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40화 (40/176)

<40화>

누군가 옥상정원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어떤 볼일인지는 안 봐도 훤한.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당혹감에 손잡이를 향해 건넨 손이 오랫동안 방황한다.

이 상황이라도 오욕칠정은 인간의 본능이고, 굳이 말리고 싶지도 않고, 자신이 뭐라고 할 처지도 아니지만.

지금은 저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 문을 열고, ‘화끈한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오토바이 위치 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요량.

요한이 열심히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환이었다. 정환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요한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해요?”

“어?”

“어, 이게 무슨 소리지?”

때마침 타이밍 좋게 가냘픈 교성이 철문을 뚫고 새어 나왔다.

‘아앗······!’

정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라 딱 잘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표정.

“형······.”

“아무래도 주차장 쪽으로 가야겠지?”

요한은 정환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 올라왔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물었으나 되돌아온 질문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형, 이런 취향이었어요?”

“······뭐?”

“취향은 존중해야 하지만 형한테 이렇게 엿듣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

“이해할게요. 형.”

한참을 얼빠진 얼굴로 정환을 멀뚱멀뚱하게 바라보던 요한은 이내 얼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정환아.”

“네, 형.”

“개소리하지 말고 내려가자.”

정환은 내려가면서도 요한의 취향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다, 결국 요한에게 한 대 쥐어박히고선 질질 끌려 내려갔다.

“저기 보세요.”

“놈들이야?”

4층 주차장에서 요한은 정환이 가리킨 곳을 쌍안경으로 바라봤다. 거리가 가깝지 않아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전조등 불빛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꼬리를 잡았다.

숫자를 어림잡기는 힘들었지만,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요한은 불빛이 이동하는 걸 천천히 따라갔다. 그 불빛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 자식들이 병원을 거쳐서 약대동 쪽으로 이동했다가 이번엔 상동역 쪽으로 움직이고 있어.”

“캠프의 위치가 예상되세요?”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저 인원으로 캠프에 자리 잡았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다. 아마도 저들은.

“고정 캠프가 없어, 저 자식들.”

“네?”

“그냥 그때그때 자기들 마음대로 이동하는 놈들인 것 같은데.”

계속 부천에서 지내던 놈들이 아니다. 자신이 지난 6개월 동안 은거하며 아포칼립스의 진행을 지켜볼 때 저렇게 눈에 띄는 집단을 본 적이 없다. 다른 지역에서 왔을 공산이 크다.

계속해서 도시를 옮겨 다니는 약탈자들. 그러니까 좀비 웨이브와 변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거겠지.

놈들의 현재 위치를 통해 대충 어떤 경로로 이동해 왔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놈들은 건방지게도, 이 마트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있었다. 마치 가장 중요한 사냥감을 남겨놓고 그 주변을 배회하듯 도는 하이에나들처럼.

놈들은 확실히 저를 의식하고 있었고, 이곳 캠프 또한 그들을 의식하고 있다. 결국, 머지않은 시일 내에 부딪힐 거다.

1층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온 요한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했다. 선수를 칠 것이냐, 기다렸다가 역습을 할 것이냐.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고, 각각의 위험요소가 있다.

고민이 깊어졌다.

* * *

요한은 이른 아침 수색조를 깨웠다. 원활한 전투를 위해 가장 먼저 충당해야 할 물자가 있었다.

수색조는 곧장 부천시청으로 향했다. 부천시청은 ‘ㅗ’자 모양의 거대한 건물과 그 주변으로 빼곡히 가득한 차량이 너저분하게 흩어져있단 점만 제외하고는 다른 건물들과 다를 바 없이 황량한 상태였다.

본의 아니게 수색이 늦어졌지만, 본래는 가장 먼저 수색하려고 했던 장소 중 하나.

부천시청에서 충당하고 싶은 물품은 다름 아닌 무전기였다. 캠프 간 안전을 위해서, 또 따로 활동하는 인원들을 위해서라도 대량의 무전기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무기류는 기대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사무소나 시청 등에도 무기고가 있었다고 들었지만, 회귀 전 요한이 확인해 본 바로는 무기고와 탄약고는 군부대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은 무기보다도 통신 장비가 급했다.

수색조는 요한의 인솔에 따라 시청 CCTV 통합관제센터, 종합상황실, 통신실에서 총 9개의 무전기를 획득했다. 그중에 7개가 정상적으로 사용됐다.

부천시청 수색을 완료한 수색조는 곧장 중동지구대로 향했다. 지구대의 무기고와 창고는 이미 누군가 물자들을 빼 간 뒤였으나, 우연히 좀비가 된 지구대 형사에게서 리볼버 한 정과 무전기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요한은 무전기들의 주파수를 맞추고 마트와 병원의 경계병, 갑수와 정환, 그리고 수색조 전원에게 건넸다. 그러고도 세 개가 남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다들 복귀해서 쉬고 있어. 오후에는 총기를 배급할 테니까. 하진, 인솔해.”

“어디 가게?”

“총기 가지러.”

“같이 가지.”

하진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까치울까지는 걷기엔 먼 거리다. 백화점 주차장에 세워 둔 이륜차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진, 인솔 부탁한다.”

“알았어.”

