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박 선생의 말에 세리가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효가 들려면 30분 정도 걸리니까, 30분 후에 풀어줄게. 세리 양. 너무 걱정하지 말렴. 요한 군이 누군데. 별일 없을 거야.”
차분한 설득에 세리의 몸이 천천히 진정을 찾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를 찾아오겠다는 다짐만큼은 단호했다.
“아저씨, 내 총에 총알 채워줘. 끝나면 바로 나갈 거야.”
그 말을 남긴 뒤, 세리는 지친 듯 침대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선 몇십 분 후, 귀신같이 잠들었다.
세리의 리볼버에 총알을 채우고 들어온 하진을 반기는 것은 침을 흘리며 잠든 세리였다.
“······잠들었나?”
“아, 하진 군. 세리 양 좀 옮겨 주게. 수면 유도제를 주사했으니 아마 한동안 푹 잘 거야.”
박 의사는 하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은 의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수색조가 풍비박산이 났다. 스위퍼는 자리에 없었고, 요한은 실종됐다. 세리와 정환과 동석은 부상이 심각했다.
그렇다고 이 어두운 밤에 외출 경험도 없는 초보자들을 데리고 수색을 나섰다가는 되레 위험만 초래할 게 분명했다.
요한을 믿었으나, 걱정스러운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에게 목숨을 빚진 거로도 모자라 계속 신세까지 지는 상황.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하진은 서준에게 옥상에 한 명의 경계를 세울 것을 부탁하고 거리로 나와 수송용 탑차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고 요한의 복귀를 기다렸다.
하지만 인내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진은 요한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자신 외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 *
요한은 혁의 손을 잡고 계량기 함에서 내려온 순간,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은 채 까무룩 기절했다. 상처와 피로의 마수가 그제야 물밀 듯 밀려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마트의 의무실 안이었다. 며칠이나 잠들었던 건지 시간관념이 희박했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침대 귀퉁이에 엎드려 잠든 세리가 눈에 들어왔다. 무전이 없었던 그 날 밤을 떠올리며 요한은 작게 안도했다.
“오빠······?”
요한이 상체를 들어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자, 움직임을 느낀 세리가 눈을 떴다. 세리는 코뿔소처럼 달려들어 요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 언저리부터 느껴지는 약간의 들썩거림에 요한이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던 세리는 곧바로 캠프 생존자들을 데리고 왔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잠깐, 구경났어? 다들 나가 있으라고. 어?”
의무실이 사람들로 가득 차 복잡해지자 서준이 급하게 몇 명만 남기고 다 내보내는 사달까지 벌어졌다.
“나, 나! 죽 쒔어! 오빠 주려고!”
수색조와 관리조를 제외한 모두가 쫓겨나는 마당에 지혜만이 요한의 영양을 책임질 권리를 주장하며 의무실 안에서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버텼으나, 서준에게 죽만 고스란히 뺏긴 채 쫓겨났다.
“뭐 대단한 부상이라고 이렇게 호들갑들이야.”
요한의 무신경한 말에 캠프 사람들이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요한이 머쓱하게 이마를 쓸어넘겼다.
요한의 눈길이 생존자들을 빠르게 쓸었다. 화살에 맞았던 정환, 무전이 끊겼던 동석과 부상당한 정환을 데리고 복귀했던 하진, 부탁을 받고 홀로 떠났던 스위퍼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혁까지. 걱정했던 이들이 모두 무사했다. 요한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지?”
“그럴 땐 잠든 게 아니라, 기절했다고 하는 거예요. 요한 군.”
“아, 선생님.”
요한은 박 의사에게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누군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하진이었다.
“꼬박 이틀을 내리 기절했어.”
이틀이나? 경악스러운 시간이었다. 고작해야 한나절이나 반나절쯤 잠든 것 같았는데.
“사상자는?”
“없어.”
요한이 숨을 크게 내뱉으며 다시 쿠션에 몸을 맡기며 누웠다. 힘이 풀려버린 탓이었다.
대규모 악인 집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에도 희생자가 없다.
처음이었다.
좀비 웨이브든, 사람들과의 전투였든, 과거부터 회귀 후 지금까지 위기상황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희생자가 생겼었다. 요한의 치열한 삶 속에서, 홀로 싸웠던 싸움을 제외하고 희생자가 없는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과거와는 다르다, 고 요한은 생각했다.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고. 분에 넘치는 행동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전부 좋았다.
운이 따라주었든, 자신이 성장했든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었다. 상처 없는 첫 번째 성공.
이게 뭐라고,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기뻐하는 요한의 표정을 보며 캠프 사람들도 감격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인조인간처럼 굴더니, 자네도 그렇게 감정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군.”
