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요한은 반색했다. 그는 청년 장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고 가족들과 함께 상경한 베테랑 농사꾼이었다. 살던 주택 옥상에서도 텃밭을 항상 꾸려 왔다고 말했다.
마트의 옥상은 상당히 넓다. 옥상 전체를 텃밭으로 만든다면 상당한 양의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 감자나 옥수수 같은 식용작물을 재배할 수만 있다면. 요한의 표정이 밝아지자 곁에 있던 정환이 들뜬 목소리로 거들었다.
“아마 비료 섞인 원예용 상토는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회사가 건물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고구마를 키웠는데, 이 근처에서 흙을 사 왔었거든요.”
“자세한 위치를 말해줄 수 있어?”
요한이 지도를 꺼내며 요청하자 정환이 이쯤일 거예요, 라며 한 곳을 짚어주었다. 멀지 않은 곳이다. 복귀할 때 들르는 것으로 했다.
“비료와 흙은 꼭 따로 가져다주게. 작물마다 비율이 달라야 해서.”
“알겠습니다.”
“이러다 주차장에 목장도 만드는 게 아닌가 모르겠구먼.”
박 노인은 농담 삼아 한 이야기였지만, 요한의 머리는 무언가에 맞은 듯 번쩍했다.
주차장은 어차피 거처로 쓰기도 모호한 죽은 공간이다. 주차장이지만 지상층이라 햇볕도 잘 든다.
살아있는 가축을 구하고 가득 차 있는 차량만 제거할 수 있으면 노인의 말도 아예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가축들을 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당장 주차장에 빼곡한 차량을 치우는 것부터 문제다. 유리를 깨고 사이드브레이크를 풀면 밀어낼 수는 있지만, 핸들을 잠근 락을 푸는 게 문제였다.
차량정비공 기문이 떠올랐다. 차량정비는 정말 귀한 기술인데. 그의 부재가 아쉽게 다가온다.
함께 고민하던 정환이 의견을 냈다.
“하역장에 지게차가 있던데, 그거라도 써서 공간을 만들어 볼까요? 가벼운 경차들은 어떻게 치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일손도 없고 하니, 어르신이 옥상에 텃밭 개간하는 것만 잘 도와드려.”
당부의 말에 정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 얼굴이다.
요한은 수색을 나서기 전 자신들을 배웅하는 캠프의 전투조의 면면을 살폈다. 정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청소 따위를 도맡아 하던 이들. 마뜩잖은 전력이다.
그들은 이른 시일 내에 못해도 정환이 정도로는 전투력을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요한이 생각하는 캠프 연합조직의 코어는 이곳, 마트였으니까. 자신들은 어떤 생존자들보다 빠르게 많은 물자를 확보해 놓을 것이고 물자캠프는 연합조직의 생명줄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마트 캠프에는 최고의 전문가들과 전투 요원들이 모여 있어야 한다.
캠프 연합조직의 코어이자 보급창고가 될 곳인데 아마추어들을 둘 수는 없다. 성장하지 못하면, 다른 캠프로 보내질 것이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색조는 이번엔 병원 쪽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되는 백화점이나 편의점처럼 기존 외출보다 장거리인 만큼 다소 준비가 필요했다.
물론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외부 길이 초행인 사람도 있었다.
요한이 무전기 네 개 중 두 개를 정환에게 주었다.
“한 대는 주차장 경계 인원에게 주고, 하나는 항시 가지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무전치고.”
“예, 형. 그런데 세리는······.”
“응?”
“세리는 아무래도 두고 가시는 게 어때요?”
“뭐 어쩌겠어. 본인이 가겠다는데.”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저래 봬도 0.3인분 정도는 하는 애니까.”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의 정환이었다. 그새 친해졌나. 안심시키는 말에도 그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요한은 다시 한번 너무 걱정하지 마라며 그를 달랜 후 스위퍼에게 무전을 쳤다.
“스위퍼, 준비 다 됐으면 내려와.”
-라져 댓.