일행과 헤어진 요한은 곧장 1차 쉘터로 돌아갔다. 망설이고 망설였던 총기 보급. 지금이 적합한 타이밍이었다.

캠프 생존자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훈련되었고, 정환을 중심으로 신뢰도 쌓일 만큼 쌓였다.

좀비 웨이브 이후에는 한 번의 작은 말썽도 없었다. 실력은 부족할지언정 모두 최선을 다해 잘 따라와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부터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고 싶지 않다.

실행해야 한다.

만약 여기서 망설이고 우유부단하다가는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결심을 굳힌 요한이 더플백에 총기와 탄약을 주워 담았다. 대부분 브라우닝 맥서스 엽총. 대좀비전에서는 효용성이 떨어지더라도, 대인전에서는 충분히 제 위력을 발휘할 터다.

빵빵해진 더플백을 등 뒤에 단단히 고정하고 요한이 바이크의 시동을 밟았다.

5. 격돌

* * *

스위퍼는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며칠 전에 무서운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갑자기 선생님들이랑 군인 아저씨들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죽였다고? 무슨 목적도 없이?’

‘모르겠어요. 그냥··· 동대장 아저씨가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막는데 갑자기 칼로······.’

말을 잇던 소녀는 점점 말끝을 흐리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소리는 전염이라도 되듯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도망쳤어요.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은 옷을 벗기고······.’

끔찍한 세상에서 보지 않았어야 할 것들을 보고, 견디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견디는 아이들. 입맛이 썼다.

‘끅, 천막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으니까 사람들이 교실로 들어오려고 해서 허겁지겁 숨었는데, 히끅, 너무 무서워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스위퍼는 천천히 교실 밖으로 나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천진난만하게 수업을 듣고 고되지만 값진 추억을 쌓아갔을 아이들은 지금 추악하게 더럽혀진 세상에 던져져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겪은 일, 그리고 앞으로 겪을 일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거참 기분 더럽구만.”

스위퍼는 교정 담벼락에 기대 연달아 네다섯 개의 연초를 연달아 피워냈다. 연기를 보고 달려든 좀비 한 마리. 그가 신경질적으로 놈의 머리를 쑤셨다.

띠리리릭. 무전기 오른쪽 버튼을 길게 누르고 요한을 불렀다.

“대장 형씨, 나야.”

약간의 정적 후 대답이 들려왔다.

-듣고 있어.

“확인해 봤어?”

-어. 담벼락에 놈들의 표식이 있더군.

“빌어먹을 놈들.”

여기저기 안 찝쩍거린 데가 없구나.

-그쪽은 어때.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임시보호소 캠프야.”

지지직거리는 무전기 소리에 스위퍼가 한 템포 쉬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긴 문장을 전달하기엔 힘들었다. 최대한 핵심만 전달해야 했다.

“군인들이 학생들을 보호하고 있어. 위협적이지 않아.”

-그렇군.

보고를 받은 요한의 감상은 짤막했다. 무전 특성상 길게 이야기를 하기 불편하기도 했지만, 예상했던 그대로라는 말투.

“습격을 받은 것 같아. 놈들이 여기도 왔었어.”

-······.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나야 뭐. 대장 형씨가 하라는 대로 하지.”

-직접 본 사람이 판단해야지.

스위퍼가 말이 없자 무전기 너머로 요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판단해. 그냥 되돌아오든, 죽이든, 데려오든.

“알겠어.”

전언은 그게 끝이었다.

스위퍼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하고 교정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뭔가를 하기에도 늦은 시간. 그는 챙겨 온 건조식품을 입에 넣고선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혹시라도 주변에 놈들이 남아있는지 감시할 요량으로.

멍하니 죽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을 시간이 된다. 스위퍼는 담배를 끄고 하룻밤 묵을 장소를 찾기 위해 내려갔다.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꽁초가 가득하다.

학교 내부를 슬금슬금 돌아다니던 그는 생존자들이 있는 장소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한 교실에 들어갔다.

청소도구함으로 보이는 철제 캐비닛을 한쪽에 눕히고, 예비 옷감을 깔자 그럴싸한 잠자리가 완성됐다. 혼자 돌아다닐 때 종종 이런 식으로 잘 곳을 만들곤 했다. 캐비닛 문이 닫히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스위퍼는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비볐다. 어느덧 아침이 밝은 모양이다.

캐비닛 문을 천천히, 그리고 살짝 열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 흠칫 몸을 떨었다. 생각보다 소음이 컸다. 그때 지척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시선의 끝에는 여학생 두 명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반쯤 탈의한 채였다. 스위퍼가 눈을 끔뻑였다.

“오우, 제법 끝내주는 경치인걸.”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학생들은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를 듯한 표정이었고 스위퍼는 예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들에게 부탁했다.

“미안한데 아가씨들, 조용히 나갈 테니까 소리는 지르지 말아 줄······,”

꺄악! 여학생들의 비명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래.”

목청도 크네. 스위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여학생이 자지러지듯 뒤로 물러서며 넘어진다. 책상과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어지러워진다. 금세 밖에서 ‘무슨 일이야?’ ‘누구야!’ 등등의 소란이 들려온다.

“Shit······. 실례했어. 아가씨들. 고의는 아니야.”

스위퍼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고선 교실 뒷문을 활짝 열고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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