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사실 요한은 자신이 있었다.
안전불감증이 아니다. 객관적인 비교에 의한 자신감이다. 조폭. 조폭이라 해 봤자 살면서 사람을 얼마나 죽여봤겠는가. 열? 스물?
요한이 이전 생에서 생존을 위해 죽였던 사람은 이미 기백 단위가 넘는다. 삶을 대하는 각오 자체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혹시 놈들이 총을 가지고 있나?”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눈에 보이는 건 없었어. 찾아온 본론을 말할게.”
그건 다행이군.
요한이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세리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외투를 벗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빨 가지려고.”
“장난칠 상황 아니니 옷 입어.”
“장난 아니야. 내 편이 필요해. 언니를 구해줄 사람. 날 지켜 줄 사람. 아까 싸우는 걸 보고 확신했어. 지금은 오빠가 유일해.”
“미안하지만 틀렸어. 난 애초에 누굴 구해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아니야. 죽이는 거라면 모를까. 차라리 건이한테 가보든가.”
“그 오빠는 안 돼. 약해빠져서.”
요한이 마른세수를 했다. 당혹감에 침이 마른다.
“사랑은 천천히 하지 뭐. 일단 마음에 들었으니까. 오빠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잖아?”
본인의 미모에서 나오는 자신감은 당당했다.
참으로 개연성 없는 전개였다.
하지만 의심할 만큼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슬프게도, 종말 상황에서 성(性)은 여인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위험을 부르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것은 기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다.
요한도 자주 겪었던 일이었다. 그 캠프의 가장 강력한 남자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유혹과 추파.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기도 했다.
사실 요한은 제게 접근하는 당사자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면, 성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를 일부러 거절하지는 않았다. 성욕의 해결은 식욕과 수면욕의 해결만큼은 아니더라도 스트레스 관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사랑 따위는 배제되어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빨리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그녀의 말과 달리 손해 보는 장사였다.
“미안하지만 못 들은 거로 하지. 네 언니를 구해줄 수도 없고 너를 책임져줄 수도 없어.”
“아쉽네. 하고 싶기도 했는데.”
그녀는 가죽 바지를 슬쩍 내리다 말고 명백히 도발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 요망한 꼬맹이가······.
그것참, 미칠 노릇이었지만. 역시 빚지는 건 정말 질색이었다.
요한은 머리를 두세 번 털고는 말했다.
“한 번에 한 번. 한 번 할 때마다 목숨 한 번씩 살려주는 거로. 보통 그런 식으로 거래하기도 하지.”
요한의 무덤덤한 말에 세리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좋아. 충분해. 그럼 바로 시작해?”
요한은 그의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해사하게 그녀를 따라 웃어주었다.
“안 해.”
“……어째서?”
요한은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상황에 대한 당황보다도, 이 소녀를 이렇게 몰아붙인 환경에 대한 불만이었다.
“우선 이런 난리 통에 처음 보는 수상한 여자가 냅다 대준다고 덥석 받아먹을 만큼 안일하지도 멍청하지도 않고, 두 번째로 떨고 있는 여자한테 손댈 정도로 쓰레기도 아니야. 마지막으로…….”
요한의 시선이 세리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한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아무리 당돌하게 덤벼든다 한들 역시 어린애다. 저 가면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썼는지 역력하게 보였다.
“넌 내 취향도 아니야. 어린애는 별로거든. 일하게 옷이나 입어.”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금방이었다.
요한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녀와 저런 식의 대화를 나눈 건, 그로서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이 캠프에 정착할지 아닐지도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러다 시선을 돌리니 자신을 향해 방긋방긋 웃는 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이 달성됐든 아니든 이 상황이 마뜩한 듯했다.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듯한 그녀를 바라보며, 설마 그냥 하고 싶어서 덤벼드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생전 인기 있었던 기억은 없는데. 뭐. 상관없겠지.
요한이 담뱃불을 비벼 껐다.
“왜 표정이 별로 안 좋지? 기분 나빴어요?”
세리의 질문에 요한이 후, 담배 연기를 뿜고 손을 휙휙 저었다.
“아니. 생각할 게 좀.”
세리는 피, 하고 입술소리를 냈다. 그녀는 재킷을 다시 걸치며 요한을 빤히 바라봤다.
“그거 방탄조끼야?”
“어.”
“우와, 철저하네.”
세리는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요한의 차림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마냥 전신이 꼭꼭 가려져 있었다. 입부터 목은 두건으로 가렸고 가죽 장갑에 방탄조끼, 워커까지.
세리가 보지 못하는 곳은 더했다. 옷을 벗지 않으면 상상도 못 할 위치에 무기들이 숨겨져 있었다.
양쪽 허벅지 바깥쪽에 가터벨트처럼 나이프가 꽂혀있었다. 가장 가관이었던 건 가랑이 사이에 테이프로 감아 둔 작은 면도칼이었다. 양쪽 워커에도 비상시를 위한 탈출 도구들이 들어가 있다.
“진짜 언니 안 구해줄 거야?”
“봐서. 확답은 못 해주겠네. 이 캠프에 정착하게 되고, 놈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면 구하게 될지도. 근데 그놈들, 사람을 죽였어? 몇 명이나 왔지?”
“아니. 해친 사람은 없었어. 여섯 명이었고. 건이 오빠랑 혁이가 좀 다쳤지. 놈들이 사람들을 데려가려고 하니까 오빠가 막아섰었거든. 혁이는 오빠가 다치는 걸 보고 발광하다가 맞았고.”
