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 *
반쯤 이지러진 하현달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 깨진 유리창 사이로 요한의 시선이 마트를 향했다. 요한과 정환, 하진은 마트 건너편 빈 건물에서 마트 주변을 주시했다.
두 캠프에는 경계태세가 내려졌다. 병원 캠프는 모든 문을 잠근 채 유일한 출입구를 향해 총기를 겨누고 있었고, 마트에는 모든 불이 꺼진 채 생존자들이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입구에 총기를 겨누고 있었다.
“세리야, 요한이야.”
-응, 오빠.
“움직임은?”
-아무것도 안 보여.
수색조의 남은 두 사람, 세리와 동석은 마트 옥상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평소 경계하던 주차장 바리케이드 앞에는 짧은 못 박힌 장판을 여러 장 깔아두고, 사람들을 주차장에서 철수시켰다.
한 선 뒤로 물러난 경계선은 화망을 좁히기 위한 조치였다. 주차장처럼 넓은 범위에서 사격하는 것이 아닌, 좁은 출입문을 사격하는 것.
어두워진 마트 안을 침입한 적은 문을 연 순간 쏟아지는 총알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놈들이 계속해서 침입을 시도하면 한 명도 남김없이 격살한다. 만약 예상외의 화력에 놀라 적이 후퇴한다면 마트 건너에서 대기하고 있는 요한 일행이 그들의 퇴로를 막는다.
최선의 결말은 한 놈도 살아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놈들이 솔직하게 마트를 습격할 경우를 상정한 결과였다.
변수는 놈들이 병원 캠프를 먼저 습격하는 것.
물론 그 또한 대비되어 있었다.
병원 캠프의 전원 모두 엽총이나 새총으로 무장했고, 적의 낌새가 느껴지자마자 무전을 치도록 얘기되었다.
넓은 로비는 버렸다. 문을 아무리 단단히 잠갔다고 해도, 병원 로비는 출입구가 너무 많아 기습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비상구는 단 하나.
그걸로도 부족해 시간을 끌 수 있는 함정을 쳐 두었다.
‘한 분은 이 층 비상구에서 대기하다가 놈들이 일 층 비상구 문을 부수려고 하면, 이 층 출입문을 열고 바로 도망치세요.’
병원 이 층에는 아직 처리되지 않은 수많은 좀비들이 존재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캠프가 정상화되고 나면 한 번에 정리하려고 남겨둔 다수의 좀비 떼. 그것들은 놈들이 캠프를 공격했을 때, 시간을 벌어줄 천혜의 장벽이 되어줄 것이다.
그사이 요한 일행이 놈들의 뒤를 친다. 좀비 장벽이 끌어줄 시간은 딱 10분. 10분이면 충분하다.
일명, 쌈 싸 먹기.
더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었다. 양동작전을 하거나 성동격서 작전을 쓰는 경우들. 캠프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던 놈들이 병원 캠프와 마트 캠프의 커넥션을 알아채고 양동작전을 쓰는 경우도 대비했다.
그 경우엔 이쪽도 인원을 나눠서 동시에 타격한다. 한쪽은 오로지 수비에만 집중하고, 먼저 습격받거나 더 다수의 적이 있는 쪽을 요한이 지원한다.
그 캠프의 목적은 적의 전멸. 생존해서 뿔뿔이 흩어진 적은 이후 수색조가 움직여 일망타진한다.
요한이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를 따라 수색 조원들의 긴장감이 어깨 가득 내려앉는다.
초여름 밤의 더운 열기가 훅 올라와 이마에서 한 방울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이내 흘러내린다.
요한은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눈이 빠지도록 마트의 입구를 노려봤다. 단 하나의 수상한 움직임도, 아주 작은 풀벌레 소리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오랜 잠복이 힘들었는지 정환이 두 발을 주물렀다. 작은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어두운 골목에 어느새 기어 나온 좀비들의 끊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든다.
어둠 속에 흐느적거리는 인영들. 을씨년스러운 광경.
암순응이 완료된 시야에 스산한 풍경들이 담긴다.
