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17
에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시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도 봤는데, 볼 때마다 왜 이리 기분이 좋은지.
절로 두 팔을 위로 올려 흔들자 시선이 마주친 에반의 얼굴에 미소가 머물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살짝 굳는 걸 본 시우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야, 에반! 너 좋은 소식…….”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에반이 앉아 있는 시우를 살짝 끌어안고 카메라가 있든 말든 짧게 입 맞추는 모습에 상준은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헤벌렸다.
“오랜만이에요, 니모. 다들 잘 지내시죠?”
여전히 시우를 끌어안은 채 앞에 있는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드는 능청스러운 그 행동을 코앞에서 목도한 현수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갑자기 에바니가 왔죠? 에바니 너도 같이 할 거면 옷 갈아입고 와. 그런데 우리 다 끝나 가.”
“아니야. 끝나 가면 마무리하면 되지. 현수 형이랑 상준 형이 잘하고 있잖아.”
대충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벗어난 에반은 라이브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라이브에서 자두의 존재에 대해 알린 후,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가족만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알게 됐고, 시우는 요즘 가장 핫한 셀럽으로 등극했다.
임신한 시우가 어떤 것을 먹는지, 어떤 관리를 받는지,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어떤 물건들을 살 것인가까지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늘 시우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에반이 이번에 방탄유리를 장착한 고급 세단을 산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정확히 아기가 몇 주인지 언제 태어날지 이런 것을 모르다 보니 다들 시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겠죠?”
병원 가는 일 외에는 두문불출하던 시우는 지금 외출 준비 중이었다.
지긋지긋하게 에반에게 머물던 입덧도 서서히 가라앉고, 가만히 있을 때면 자두의 태동을 느낄 수 있게 된 지금 시우는 늘 에반이 고팠다.
페이든의 말이 사실인지, 임신 초기엔 에반의 페로몬이 조금만 느껴져도 속이 뒤집혀 여간 곤욕을 치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페로몬이 없으면 불안감이 찾아왔다. 출근 전 시우에게 페로몬 샤워를 시켜 줘도 점심시간이 지나면 시우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이 불안감의 근원이 에반의 부재라는 걸 알고 있는 시우는 모처럼 외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에반의 비서를 통해 오늘 오후 2시 회의 후엔 급한 일정이 없다고 했으니 같이 퇴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괜찮을 겁니다.”
마음 같아선 혼자 운전해서 조용히 가고 싶지만, 파파라치는 시우의 상상 이상이었다. 오션 활동을 하면서도 사생과 파파라치들에게 꽤 쫓겼다 생각했는데,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다. 루이스가의 일원이었고, 유명한 아이돌 출신에다 히든 오메가라는 형질까지 제가 생각해도 사람들의 이목이 제게 쏠릴 만했다.
거울 앞에 선 시우는 제 모습을 훑어보았다. 남성 오메가의 경우 일반 여성이나 여성 오메가보다 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상의 같은 경우 평소 제가 입던 것들을 그대로 입을 수 있었다.
슬림한 디자인의 트레이닝복 바지에 헐렁한 박스 티셔츠를 입었더니 딱히 배가 부른 것이 눈에 띄지 않기에 시우는 배에 손을 올려 보았다.
“우리 자두, 잘 숨었는데? 완벽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 말을 알아들은 듯 통, 하고 안에서 자두가 움직이자 시우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요즘 이렇게 대화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허리가 묵직하고 배가 당겼지만, 입덧에 비하면 이건 일도 아니었다. 대신 느릿하게 움직이거나 통통거리는 자두가 자기주장을 할 때면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너도 에바니 보고 싶지?”
그러자 또 안에서 통, 하고 대답이 들려왔다. 시우는 손으로 자두가 톡, 하고 친 곳을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에바니한테 우리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하자. 자두는 뭐 먹고 싶어? 맛있는 거 먹고 우리 자두 물건도 보러 갈까? 예전에 케이티 선물 사러 갔던 거기 괜찮았어. 대충 봤었는데 이것저것 많았거든.”
혼잣말이 익숙해진 시우는 배를 만지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앞뒤로 차 여러 대가 붙는 것이 처음엔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이제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자두의 안전이 우선이었으니까.
4월의 햇살은 따스했고, 봄바람엔 온기가 가득했다.
회사 지하 주차장이 아닌 회사 앞에 차를 세워 달라고 한 시우는 동행한 집사님이 건네는 모자도 받지 않았다.
“찍으라고 해요. 그렇게 찍고 싶어서 난리인데, 너무 못 찍게 하다가 사고 날 것 같아서 그래요. 여기 회사 앞이고, 에바니 저 온 거 알아요?”
시우는 경호원을 대동한 채, 회사 로비로 향하며 집사님께 물었다.
“방금 연락드렸으니 곧 내려오실 겁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의 번쩍거리는 빛과 카메라 소리에 시우의 입에서 결국에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찍어 대. 난 남편 회사에 놀러도 못 오냐.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로비로 들어간 시우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우습게도 에반의 회사에 온 건 처음이었다.
