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20
“속도 좀 낮추죠.”
잠든 시우가 제게 기대기 편하도록 어깨를 낮춘 에반은 창밖을 보고는 작게 말했다. 기어이 차에도 붙었구나. 오늘 찍을 만큼 찍지 않았나?
케이티의 일로 소송 중이었다. 파파라치의 사진을 구매해 잡지나 방송에 쓸 경우 언론 매체에게도 책임을 묻겠다고도 말했다.
“파파라치가 좀 많아서.”
“속도 올린다고 따라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안전 운전 해 주세요. 어차피 가는 곳이 집인데, 집에 들어가는 걸 봐야 포기할 놈들이잖아요.”
파파라치도 문제지만 자두와 시우의 안전이 제일 우선이었다.
“자두야, 우리 한국으로 갈까?”
시우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늘 영국 생활이 즐겁고 제가 일을 하는 것이 좋으며 모든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시우였다.
정말 그럴까? 결혼과 동시에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자유가 모두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난가을부터 지금까지 시우는 집에 갇혀있다시피 했다.
친구도 가족도 모두 한국에 있는 시우가 지난 몇 달간 만난 사람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행복할까? 모처럼 나온 외출에서 시우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제게 제일 소중한 사람은 시우다. 회사나 일 따위에 묶여 굳이 영국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너 한국이 어딘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아직 잠들지 않고 느릿하게 움직이던 자두가 제 질문을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통, 하고 움직이기에 에반은 자두가 톡, 하고 찬 부분을 만져 주었다.
“내일 페이든을 만나고 괜찮다고 하면, 우리 한국으로 가자. 시우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 마음껏 먹고, 시우가 좋아하는 사람들 신나게 만나고. 우리 자두 기다리는 팬들도 많은 곳으로 가는게 맞겠지?”
잠든 시우의 복부가 눌릴까 봐 그가 메고 있던 안전 벨트를 만진 에반은 잠든 시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제가 먼저 가자고 말했어야 하는데, 웬만해선 제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던 시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뜻했다.
“집으로 갈까요? 쉽게 그칠 비 같지는 않아서요.”
운전사의 말에 고개를 든 에반은 짧게 혀를 찼다. 가는 날이 장난이라고 비 소식은 없었는데. 하지만 영국 날씨를 누가 예상하랴.
“집 말고, 가는 길에 있는 오피스텔로 가죠. 비가 제법 내릴 것 같은데.”
하늘에 무겁게 내려앉은 먹구름과 점차 빗방울이 굵어지는 것을 본 에반은 꽤 시간 가야 하는 집보다 가까운 곳을 가자고 말한 후 페로몬을 조금 더 풀어냈다.
자두가 클수록 힘든 건 시우였다. 허리도 쑤시고 배도 뭉친단다.
입덧이 끝나고 한동안 잘 먹던 시우는 어느 순간부터 소식을 하고 있었다. 조금씩 자주 먹는 이유가 속이 부대껴서란다. 밤이면 다리가 부어 에반이 한참을 주물러 줬고, 밤낮을 모르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자두 때문에 새벽에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계속해서 자두가 갈비뼈 쪽을 찬다나? 그럴 때 보면 유독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그러면 코코는 ‘엄마 아파. 발 좀 저리 옮겨 봐.’ 이렇게 말하면서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자두. 지금은 노는 시간 아니야.”
배에 손을 올려 두고 움직이지 않으니, 또 안에서 먼저 저를 건드리는 자두에게 속삭인 에반은 아쉽지만 시우의 배에서 손을 뗐다. 제가 손을 올리고 있으면 계속해서 놀아 달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헛…… 시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아니 듣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앞에서 운전하던 경호원이 내뱉는 욕설에 에반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에반이 본 것은 눈이 멀 정도로 강한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운전자가 급하게 핸들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에반은 시우를 꽉 끌어안았다.
* * *
“에반, 너도 치료받아야지.”
“이마 찢어진 게 뭐 대수라고요.”
에반은 병원으로 들어와 응급실에서 누군가에게 받은 거즈로 여전히 제 이마를 누른 채,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원래 사고는 한순간이다.
한순간 자신이 내린 결정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그냥 집으로 갔으면 됐을까? 당연히 집으로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파파라치들은 그들이 아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차가 움직이자 급해졌던 모양이다.
신호나 법규 따위는 머릿속에 없는 놈들이다.
시우와 자두를 위해서 새로 구매한 차가 아니었다면 에반이 이렇게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기적일지도 몰랐다. 강한 충격 후, 정신을 차린 에반은 시우부터 챙겼다. 이마 위쪽에서 고통이 느껴지고 액체가 흐르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붉어지자 욕부터 내뱉었다.