띠리릭. 무전기가 작은 알림 소리를 냈다. 뒤이어 갑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한, 병원 캠프요. 놈들이 나타났소.
드디어.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수의 목소리는 긴장했으나 다급하지 않았다. 당장 위협을 받는 상황은 아니리라. 놈들은 생존자들이 식당에 있을 거로 착각하고 있을 테니까.
요한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인원수는요?”
-상당히 많은 느낌인데, 정확히는 모르겠소.
병원 캠프를 먼저 칠 생각인가. 요한이 생각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예정대로 부탁합니다. 출발하지요.”
-그렇게 하지.
요한은 다시 한번 무전기 버튼을 누르고 전 생존자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요한이다. 놈들이 나타났으니 경계태세 강화할 것. 이상.”
간단명료하게 상황전파를 끝낸 요한이 수색 조원들에게 수신호했다. 정환과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선다.
세 사람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좀비들은 위협적이다. 시야도 불안정하고 특히나 놈들은 밤이 되면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매일 꾸준히 좀비 제거 작업을 해왔던 덕분인지 활발한 시간대인 늦은 저녁임에도 좀비들은 한산하게 존재했다. 종종 등장하는 좀비들은 요한이 직접 처리했다. 가장 은밀하고, 확실하게.
일행은 걷지도, 뛰지도 않는 안정적인 속보로 이동했다. 병원으로 이동하는 와중,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하현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밤거리가 약간 환해졌다.
순조롭다.
달빛을 조명 삼으면 놈들을 처리하기 한결 수월하리라. 요한의 신경이 점점 빳빳하게 곤두섰다.
쿵! 쿵! 병원 앞에 도착하자마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고함, 비명, 그리고 좀비들의 하울링.
병원 1층 로비는 아비규환이었다. 2층 좀비 창고에서 죽은 자들이 쏟아지며 습격자들을 공격했다. 놈들은 좀비에게 쉽사리 당해주지 않았지만, 놈들을 전부 처리하기엔 역부족일 듯했다.
점점 힘에 부쳤는지 사람들이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열린 문으로 빠져나올 즈음.
탕!
요한의 글록이 불을 뿜었다. 소음기를 꼈어도 채 잡히지 않은 발포 소리가 병원 앞 정원을 울렸다. 허둥지둥 병원을 빠져나오던 침략자가 심장을 꿰뚫은 탄환에 즉사했다.
“뭐야!”
“밖에 누가 있어?!”
“기습이다!”
순식간에 침략자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요한은 침착하게 먼저 나오는 놈들부터 사격했다. 이어 하진과 정환도 가세해 사격을 시작했다.
“총알 아껴. 한 발씩, 정확하게 쏴라.”
탄창을 가는 사이 몇 명의 침략자들이 빠져나오는 것을 보며 요한이 지적했다.
요한이 정면을 보고 있는 사이, 이미 빠져나왔던 한 침략자가 쇠뇌를 들어 요한을 겨냥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근처 나무 뒤로 사라졌다. 파박, 요한이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 요한이 글록을 받쳐 들었다. 소음기를 낀 권총이 불을 뿜자 가까이에 있던 괴한이 쓰러졌다.
원거리에서 쇠뇌를 쏘고 있는 괴한들을 집중적으로 골라 사격했다. 사내들이 팔을 휘저으며 쓰러졌다.
“정환! 숙여!”
요한이 소리를 지르자마자 정환이 곧장 반응했다. 정환의 머리 위로 괴한이 던진 나이프가 정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탕! 요한이 쏜 총알이 날아가 정환을 기습한 두건인의 얼굴에 박혔다.
얼마간의 총격이 끝나고, 정원에서 움직이는 건 요한 일행과 좀비들뿐이었다.
마지막 괴한이 쓰러지자 요한은 두 사람에게 움직이라고 수신호 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요한을 두 사람이 뒤따랐다.
그들은 좀비들을 밖으로 끌어낸 뒤 재빨리 크게 한 바퀴 돌아 병원으로 진입했다.
병원 정문에 미처 나오지 못한 좀비를 군홧발로 걷어찼다. 좀비 한 마리가 흉하게 나동그라졌다.