금세 세 사람이 내려왔다. 스위퍼와 하진은 백화점에서 챙긴 검은 가죽 상하의를 입고 핸드가드를 하니 요한과 거의 비슷한 복장이었고, 세리는 딱 달라붙는 가죽옷에 야구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에 핸드가드까지 꼈다.
시선을 강렬하게 강탈하는 옷차림에 요한이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 와중에 옷차림은 왜 저리 도발적인지 모르겠다.
“연예인 공항패션이세요?”
“헤헤, 오랜만에 외출이라 설레서. 예쁘지 않아?”
세리가 선글라스를 살짝, 이마 위에 걸치더니 요망하게 눈웃음을 쳤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글라스만이라도 벗고 오면 버리고 가진 않으마.”
“힝.”
세리는 정신 나간 망아지 소리를 내며 선글라스를 집어 던졌다. 요한이 세 명을 둘러보며 물었다.
“장구는?”
“B형으로 챙겼어.”
“난 C형. 한 명은 C형 꼭 챙기라고 해서.”
“좋아.”
하진과 스위퍼는 B형, 세리는 C형 장비를 챙겼다.
병원까지의 거리는 800m. 도보로는 15분이면 도착 가능한 거리다. 중간에 좀비들을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30분. 장기 생존에 최적화된 A형 군장보다는 가볍고 전투 및 수색에 최적화된 B형이 군장이 적절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생존자를 대비해서 식량 위주의 C형 군장은 한 명은 반드시 들게 했다.
요한은 별도로 챙긴 탄약들도 확인했다. 총기는 두 정. 리볼버 권총 한 정과 소총 한 정. 예비 탄약은 소총 위주로만 챙겼다. 그리고 서준이 만들어 준 새총을 한번 빤히 바라보고는 배낭에 넣었다.
요한은 출발하기 직전 주차장의 탑차 위에서 브리핑했다. 캠프 인원 중에서는 정환이 참여했다.
“말했듯이 우리의 목적은 첫 번째는 물자확보, 두 번째가 생존자 체크 후 연합을 결성하는 거야.”
“그런데 연합 결성이 쉽게 될까? 생존자들이 불신으로 가득할 텐데.”
스위퍼가 예리한 지적을 했다.
“소속감과 신뢰 관계가 쌓이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지.”
“희생이라면?”
“물자를 배급해 줄 거다. 주기적으로.”
“엥?”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인상을 썼다. 누군가 죽 쒀서 개 주는 거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하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자배급과 보호를 조건으로 캠프의 인재들을 이곳으로 데려올 거야. 전투 인원이든 기술자든.”
요한은 이어 세부적인 전략설명을 덧붙였다.
“최소한 이 지역 안에 열 개 이상의 캠프를 만드는 게 목적이야. 캠프당 인원은 최대 스무 명. 그리고 이곳 마트 캠프는 앞으로 규합할 생존자 주거지들의 보급창이 된다. 그리고 각 캠프로부터 유능한 인재들을 계속해서 모아 수색조의 규모를 늘린다. 수색조는 한 캠프에 소속하지 않아. 돌아다니면서 캠프들을 관리하고 물자를 찾거나 보급할 거야. 위급 상황에는 곧바로 지원을 가고.”
“꿀 보직인 줄 알았더니 개고생이 예약된 보직이구만.”
스위퍼가 구시렁댔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하진이 핵심을 짚어냈다.
“그러니까 물자와 안전을 제공하고 인재와 협조를 받는 구조군.”
“정확해. 이 캠프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쉘터가 된다.”
“연결고리가 너무 미약한 조직인걸.”
“캠프끼리 사람들을 자주 뒤섞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유대감은 늘어나겠지.”
“호오······.”
수색조는 그 조직의 핵심이 될 단체였고, 마트는 수색조의 베이스캠프가 아니었다. 마트는 마트대로 스무 명의 생존자를 채워 넣어야 한다.
수색조의 전용 캠프는 요한의 까치울 전원단지로 해서 수색조만큼은 훨씬 좋은 환경과 만족도를 줄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았다.
전원단지 캠프는 제 마지막 보루였고 공개하기엔 시기상조였다.