여전히 고른 숨을 쉬고 있는 시우를 보며 에반은 대충 손으로 한쪽 얼굴을 타고 흐르는 피를 훑어 냈다. 시우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잠에서 깰 것 같은데. 이름을 불러도 흔들어도 미동도 없는 시우를 보는 순간 에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급히 시우가 메고 있던 안전벨트를 푼 에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 이마에서 흐른 피를 손으로 닦은 에반의 눈이 빠르게 시우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사고와 동시에 앞뒤로 따르고 있던 경호원의 차가 멈췄고, 구급차를 부를 시간도 없이 다른 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시우 주치의와 페이든에게 연락해요.”
시우의 얼굴을 쓰다듬고 복부를 쓰다듬던 에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점차 젖어 들고 있는 시우의 바지였다.
병원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페이든과 함께 나와 있던 의사들은 기절한 시우를 침대에 싣고 사라졌고, 정신없는 상황 속에 어느새 에반은 수술실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시우와 자두 괜찮을 거야.”
사고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온 어머니의 말도 에반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내 잘못이에요.”
“왜 네 잘못이야. 그놈들이 그런 거지.”
“집으로 가면 됐는데, 오피스텔로 가려고 해서…….”
“일단 여기 앉아 봐. 시우가 깨어났을 때 네 모습 보고 놀라길 바라니?”
수술실 앞 벽에 기대서 굳게 닫힌 문과 [수술 중]이라는 사인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고 있던 에반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근심이 가득한 어머니와 그녀와 동행한 경호원. 제법 떨어진 곳에도 경호원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러면 뭘 해. 이렇게 다른 이들을 차단하면 뭐 하냐고.
“…….”
“어서 앉아.”
작은 손이 제게 다가와 팔을 쓰다듬고 어깨를 누르자 그제야 에반은 옆에 있는 간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다가와 이마를 누르고 있는 제 손을 치우고 치료를 하는 것을 내버려 둔 에반의 눈에 멀리서 걸어오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제 오셨군요.”
“네.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런 인사치례 생략하죠. 하-. 이만하면 그동안 많이 참아 줬는데. 케이티 일도 그렇고, 그 소송이 진행 중인데 이런 일이 또 생겼네요. 빗길에 미끄러졌다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갖고 올 것 같은데, 살인미수죄부터 검토해 주세요. 이 시간부로 로이드가를 비롯, 저와 시우에 대한 내용은 다 차단해 주시고요. 분명 특보 같은 걸로 사고 소식이 나갈 텐데. 그것도 내려 달라고 언론사 측에 요청하세요.”
에반의 눈동자는 짙은 녹색으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우 말을 들을 것을. 처음 자두가 생겼을 때 시우가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안정기에 들어섰을 때 떠났어야 했다.
제 일이 잘되는 것이 너무 좋다고, 역시 내 남편 최고라고 환하게 웃는 그 미소에 넘어가선 안 됐다.
조금 진정하고 일단 상황 보고 소송이든 처벌이든 하면 된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에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타고 있던 차와 부딪친 차에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런 건 제게 중요치 않았다.
“시우나 자두에게 아무 일도 없겠지만, 그들과 상관없이 이 소송 진행할 겁니다. 선처 같은 건 없고 수십 년이 걸려도 계속 진행할 테니까. 아,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고요. 우선은 사고를 일으킨 파파라치겠지만. 이번 소송은 오늘 저희를 따라다닌 모든 파파라치에 해당될 겁니다. 저희 라이브 방송을 찾아보면 그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나갔을 테니 찾기 어렵지도 않을 테고요.”
쉴 새 없이 말을 잇던 에반의 시선이 다시 수술실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우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오는 길과 지금 이 순간이 저에겐 지옥이었다. 그를 찾지 못했을 때도, 찾고 난 뒤 자신을 알아채지 못할 때도, 서로 엇갈릴 때도 이렇게 힘들고 아프진 않았다.
수술실에서 흘러나오는 시우의 페로몬이 너무나도 약했다. 차에서 잠들 때까지만 해도 안정적이고 편안하던 시우의 페로몬은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불안정한 시우의 페로몬과 함께 늘 씩씩하며 토라지거나 좋은 것을 숨기지 않고 제게 대들듯 페로몬을 뿜어 대며 존재를 과시하던 자두의 페로몬 역시 너무나도 연약했다.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시우의 페로몬이 혼란으로 가득하다면 사고 직전까지 자신과 놀고 있던 자두의 페로몬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강한 충격과 함께 늘 편안한게 저를 감싸주던 시우의 페로몬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느꼈을 것이다.
시우와 함께 자신을 지켜주던 에반의 페로몬도 느낄 수 없는 어린아이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긴 한숨을 내쉬며 손에 얼굴을 묻던 에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찢어죽여도 시원찮은 파파라치들은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괜찮다고 자두를 다독여줘야했고, 깨어나지 못하는 시우에게 제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순간.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자두의 페로몬이 사라졌다.
그대로 닫힌 수술실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하던 에반은 타인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 고용한 제 경호원들에게 잡혔다. 자두가 사라졌어. 그리고 간발의 차로 시우의 페로몬까지 끊어졌다.
그나마 이성을 가지고 이렇게 밖에서라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