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알아. 정당방위로 풀어주는 거야.”
세리가 두리번거렸다. 그 사람들을 찾으려는 듯.
“지혜는? 그 사람들은?”
“지혜는 요양 중이고, 그 사람들은 죽었어.”
“주, 죽었다고?”
“한 명이 좀비에 감염됐어. 내가 말해준 두 번째 원칙 기억나?”
“상처는 소독하고 밀봉하지 않으면 감염된다.”
“맞아. 한 명이 감염돼서 좀비화됐고, 같이 격리됐던 두 사람을 전염시켰지. 그래서 셋 다 죽였어.”
세리의 낯빛이 하얗게 셌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기분이 어때?”
“내가 안 죽였어.”
“직접 죽인 건 아니지. 다만 네 덕분에 고추바사삭된 사람이 좀비화된 건 사실이고.”
“······.”
“어때, 그래도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세리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맞아.”
요한은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자신의 일정을 설명했다. 다른 사람은 전부 들었지만, 세리는 격리되어 있어서 듣지 못했던 사실들.
아니나 다를까, 세리는 자신도 백화점으로 가겠다고 발광했다.
“나도, 나도 가!”
“안 돼.”
“우리 언니 구해야 한다니까!”
“그러면 더더욱 안 돼. 방해야.”
세리가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표정으로 씩씩댔다.
더 가관인 것은 정환이었다.
“형 저도 같이 갈게요.”
“너 대체 뭘 들은 거야, 내 부재중 대리라니까.”
“그렇지만 형!”
“그래, 김정환! 너는 빠져. 일이나 해. 내가 간다니까?”
“둘 다 조용히 해, 시끄러워.”
요한의 단호한 한 마디에 두 사람의 입이 뚝 다물어졌다.
“혼자 간다.”
* * *
요한은 빠르게 캠프에서 나왔다. 주차장에서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 두 번째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빠르게 내달렸다. 두 볼에 따듯한 바람이 스치듯 지나간다.
까치울 전원단지에 도착해 초입 건물 옥상으로 들어가 옥상과 옥상으로 연결된 줄을 탔다.
집 근처의 좀비들은 여전했고 트랩에 발이 걸린, 최근에 좀비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들이 있었다.
대비할 곳을 잘못 찾은 운 없는 케이스다. 요한은 제 트랩에 걸린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마을 초입 표지판에 ‘위험지역’이라는 글씨를 남겨둔 것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오랜만에 본 캠프에 들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영양학에 맞는 식단을 섭취하고,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간의 노고가 싹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푹 쉬었다. 바짝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넉넉하게 풀어진다. 긴장이 풀리며 근육도 천천히 이완된다. 다음 날, 깨어났을 때 몸은 더없이 상쾌한 상태였다.
요한은 외출을 준비했다. 허리춤에 찼던 리볼버를 총기 보관함에 내려놓고, 글록과 소음기를 각각 챙겼다. 양쪽 건빵주머니에 넣은 뒤 외투로 가렸다.
첫 외출 때 리볼버를 고집했던 건 역시 휴대하기가 가장 편했던 것도 있었고, 파출소나 지구대 등에서 그나마 현지 총알 조달이 가장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인전이 있을 확률이 높은 상황. 소음기와 탄창 장전식 권총이 필요했다. 이 글록은 3개월 전, 괴한들과의 전투에서 얻은 한 정이 유일한 귀한 총기였다. 요한은 소음기를 넣은 주머니에 추가 탄창을 두 개 더 챙겼다. 배낭 대신 허리 주머니를 찼다. 챙길 것은 육포와 쌍안경.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등 뒤에는 쇠뇌를 맸다.
요한은 다시 부천시청으로 향했다. 삼사십 분 정도 걸려 도착한 H백화점 입구에는 좀비들이 가득했다. 마트와는 달리 입구가 여럿 있었다. 백화점 옆에는 종합쇼핑몰과 연결된 통로가 있었고, 출구는 사방에 나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으나 잠금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요한은 고민 없이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차장에는 수십 구의 좀비들이 있었다. 요한을 발견한 좀비들이 그르렁거리며 다가온다. 요한은 쇠뇌를 들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좀비 세 구를 쓰러트리고 전속력으로 비상구까지 돌파했다. 요한의 속도를 좀비들은 따라올 수 없었다.
