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 *
그날 저녁, 캠프의 분위기는 모처럼 밝았다.
아껴 쓰던 초도 마음껏 켜두었다. 큰 양초에 무드등을 씌우니 한 구역은 제법 밝아졌다.
하역장에서 발견된 맥주도 마음껏 풀었다. 주류는 어차피 필수품도 아니었으니. H백화점 무리가 싹 쓸어가 모처럼 맛보는 주류인 만큼 사람들도 한껏 고양됐다.
“그나저나 저 물탱크를 어찌한담.”
물탱크는 발견했으나 연결하는 방법을 몰랐다. 일단은 그냥 두긴 했지만, 물을 끌어 쓸 방법이 필요했다.
“요한 군.”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는 요한에게 박 노인이 다가왔다.
“아, 어르신.”
“건 군이 깨어났네.”
요한과 혁이 동시에 몸을 일으켜 달리듯 의무실을 향했다.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건의 상태는 결코 좋지 못했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건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낯빛은 새하얬다.
“좀 어때?”
“죽을 것 같아.”
목소리에서도 힘이 없었다. 갈라지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열이 높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진 않은 듯했다. 감염되었으면 진작에 변이되었어야 한다. 감염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나 상태가 너무 좋지 못했다. 흘린 피도 많았고, 절단면도 제대로 처치하지 못해 곪아가고 있다.
살아나는 게 기적 같은 상황.
건의 의식은 언제라도 금세 끊어질 듯 옅었다.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나 계속 의식이 끊겨.”
“그런 말 하지 마라.”
“아니.”
건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혁이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트렸다.
“요한아.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그는 한 마디 내뱉고 숨을 한 번 쉬기를 반복했다.
“혁이를 부탁한다.”
“그래.”
망설임 없는 대답에 건이 옅게 웃었다.
“왠지 너와는 처음 봤는데,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야.”
“그런가.”
그는 회귀 전의 세상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아마 그렇게 느낀 것은 건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때문이었으리라.
저도 모르게 그를 오랜 친구 대하듯이 대했을까.
건이 이번엔 시선을 혁에게 향했다.
“혁아.”
“형, 으흑, 형······.”
“사랑하는 내 동생.”
진한 흐느낌이 이어진다.
“부디 끝까지 희망을 놓지 말고.”
목소리가 점점 옅어졌다가 건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듯 목소리를 또박또박하게 냈다.
“살아남아. 아, 등신처럼 질질 짜지 말고. 고추 떨어진다. 유치한 얘기지만. 내 몫까지 꼭 살아. 그리고 혁아.”
“으흑, 큭, 으으······.”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성을 잃지 마라.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사람이다. 혁아, 형 말 잘 기억해.”
이어지는 끅끅거림.
건이 혁의 손을 꼭 잡는다.
“요한아. 총 한 발만 쓰게 해주라. 나, 너무 힘들다. 춥고, 어지럽고. 팔이 불타는 것 같아.”
“안 돼. 총알 아까워.”
“흐, 농담이지?”
“혁이한테는 희망을 놓지 말라며 이 자식아.”
요한은 말이 없었다. 포기하기는 아직이라는, 숨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버텨보라는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무너져가는 안색 탓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요한은 턱 막힌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안식을 바라는 선택을 막을 권리 따윈, 자신에게 없었다.
“편하게 보내줘.”
“···내가 해줄까.”
“아니. 짐을 지울 수야 없지. 내가 해. 대신··· 잠시만 혼자 있게······.”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리볼버를 건넸다. 발광하는 혁을 손으로 제압한 후 덧붙였다.
“나가자.”
“형··· 형!”
옅게 웃는 건의 미소 뒤로, 혁이 질질 끌려나갔다.
탕, 단말마의 발포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3. 좀비 웨이브
* * *
2017. 03.
좀비 아포칼립스 발발 3개월째.
과거.
요한은 옥상에서 거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요한의 손에는 날개에 화살을 맞은 비둘기가 피를 뚝뚝 흘리고 있다.
좀비가 가장 많이 보이는 방향에 비둘기를 던졌다. 멀리서부터 좀비들이 다가온다.
요한의 거점 주변엔 좀비가 점점 쌓이고 있었다.
일부러 노린 바다.
거처 주변에 좀비들이 많이 있는 게 침입자나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을 막는 데 좋았으니까.
어지간한 배짱과 실력이 없는 이상, 이 많은 좀비를 뚫고 거처를 침략할 순 없을 터다.
건물의 옥상과 옥상 사이를 연결해 놓은 로프를 두어 번 당겼다. 몇 번을 사용했지만, 아직 튼튼하게 잘 연결되어 있었다.
로프는 안전하게 거처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저 많은 좀비를 뚫고 거처로 들어온다 해도, 문과 창문 근처에 설치해 놓은 트랩이 침입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발판, 창문, 그리고 모든 손잡이에 못과 바늘이 박혀있다. 감염자의 피가 묻은 채로.
침입자가 우여곡절 끝에 거처에 들어오게 되더라도, 내부에서 시작된 감염은 그들을 전멸로 이끌 거다.
그럴 일은 부디 없었으면 좋겠지만.
‘하긴, 마트도 편의점도 아닌 일반 가정집에 누가 목숨 걸고 들어온다고.’
그보다 요한에게는 중요한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총기의 확보.
무기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지만, 화기의 확보는 다른 의미로 반드시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좀비들을 사냥할 때 호신용으로 총화기를 사용하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총포상이나 경찰서 등에서 쉽게 구해지는 권총이나 엽총은 발포 이후 재장전이 너무 불편해 다수의 좀비를 사냥하기에 부적합했다. 무엇보다도 총기의 가장 큰 문제는 소음.