“고작 여섯 명의, 무기도 없는 사람들에게 당했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고?”
“망치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거든. 다들 질질 짜느라 바빴지.”
세리가 약간의 머뭇거림 후 덧붙였다.
“···나도 그랬고.”
흠. 요한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청소를 도와라. 어차피 여길 확보 안 하면 얼마 못 버틸 거야.”
“계산은 확실하게 하자며. 언니를 구해줄 거야?”
“관두지. 상황이 어려워지면 여길 뜨면 되니까.”
“오빠도 그 사람들이 두려워?”
“무서운 건 아냐. 여차하면 다 없앨 생각도 하고 있어. 다만, 아직 확신이 없을 뿐.”
“무슨 확신?”
“이 캠프 사람들과 저쪽 캠프 사람 중 어느 곳이 더 생존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뭐? 저기는 우리 언니를 납치해 간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해친 사람은 없지. 아, 물론 그게 정당하다는 건 아니야. 나한테 위협이 되면 언제든지 죽일 생각이고. 단지 이 캠프 사람들은 너나 정환 씨나 건혁 형제를 제외하면······.”
요한이 꽤나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쓸모가 없게 느껴지네. 여차하면 몇 명만 추려서 나갈까 해. 여길 점령하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게 한결 수월할 테니까. 오기 전에 소수 인원이 지낼 만한 캠프를 여러 개 봐 뒀어.”
소수의 힘과 천운으로 버텨온 그룹이다. 버팀목이 되어 줄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거점으로는 영 좋지 않았다.
사람들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누구나 죽음은 두려운 법이니까.
하지만 시간은 없었고 냉정하게 말해 살아남을 사람들은 싹수부터가 다르다.
“오빠, 무서운 인간이구나.”
“실없는 소리는. 이만 나가 볼게. 건에게 가봐야겠다.”
요한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좀비는커녕 같은 사람들에게도 대항하지 못하는 집단이다.
이렇게 될 걸 대비해 따로 생각해둔 시나리오가 있었다. 건의 영향력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직 캠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엔 이른 시기이기도 했고, 이 캠프의 리더는 건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건을 찾아간 요한은 건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대화가 다 들렸나.
“어때, 좀? 사람들이랑은 이야기해봤어?”
“어. 다 때려치우고 싶어지던걸.”
건이 으하하 웃었다. 진심이었다. 솔직한 말로 다 죽든 말든 관심이 뚝 떨어지는 상황이다. 자신이 회귀 전에 만났을 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같은 사람들이 맞는가 싶다.
역시 타이밍의 문젠가.
그들도 분명히 몇 번의 위험과 시련을 겪고 나서는 한결 듬직한 생존자의 모습을 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일렀다.
“건아.”
“응?”
“이 캠프 버릴 생각은 없지?”
“버리다니?”
“말 그대로. 어차피 마트 전체를 확보하지 않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이대로 두고 나와 함께 다른 캠프를 찾는 건 어떻게 생각해? 몇 명만 추려서.”
“농담이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차마 한치의 농담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혼자라도 캠프를 뜰까 생각도 해봤지만, 건은 버리기엔 정말로 아까운 인재였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 정말 다 챙겨야 해?”
“당연하지.”
끙, 요한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요한은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다.
말을 끝까지 들은 건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건 좀··· 너무 과하지 않아?”
“하나도. 정신 차려. 너는 이 사람들의 보호자도 책임자도 아니야. 그리고 이 상태론 절대 모두를 살릴 수 없어.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해.”
구구절절 맞는 소리에 건이 반박하지 못했다. 행동을 재촉하는 요한의 눈빛에 건이 머리를 쥐어뜯더니 혁을 불렀다.
“혁아. 사람들 모이시라고 해.”
잠시 후, 캠프의 모든 생존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역시 수가 너무 많아. 요한이 속으로만 읊조렸다.
사람들이 모이자, 건이 앞으로 나섰다. 요한은 뒤에서 건의 모습을 지켜보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무슨 일인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건의 말에 좌중이 떠드는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건이 말을 이어갔다.
“밖에서 들어온 요한의 말에 의하면, 정부나 군대 역시 현재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어서 지금처럼 마냥 구조를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지금 식수나 용수도 금방 떨어질 것 같고요, 식량도 얼추 한 달 쓰기도 빠듯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무리 중 누군가가 물었다.
“1층의 정문을 봉쇄하고 마트 안의 좀비들을 모두 죽일 생각입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말도 안 돼.’ 누군가가 대답했다.
“지원자를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건이 뜸을 들였다. 이 말은 제법 하기가 힘들다.
“앞으로 획득한 식량과 물자는 참여자에게만 엔 분의 일로 분배하겠습니다.”
“그건 불공평해!”
웅성거림이 커지다 못해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건이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소리를 질렀던 적이 없었는데.
“건 군, 그건 아닌 것 같네. 그럼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은 전부 죽으란 건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지원하지 않을 테고, 그럼 전부 죽고 말 거예요.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은 이후에 참여한 분들께 대가를 지불하고 식량을 받으셔야 할 겁니다.”
“그런······.”
“아직 끝이 아닙니다.”
다시 좌중이 고요해졌다.
“만약 이 마트에 물자가 떨어지거나 혹은 누군가의 침략을 받아 다른 거점으로 옮겨야 할 때 참여하지 않는 분들은 모시고 갈 수 없습니다.”
쏟아지는 탄식과 야유가 건의 폐부를 찌른다.
나는 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같이 싸워달라는 부탁에 이렇게 매몰차게 자신을 죽인다. 눈빛으로,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