요한이 비상구를 천천히 열었다.
“어, 당신 누구······.”
경계가 있었다. 경계병이 자신을 발견하고 사태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자 요한이 잽싸게 그의 뒤로 돌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경계병이 소리를 지르고 허리춤의 무기를 꺼내려 했으나 요한이 그의 목에 팔을 거는 것이 먼저였다.
우득, 뼈 뒤틀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요한이 손을 놓자 거품을 문 사내가 스르르 바닥에 쓰러진다.
요한은 빠르게 계단을 올라 최상층으로 향했다.
마트와 달리 중앙이 뚫려있어서 사람들이 있는 지하가 얼추 내려다보였다. 요한이 쌍안경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훔쳤다.
1층엔 미처 처리되지 않은 좀비가 가득했고 마트와 유사하게 식량이 있는 지하에 사람들이 몰린 듯했다.
천천히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던 요한이 괴리감과 기시감을 느꼈다. 사람들의 모습, 움직임이 이상하다. 마치.
‘약에 취해 있나.’
미국 빈민가의 마약촌처럼 무기력하고 눈이 풀린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요한이 미간을 좁혔다. 과거에도 한 번 약에 중독된 무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의 모습은 그와 똑 닮았다.
아무리 정부가 무너져버렸다지만, 벌써부터 마약이라니. 이는 고의로 약을 풀지 않은 이상 어려운 일이다.
그때 요한의 시선에 한 무리가 지하에서 올라와 2층 구름다리를 통해 건너편 종합쇼핑몰로 건너가는 모습이 보였다. 요한이 그들을 일정 거리를 두고 쫓았다.
걸음은 은밀했고 조심스러웠다. 발각되더라도 웬만해서는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건너온 종합쇼핑몰에도 좀비들을 소탕해둔 듯한 시체들이 가득했다. 시체들은 언제부터 썩기 시작했는지,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병이 돌겠는데.’
시체를 저렇게 오래 방치하면 역병이 돈다. 기본 중 기본. 사냥할 만한 역량은 되지만 그 시체를 처리하지 않은 것을 보아, 청결에 대한 이해도는 부족한 듯 보였다.
무리를 따라가다 벽에 가로막힌 요한이 주변을 살폈다. 길이 좁아지고 있었다. 대놓고 쳐들어갈 게 아니라면 이 이상 전진은 위험했다.
고민하던 요한은 천장의 환풍구를 뜯어냈다.
조폭 무리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쇼핑몰은 조용했고 환풍구에도 돌아가는 기구는 하나도 없었다. 요한은 미로 같은 환풍구를 여기저기 헤매며 사람들의 말소리를 더듬더듬 따라가다 쇼핑몰의 주 사무실로 사용되는 듯한 공간에 도착했다.
사무실 안에는 약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곳에는 생각보다 젊고 날렵한 인상의 사내가 거만하게 앉아있었다. 요한은 본능적으로 그가 이 무리의 수장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사내의 의자 앞에는 한 여인이 얼굴에 눈물범벅을 한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고, 사무실 한쪽 구석에는 완전히 포박된 채 피투성이 얼굴을 한 덩치의 사내가 있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사내는 굵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하의를 끌어올렸다.
“왜.”
들어온 사내들은 하나같이 힘깨나 쓰게 생긴 얼굴들이었으나, 요한은 포박된 사내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왔다.
‘엄청나게 쥐어 터졌군.’
사내들은 들어와서도 문 앞에 일렬로 서 있었다. 리더로 보이는 자가 포박된 남자에게 다가간 탓이었다. 리더가 포박된 남자의 턱을 검지로 들어 올렸다.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고, 순순히 내 말을 들으면 편하잖아. 엉?”
턱을 붙들린 사내가 침을 탁 뱉었다. 침을 맞은 사내는 가죽 장갑으로 침을 닦아내고는 그에게서 손을 뗐다.
“이래서 무술인들은 귀찮단 말이지. 고지식해서는 말이야. 어이, 너. 보고해.”
“예. 상무님. 오늘 사냥 결과입니다. 좀비 백 구 정도를 처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명이 죽었습니다.”
“누가 죽었지?”