개괄적인 목표를 듣고 난 이후, 좀 더 세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병원까지의 진로, 생존자가 있을 때의 행동 양식, 없을 때의 행동 양식, 위기상황에 따른 대처법과 수신호 등등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데.”
하진은 솔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단기간에 준비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요한은 마치 잘 훈련된 특전사와 같았다.
“수신호는 빨리 외워. 전투 중에 어리바리하면 바로 수색조에서 뺄 거니까.”
세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하진과 스위퍼는 예감했다. 요한의 말대로 조직 결성에 성공하면, 막대한 권력을 가진 이 수색조는 조직의 중추가 된다. 아직은 시작단계에 불과하더라도. 저절로 침이 삼켜지는 설계였다.
수색조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일행은 천천히 좀비들을 죽이며 전진했다. 느리지만 안정감 있는 전진이었다. 좀비들은 끊임없이 나타나 침이 뚝뚝 떨어지는 아가리를 들이밀었으나 누구 하나 위협을 끼치지 못했다.
왼쪽 날개를 담당한 세리는 경쾌한 발놀림으로 좀비 한 구의 머리를 작살 냈다. 마치 어딘가 들떠 있는 모습이다. 곧바로 요한의 타박이 이어졌다.
“긴장 좀 하자.”
“아, 오빠. 미안. 오랜만에 외출이라. 왠지 설레네.”
세리는 해맑게 대답하며 눈앞에서 다가오는 좀비를 향해 스텝을 밟았다. 경쾌한 발걸음은 시야를 가렸고, 가려진 시야는 발밑에 기름에 젖은 땅을 보지 못하게 했다.
단말마의 억눌린 비명과 함께 세리가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위로 좀비가 덮쳤다. 세리의 위에 올라탄 좀비가 귀신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이를 딱딱거린다. 세리가 급하게 핸드가드를 들어보지만 짓눌리는 무게감에 팔의 힘이 점점 빠진다.
그때, 쐐액 하고 날아간 단검 하나가 좀비의 머리를 꿰뚫는다. 좀비는 제 머리가 뚫린 줄도 모른 채 이빨을 딱딱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세리의 얼굴로 좀비의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스위퍼가 던진 단검을 회수하고선 세리를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요, 세리가 짧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한 번 더 폐 끼치면 수색조에서 빼고 캠프로 돌려보낸다. 방심하지 마.”
요한의 무미건조한 음색에 세리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은 못 되더라도 발목을 잡으면 안 되는데, 너무 방심했었다.
“잠깐.”
요한의 말에 다시 움직이려던 일행이 걸음을 멈췄다. 세리가 넘어진 곳은 주유소 앞이었다. 주유소에서 약 50m쯤 떨어진 거리.
요한이 물끄러미 기름 자국을 바라보고 있자 스위퍼가 이때다 싶어 가지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세리가 인상을 썼다.
“담배 좀 끄지? 간접흡연 노! 혐연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간접흡연이 싫으면 직접흡연을 하면 돼. 아가씨.”
“아 언제적 개그야. 아재 개그 혐오권도 존중 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하진이 요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가 이상한 게 있나?”
“이 기름, 자연적으로 유출된 게 아니야.”
땅을 적시고 있는 기름은 어딘가 차에서 자연스럽게 샌 기름이 아니었다. 흘린 기름의 양이 부자연스럽게 많았고, 모인 모양이 마치 무언가를 올려놓고 흘린 것처럼 끊겼다.
“누군가 저기 유조차에서 기름을 꺼내 온 다음 여기서 수동으로 주유하다가 흘린 것 같네.”
“그게 왜?”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흘린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니까.”
누군가 근처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진이 순식간에 돌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다가온 스위퍼가 주변을 쌍안경으로 뒤져본다.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기름을 채웠다는 건 어딘가 장거리로 이동하기 위해서였을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구심.
도로는 전부 마비되었을 텐데.
지금 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오토바이 정도일 터다. 배회하는 생존자는 한두 명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집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요한은 다양한 가능성을 머리에 집어넣고 움직임을 재개했다.
어떤 변수와 위험요소가 등장할지 모르는 외부. 요한의 감각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