“정환아 문 닫아.”
요한은 정환에게 활짝 열린 병원 정문을 닫도록 지시했다. 정환이 역시 문 닫기 스페셜리스트답게 문을 단단히 잠갔다.
요한이 손전등을 들어 로비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 쓰러진 시체였다. 쓰러진 시체 중에서 원래부터 좀비였던 자들과 좀비에게 물어뜯겨 죽은 침략자들을 눈으로 골라냈다.
요한의 머릿속에서 정원에서 죽였던 괴한의 수와 로비 바닥에 널브러진 괴한의 수가 합쳐진다. 요한이 무전기를 들었다.
“요한이다. 병원 캠프 침입자 열네 명. 클리어.”
약 열네 명, 비상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은 놈들이 있다고 치더라도 열다섯 명 안팎. 수가 한참 모자라다.
‘성동격서다.’
양쪽 동시타격이 아니라 성동격서였다. 열다섯 명과 스물다섯 명. 이곳은 미끼였고, 마트 쪽이 진짜 습격이다.
요한이 가정했던 상황 중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상황.
물론 대비는 되어있다.
캠프 또한 몇십 명이 들어오든 그들을 타격하고 쫓아낼 만한 준비는 되어있었으니까. 이번 싸움으로 최대한 머릿수를 줄여 놓고 역으로 자신이 놈들을 사냥하면 된다.
“병원 캠프 사상자 있습니까?”
- 없소. 놈들, 이곳 문도 열지 못했으니.
요한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며 다시 무전기를 눌렀다.
“마트 캠프, 이상은?”
-아직은.
무전기 너머로 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적은 마트인 듯하니 경계 강화하고 집중할 것.”
-확인··· 잠깐, 위에서 총소리가 들렸어.
위?
옥상이다.
옥상에는 세리와 동석이 경계를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세리야, 무슨 일이야?”
요한이 세리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옥상 경계, 안 들려? 세리야?”
여전한 묵묵부답. 요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전을 같이 듣고 있던 정환이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왜요? 세리한테 무슨 일이 있대요?!”
“쉿. 무전 답장이 안 와. 무슨 일이 있는가 본데.”
“빠, 빨리 돌아가야······.”
요한은 희한할 만큼 침착하지 못한 정환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때, 다시 무전이 울렸다. 무전기 너머로 서준의 목소리와 총소리가 시끄럽게 뒤섞인다.
-여기는 마트 1층. 놈들이야.
“인원은?”
-알 수 없어.
“금방 간다. 작전대로만 할 것. 그리고 옥상 경계가 응답이 없어 정리되면 빨리 확인 바람.”
-확인.
무전기 너머로 ‘쏴!’, ‘죽여 버려!’ 등등 힘찬 고함소리가 넘어온다.
요한은 인상을 쓰며 무전기의 소리를 줄였다.
옥상의 문은 안에서 잠겨있다. 기습을 당하지 않는 이상 무전도 치지 못할 상황은 있을 수가 없다.
기습을 당하는 건 더 이상하다. 마트는 5층 건물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설마, 마트의 벽을 타고 올라왔다고?
요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물 외벽을 오르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파이프를 타고 내려가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장비 없이는··· 절대 불가능.
아니다. 요한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벽을 타고 옥상을 넘어오는 게 상식적이지 않은 생각이라고 해도, 상식을 벗어난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요한 자신이었어도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벽을 타고 넘었으리라.
어쨌든 중요한 건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옥상 경계조의 두 명에게.
지금으로선 빨리 복귀하는 게 최선이자 유일한 선택지였다.
“가자.”
요한은 서둘렀다.
돌아올 때보다 걸음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상 범위 밖의 첫 번째 변수가 발생했다. 사거리를 건너고 차들이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거리를 지날 때까지도 세리와 동석에게는 연락이 없다.
-요한, 오고 있냐?
“십 분 후 도착 예정. 상황은?”
-네 명 죽였어. 몇 명 죽이니까 안 들어오더라고. 도망친 것 같은데. 나가볼까?
네 명?
네 명이면 죽인 숫자가 너무 적다.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덮치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전원 대기. 금방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