“신원파악은 어렵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이라······.”
“쓰레기들. 계속 굴려. 나약한 새끼들은 살아남을 자격이 없지. 이놈처럼 쓸 만한 자식이 마음을 바꿔먹어 주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네. 물론입니다.”
상무가 무술인에게 시선을 향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하면 여자도 마음껏 안을 수 있게 해준대도. 약도 말이지. 아, 친구들이 모두 약에 중독돼서 죽은 바람에 약은 좀 치가 떨리려나?”
묶인 사내가 으르렁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사내들이 진정시키려 그를 붙잡았으나 어찌나 힘이 센지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상무가 쯧, 하고 혀를 차고선 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사내가 숨을 훅 들이켜며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이년 데리고 나가고. 세영이를 데려와.”
“네.”
“역시 세영이만큼 맛있는 년이 없어. 그렇지?”
“저, 그런데 상무님.”
“응? 뭐야?”
“세영이 년이. 몸이 안 좋다는데요.”
“하하,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무가 사내의 턱을 후려쳤다. 턱을 맞은 사내가 휘청거리자 곧바로 옆의 재떨이를 들어 머리를 내려쳤다. 쓰러진 사내의 머리와 배를 연속으로 짓밟고 차고 내려쳤다.
“억, 억!”
“라고 하고 끝날 줄 알았니?”
“크읍, 상무님······.”
“응? 이 밥버러지 새끼야.”
상무의 손에 골프채가 들렸다. 주변 사내들이 경악했으나 누구도 쉽게 말리지 못했다.
골프채를 두어 번 빙빙 돌리던 상무가 힘껏 사내의 머리를 내려쳤다. 부들부들 떨던 사내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치워.”
상무가 허공을 가리키며 내뱉자 그 근처에 있는 사내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주, 죽었습니다.”
“내다 버리고 와. 오면서 윤세영이 데리고 와.”
“옙!”
“참.”
자리로 돌아가던 상무가 다시 뒤돌아섰다. 사내들의 몸이 움찔한다.
“고기 방패는 언제쯤 준비될 것 같아?”
“시,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직 쓰레기들 중에 쓸 만한 녀석들이 적어서······.”
“밖으로 계속 굴려. 쓸 만해질 때까지. 방패가 준비되면, 마트에 다시 한번 조공을 받으러 가야지. S존이랑, 마트. 안 간 지 꽤 됐지?”
“예.”
“이번에는 많이 데리고 가서 싹 다 데리고 와. 슬슬 질릴 때가 됐잖아.”
요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상종을 못 할 쓰레기들이다.
이 난리통을 이용해 약을 유통시키고 납치에 폭력 행위를 일삼는 조직. 그들에게 납치된 사람들의 처우가 안 봐도 훤하다.
이런 쓰레기들을 규합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설령 규합하고자 하더라도 이미 단단하게 자리 잡은 조직은 쉽게 무너지거나 지도자를 바꾸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 가만히 놔두면 이미 다져 놓은 캠프와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도 확신했다. 처리해야 한다. 요한은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렸다. 일대 다수의 싸움이지만, 혼자 처리하는 게 분명히 덜 위험했다. 자신도 있었다.
어설픈 동료는 방해만 되니까.
요한은 천천히 몸을 빼며 마지막까지 놈들의 모습을 뇌리에 담았다.
눈에 들어온 총기는 한 정. 상무라는 자가 차고 있는 권총이었다. 총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중간관리자급 사람들은 총기를 갖고 있을 확률도 계산해야 했다.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요한은 천천히 백화점 내부를 훑었다. 전투력은 얼마나 되는지,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물자는 얼마나 되는지가 주 포인트였다.
제법 규모가 큰 캠프이니만큼 사람들도 많고, 물자도 풍부했다. 다만, 풍부한 물자가 모든 사람에게 보급되지는 않는지 여기저기서 곯은 사람들과 앓는 사람들이 보였다.
관리가 패악에 가까운 비극적인 캠프다. 타락한 인간 본성의 끝을 보여주는 듯.
요한은 캠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마트의 삼 층으로 이동했다. 그때, 지하에서 소란이 들렸다. 여인의 얄따란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귓가에 말소리가 들렸다.
“형씨도 이 캠프에 볼일이 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