…… 왜! 아직 4시냐고!”

거의 두 시간을, 시우는 3층 발코니에서, 에반은 1층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고성을 떠난 에반은 약속대로 사람을 통해 새로운 휴대전화를 보내 주었다. 새로 사 줄 거면 최신형으로 사 줄 것이지 제가 뉴스를 찾아볼 것이 걱정되었는지 그가 보내 준 휴대전화로 할 수 있는 것은 통화와 문자가 전부였다.

휴대전화를 받고 토요일, 일요일은 거의 전원을 연결한 채 에반과 통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평일엔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 외엔 수시로 통화를 하고 문자를 나눴다. 자기가 이런 휴대전화를 사 줘 놓고는 왜 영상통화 안 되냐고 징징거리다 급기야 집사님 휴대전화로 영상통화를 하자고 졸라 대서 거하게 욕을 퍼부어 주었다.

그랬더니 자두 엄마 그러지 말란다. 자두가 다 듣는단다. 어쨌거나 이런 지루한 생활을 거의 2주 정도 해 온 시우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하…….”

넓은 소파에 드러누워 TV 채널만 이리저리 돌리던 시우는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십 채널에선 에반과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하며 저들끼리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동화 한 편을 쓰고 있었다.

이만하면 많이 떠들지 않았니? 이번 프로그램에선 계약 결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번엔 신데렐라라고 하더니.

감쪽같이 사라진 자신과 다르게 에반은 아침저녁으로 착실하게 출퇴근을 하고 있었으니 파파라치며 기자들은 에반만 따라다녔다.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영상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다.

“집사님!”

결혼하지 말 걸 그랬어. 그랬다면 붙어 있어도 아무도 몰랐을 텐데, 시우는 빠른 걸음으로 고성을 뛰어다니며 집사님을 찾기 시작했다.

벌써 2주째 시우는 에반을 만나지 못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방문해 건강을 체크하는 페이든에게 물을 때마다 그는 부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역시나 그는 특이한 형질을 말했다. 그래도 보고 싶으면 봐야 할 거 아닌가.

하지 말라고 하면 원래 더 하고 싶다고, 꼭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하니 더 보고 싶다. 뭐 만나서 헛구역질을 하든 뭘 하든 일단 봐야겠다.

“네.”

빠르게 뛰어가던 시우는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빠르게 멈춰 섰다.

“차 키 주세요.”

“네?”

“아, 모르겠어. 자두가 힘들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 내가 미칠 거 같아서……. 그러니까 에반에게 가야겠어요.”

“페이든 씨가…….”

“아!! 안 들어. 안 들을래요. 그냥 5분. 아니면 1분만 보고 올게요.”

“그럼 이사님께…….”

“에바니한테 말하지 마요. 말하면 또 잔소리하면서 조금만 참아라 어째라 이런 말만 할 거란 말이에요.”

“그래도…….”

“저, 여기서 뛸까요?”

시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창가로 다가갔다. 3층인 데다 아래 키 큰 나무들이 많으니 크게 다치진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은 누구와 말을 하더라도 자신을 말릴 것이 뻔했기에 강경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차고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이고, 금방 가니 제발 뛰지 마세요.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저 안 넘어져요. 빨리. 빨리 가요!”

차고엔 수많은 차들이 있었지만, 그런 눈에 띄는 차를 타고 나가 파파라치들의 시선을 끌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연유로 집사님의 차를 빌리려 했다. 그냥 혼자 조용히 갔다 온다고 했지만, 서로의 고집을 꺾지 않은 둘의 합의점은 동행하는 것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던 시우는 자신을 쳐다보는 집사님의 시선에 손끝을 튕겼다.

“뒤로 가라고 하지 마세요.”

“일단 그럼 가 봅시다.”

조수석보다 안전한 뒷좌석에 앉으라는 말을 하려던 집사가 포기한 듯 차를 출발시키자 시우는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가요, 빨리.

“그냥 멀리서 잠깐만 볼게요. 퇴근하는 거만 보고 바로 돌아가요.”

민망함에 나름 핑곗거리를 열심히 나열하던 시우는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에반은 조수석에서 편안히 잠든 시우를 보고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에반의 손이 시우의 볼에 살짝 닿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시우의 코끝, 볼, 눈썹 여기저기 닿았다. 손끝을 통해 온기가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시우의 페로몬에 에반은 목이 메어 왔다.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어제 못 잤어요?”

“요즘 낮잠이 좀 느셨습니다.”

서로의 일정 때문에 한 달 넘게 떨어져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것과 강제로 떨어져 있는 건 완전히 달랐다. 집사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에반의 손은 시우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잠결에도 아는지 슬쩍 자신의 손에 볼을 비벼 오는 시우의 행동에 에반의 턱선이 도드라졌다.