뭐가 그리 숨길 것이고 비밀이었는지.
저를 곁눈질하는 사람들 시선엔 익숙했기에 시우는 신경 쓰지 않고 소매 끝을 살짝 올려 시계를 보았다. 여기서 백화점은 그리 멀지 않으니,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어도 될 것 같다.
오른손을 배에 대려던 시우는 슬쩍 주먹을 쥐었다. 배를 쓰다듬고 혼잣말하는 것이 익숙했지만 사람들 앞에선 그러면 안 될 듯싶었다. 일부러 펑퍼짐한 상의를 입고 왔는데, 이곳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모르겠지? 열심히 머리 굴려 봐라. 우리 자두가 얼마나 컸는지.
“코코.”
로비의 한쪽 벽에 있는 커다란 그림에 시선을 두고 있던 시우는 저를 부르는 에반의 목소리에 얼른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노라니 또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내가 이렇게 웃음이 헤펐던 사람이었나? 에반만 보면 가슴 아파하고 숨기기 급급하던 제 모습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올 거면 말하고 오지. 피곤하진 않아? 멀미는? 자두는 오늘 엄마 힘들게 안 했어?”
가까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제 허리에 팔을 두르면서 속사포처럼 저와 자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내는 에반의 손이 배 쪽으로 다가오자 시우는 슬그머니 그 손을 잡았다.
“자두 지금 자고 있어. 깨우지 마. 너 일 많이 바쁜 거 아니면 우리 쇼핑하러 가자. 맨날 카탈로그 보거나 쇼퍼들이 골라 온 물건들 보는 거 지루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거든. 그때 케이티 선물 샀던 매장에 가 보고 싶어.”
“바쁘다고 해도 무조건 시간 내야지. 너랑 자두 일인데.”
“그래서 나 네가 사 준 차 타고 왔어, 잘했지?”
시우는 잘했다며 제 머리에 입을 맞추고는 차로 에스코트하는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에반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불안정한 시우의 페로몬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 * *
“라이브 할까?”
에반은 백화점 주차장에서 내리려다 시우의 돌발 발언에 멈칫했다.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로 성격이 조금 변할 수 있고, 좋아하는 취향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 임신 초기엔 시우 역시 격한 감정 변화로 힘들어했었다. 안정기에 든 이후 격한 감정 변화는 없었지만, 시우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숨기고 피하려던 우리 시우 어디 갔니?
“지금?”
“전에 우리 자두 생긴 거 알고 니모님들이 막 선물이랑 이것저것 보내 주려고 한 거 막았잖아. 소속사든 네 회사든 어디로든 아무것도 보내지 말라고, 소속사에서 막 공문까지 내고. 그래서 우리 자두도 궁금한데, 그런 것도 다 궁금해하시더라고. 브이로그 올리면 다들 자두 잘 있냐, 오늘은 뭐 했냐, 컨디션 어떻냐 이런 거 댓글로 주시거든. 그러니까 오늘 라이브 해서 니모님들이 예쁘다고 하는 거 옷이든 뭐든 자두 물건 하나라도 사자고.”
시우는 에반이 대답을 하기 전에 앞장서서 걸었다.
“네 마음대로 해.”
먼저 걸어가다 뒤돌아보며 환하게 미소 지은 시우는 에반의 흉내를 내며 그가 할 말을 대신 했다. 그러곤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에반의 손을 잡고 먼저 이끌었다.
“지금 저희랑 같이 파파라치 걷고 있는 거 보이시죠? 그냥 이 라이브 보면 될 텐데. 아니다, 저분들한테 찍어 달라고 할까요? 저분들 카메라가 제 휴대전화보다 훨씬 좋잖아요.”
시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온 셀카봉에 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에반과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일단은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쇼핑하는 모습을 찍을 텐데요. 사람들이 너무 몰리거나 위험할 것 같으면 갑자기 라이브가 끊길지도 모르니 그 점은 좀 양해해 주세요.”
시우의 허리에 팔을 감아 제 품으로 더 당기면서 멘트를 이어 가던 에반은 유아용품 매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화점 전체를 통제할 순 없지만, 유아용품 매장 안은 경호원들이 일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
“자두 물건들을 보고 싶어서 나오긴 했는데, 이렇게 나온 게 많은 분께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쇼핑 못 나올 것 같아.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하나만, 딱 하나만 사고 갈게요.”
호기롭게 쇼핑을 시작했지만,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본 시우의 입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는 것 대신 시우는 매장 안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코코, 이거.”
시우의 뒤를 따르던 에반은 작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연분홍색 우주복을 들고는 카메라에 잘 잡히게 들어 보였다.
“아, 우리 에바니 이제 패션을 좀 아네. 역시 남자는 핑크야.”
돌아서서 카메라를 보는 시우의 손에는 진한 분홍색의 보디슈트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