소음도 적고 화살만 있으면 연사가 가능한 쇠뇌를 무기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인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인전에서 총화기의 수는 곧 자원이자 화력이다. 그것도 생명 보호와 권력에 직결된 자원.
요한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는 적의가 있는, 그리고 총기를 든 사람이었다. 최소한 자신에게 총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무기였다.
그렇다면 언제 총기를 확보할 것인가.
부천시청까지 나가면 경기 총포상이라는 대형 총포상과 경찰서가 있다. 다만 너무 빠른 시기에는 생존자와 감염자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데다, 다른 생존자들과 엮일 위험이 있다.
반대로 너무 늦으면 이미 누군가에게 선수를 당해 껍데기만 남은 무기고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요한은 적절한 시기를 발발 3개월 후로 판단하고 3개월이 지나기를 기다려왔다.
로프에서 내려온 요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앞길이 막막했던 탓이다.
혼자서 확보할 수 있는 총기엔 한계가 있고, 운반도 어렵다. 고된 일정이 예상된다.
요한이 한숨을 내쉬며 더플백을 둘러멨다.
* * *
요한은 원미산 입구에서 한 발짝 내디뎠다. 등 뒤의 더플백은 가벼웠으나 크기 때문에 움직임에 걸리적거림을 더했다.
올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되돌아갈 때가 더욱 문제였다. 이만한 더플백에 총기와 탄약을 가득 담아 산을 타야 하니까.
아직까지 대로에는 좀비들이 우글우글했고, 요한은 인적이 드문 산행을 택했다. 그 결과 시간은 상당히 걸렸지만,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다. 좀비 몇 마리를 잡은 게 전부였다.
요한은 원미산 입구에서 한 바위에 걸터앉아 육포를 씹었다. 서두르지 않고 전진하는 걸 전제로 왕복 약 사흘. 요한이 총기류 확보에 지정한 시일이었다.
등 뒤에서 그르렁거림이 들린다. 요한이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이프를 꺼내 등 뒤로 뻗었다. 익숙한 촉감과 함께 그르렁거림이 멎는다.
지도를 꺼내 다시 한번 장소를 확인했다. 경기 총포상, 부천경찰서. 걸어서 20~30분 거리였다. 경기 총포상이 1순위, 부천경찰서가 2순위다. 우선순위는 당연했다. 부천경찰서는 사람이든, 좀비든 마주치는 게 불가피하다.
요한은 몇 분을 내려와 멀뫼사거리에서 소명삼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 걷던 요한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서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좀비가 한 마리도 없다.
요한의 모습이 도로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도로의 옥상,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당황해서 무전을 쳤다.
“여기는 무지개. 무지개. 목표물이 사라졌다. 이상.”
도서관 옥상에서 요한을 저격 총으로 따라가던 두건인이 급박하게 일어나 건물 아래를 눈으로 훑었으나 역시 사냥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두건인은 실망한 얼굴로 내뱉었다.
“쇠뇌에 더플백까지. 모처럼 털 만한 인간인 것 같았는데, 쥐새끼처럼 숨었네.”
두건인은 다시 자세를 낮춰 저격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때, 머리에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쏜다.”
“······.”
“모든 행동에 3초의 시간만 준다. 총에서 두 걸음 떨어져.”
두건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선연한 살기는 진짜배기였다. 두건인이 두 발 물러섰다.
“무릎 꿇고 두 손으로 깍지를 껴서 머리 위로.”
두건인이 순순히 지시대로 따라 했다.
요한은 총기를 더플백에 넣고 무전기를 챙겼다.
“우리가 숨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목소리 낮춰라.”
요한의 으르렁거림에 두건인이 한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대로인데, 거리에 좀비가 한 마리도 없더군.”
“고작 그것만으로 숨어 있는 사람들을 알아챘단 말이야? 여기는 또 어떻게 알았어?”
“이 넓은 대로에, 좀비가 한 마리도 없다는 건 누군가 점령자가 있다는 의미지. 그래서 죽은 좀비 몇 마리를 봤는데 머리에 총상이 있더군. 이 건물은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고.”
“대단하군.”
요한이 신발에서 낚싯줄을 꺼내 두건인의 손과 발을 묶기 시작했다.
“꼭 그렇게 더러운 걸로 해야 돼?”
“무좀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그것참 위안이 되는군.”
“동료는 몇 명이지?”
요한의 물음에 멀뚱히 바라보던 두건인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나는 최소한 동료는 팔지 않아.”
“그래?”
요한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요한은 두건인의 몸을 수색해 쓸만한 물건을 모두 챙겼다. 뒤돌아서는 요한에게 두건인이 내뱉었다.
“너, 꼭 찾아서 죽여 주지.”
요한이 멈춘 후 뒤돌아섰다.
“그렇군. 그렇다면 미래에 날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사람을 미리 죽여 놔야겠는걸.”
“자, 잠깐만. 그냥 해본 소리야!”
뒤늦게 말을 번복했지만 이미 그의 쇠뇌가 두건인의 머리를 겨낭하고 있었다.
“유감이야. 후환은 남기지 말자는 주의라서.”
요한이 쇠뇌를 들어 두건인을 향해 발사했다. 핑, 날아간 화살이 두건인의 이마에 박혔다.
두건이 벗겨지고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요한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뒤돌아섰다.
요한이 총기에 붙어있는 태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경기 총포상은 이미 약탈당했다. 그리고 총기를 지닌 약탈자들이 근처에 있다.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약탈자들을 모두 사냥하고 총기를 회수한다.
아니면, 경찰서로 발걸음을 돌린다.
요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