회의 중 집사에게 걸려 온 전화는 에반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고성에서 잘 쉬고 있는 줄 알았던 시우가 밖으로 나왔다니. 나온 이유까지 듣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낮에 잠시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너 없으니까 완전 편해. 완전 좋아. 힐링이 따로 없네.’라며 큰소리치던 시우였다.

그런데 제가 보고 싶어서, 만나면 안 된다는 말도 들었으니 멀리서 보고 가려고 했단다. 어떻게 혼자만 몰래 보고 가려고 했어. 그럼 나도 너 몰래 볼 거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신혼집으로 시우를 데려다 달라고 했다.

제가 출퇴근할 때 타는 차를 먼저 보내고, 경호원 중 한 명의 차를 빌려 곧장 신혼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2주 만에 만난 시우는 제 속도 모르고 너무나도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계속해서 불편하게 재울 수 없었기에 에반은 조금이라도 제 페로몬이 새어 나갈까 조심하며 시우를 안아 들었다.

“……안녕.”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시우는 너무나도 익숙한 한 사람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몰래 에반을 볼 생각이었는데, 또 잠들었나 보다.

“안녕.”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은 에반은 편안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조도가 낮은 무드 등만 켜진 침실에서 방금까지 일을 하던 중인지 태블릿을 옆으로 치우는 에반을 보며 시우 역시 인사를 건넸다.

“사고뭉치.”

에반의 말에 시우는 피식 웃으며 에반 쪽을 향해 모로 누웠다.

“괜찮아?”

“나 좀 안아 줘.”

제게 가까이 오지도 않고 안부부터 묻는 말에 시우는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예전만큼 격하진 않지만, 속이 더부룩했다.

에반이 옆에 없다는 것뿐이지 시우는 그동안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었다. 어떤 불편함도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는데, 에반이 제 앞에 있으니 어김없이 불편해서 이제는 제게 일어난 일이 조금은 받아들여졌다.

“어서…….”

여전히 망설이는 에반을 재촉했다.

자두에겐 에반이 불편하겠지만 제게는 에반이 필요했다. 자신을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뻗지 않는 에반에게 어서 빨리 안아 달라고 졸랐다.

“페이든…….”

“나 괜찮아. 네가 안아 주면 더 괜찮을 것 같아.”

페이든에게 확인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는 에반의 말을 자른 시우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그의 허벅지에 올라앉았다.

“화내기 전에 어서 나 안아.”

시우는 단호한 명령을 하고서야 안아 주는 에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페로몬은 묻어나지 않지만, 그립던 단단한 몸과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자 시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자두 화난 거 같은데.”

저를 꼭 끌어안고 머리에 입을 맞추면서 웅얼거리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아. 나도 점점 더 속이 불편해지고 있긴 하거든.

“어떻게 알아?”

“네 페로몬 속에 숨어 있는 자두가 아까부터 으르렁거리고 있어. 그런데 처음만큼 날이 선 건 아니야.”

“우리 자두가 효자는 아닌가 보네.”

몇 초간의 짧은 포옹을 나눈 시우는 천천히 에반의 다리 위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무작정 욕실로 뛰어가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야. 몇 걸음 멀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뒤집혔던 속이 가라앉았다.

“네 회사 앞으로 가 달라고 말했는데, 언제 우리 집에 왔대?”

“집사님이 너 잠들자마자 내게 연락했고, 여기로 가 달라고 부탁드렸어. 여기가 우리 집이잖아.”

“이 정도면 우리 같이 있어도 될 거 같은데, 떨어져 있는 게 내 정신 건강에 더 안 좋은 것 같아.”

“네 마음대로.”

슬쩍 웃는 에반의 모습에 시우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럼 나 여기 있을래. 너도 여기 있어.”

“응.”

열 걸음, 딱 그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대화하던 시우는 몽글거리는 이상한 기분에 손을 들어 제 왼쪽 가슴을 벅벅 긁었다. 한때는 이 묘하고 간질거리는 느낌과 감정을 피부병과 부정맥으로 착각했다.

창가에 선 시우는 한참을 에반과 시선을 맞추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

“야! 그건 아니지.”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시우였다. 이 자식, 가만히 있었더니 은근 이상한 분위기 만들고 있어.

“뭐가 아니야! 왜! 너 내 건데. 어! 자두한테 지금 잠시 양보한 거지. 네가 자두 거야? 내 거잖아!”

“에반 루이스, 너 몇 살이야. 왜 애한테 질투를 해!”

“아니 좀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그런 생각 좀 했다고 바로 그르냐.”

제발 얼굴값 좀 하시라고요. 세 살 어린애인 양 투정 부리지 마시고요.

투덜거리는 에반에게 다가가 그를 안고 도닥거려 주던 시우는 다시금 속이 불편해지자 살짝 손을 들어 보이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건 그렇고 에바나.”

대답하지 않는 그를 향해 시우는 조금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나……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민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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