박 노인이 요한의 등을 쓰다듬었다. 요한이 희미하게 웃었다. 생존자들은 의무실 안이 마치 형형색색의 촛불을 켠 것처럼 환해진 느낌을 받았다.
“고생했네.”
“수고하셨습니다. 어르신. 그럼 이제······.”
요한은 고조됐던 감정을 금세 정리했다. 힘든 싸움을 정리했지만, 생존과의 사투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요한은 마른세수를 벅벅 하고서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들 해야지?”
“······.”
마치 동시에 찬물이라도 맞은 듯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가 뭐라고 말 좀 해보라는 듯 서로 눈치를 봤다. 총대를 멘 것은 역시 세리였다.
“좀 쉬어야 한다니까, 일에 미친 중독자 오빠!”
“이틀이나 잤으면 충분하지. 할 일이 많아. 혁아, 일행 데려왔지?”
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엔 스위퍼를 향해 물었다.
“스위퍼도 예비군 캠프 생존자들 데려왔지?”
“응. 열세 명?”
“인원이 너무 많잖아. 빨리 세 번째 캠프를 설치해야 해.”
계산대로라면 거의 마흔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셈이다. 자칫하다간 또 좀비 웨이브에 휩쓸릴 수도 있다. 요한이 당장 일어서려 하자 스위퍼가 제지했다.
“걱정하지 마, 대장 형씨. 이미 어제 우리가 새 캠프를 임시로 정리해서 새로운 생존자들 그쪽으로 보냈어.”
“뭐? 어디로?”
“상일중학교. 형씨가 저번에 세 번째 캠프는 그쪽에 설치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었잖아. 상동역이랑도 가깝고 호수공원이랑 가깝다고.”
“어··· 그랬지.”
요한은 새삼 놀랐다. 지나가듯이 말했던 내용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필요한 순간에 딱딱 실행했을 줄은.
“보급품은?”
“대략 사흘 치 들어갔다. 항목은 전부 기록해 뒀으니 몸 회복되면 확인해 봐.”
이번 질문에 대답한 건 서준이었다. 요한은 그저 헛웃음을 뱉을 뿐이었다.
“좋네요.”
칭찬 외에는 해줄 말이 딱히 없었다. 결국, 요한은 더 쉬라는 말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일하는 대신 앉아서 상황 공유를 받는 거로 합의를 봤다.
혁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의무실에서 빠져나갔다. 그날 아침 봤을 때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혁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앳된 얼굴이었는데도 열흘 사이 한 겹 허물을 벗은 것처럼 듬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꼈던 친우의 동생인 만큼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건이는 잘 보내주고 왔니.”
“응.”
요한의 눈에 혁의 목걸이가 보였다. 그의 목에는 작은 유리병이 달린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유리병 속에 담긴 회백색 가루는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진짜 깜짝 놀랐어. 형 혼자 거기에 갇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요한이 혁을 만난 그날 아침. 막다른 골목에서 혁 일행이 요한의 고함소리를 들은 건, 그저 캠프로 복귀하던 중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천운과도 같은 우연이었다.
보이는 족족 사람을 구조할 생각이었던 혁이었기에 가능했던 우연. 마치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걸 방증이라도 하듯 절묘하게 타이밍이 들어맞았다.
“그랬군. 데려온 사람들은 누구야?”
“네 명은 부천대 체대 동기들. 집 근처에서 우연히 만났어. 나머지 네 명은 두 명씩 따로 만났는데, 복귀하다가 좀비랑 싸우고 있는 걸 구해서 데려왔어.”
“싸울 줄 아는 사람들이고?”
“응. 용감한 형 누나들이야.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버텼대.”
“믿을만한가?”
“형 구할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줬다고 하면 대답이 되려나······.”
이타적인 바보들이군. 요한은 작게 웃었다.
“그래도 너무 마냥 믿지는 마라. 일단 여덟 명은 네가 직접 데리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수색조 얘기는 들었지?”
“응.”
“네가 수색 2조 조장을 맡아라. 여덟 명 데리고 활동해.”
혁은 마치 바라던 바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중학교 캠프로 가면 돼?”
“아니, 수색조 캠프는 따로 만들 거야. 내일 간다.”
“알겠어, 형.”
“그래. 가서 스위퍼 좀 불러줘.”
혁은 씩씩하게 대답한 후 일어섰다. 의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그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왜, 할 말이라도?”
“형, 나. 구조 작업을 할 거야.”
“그래. 수색조 일이 원래 그거야.”
“사람들의 구조를 일 순위로 하고 싶어.”
혁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요한은 그의 심경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신조와 딱 맞는 마음가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목표의식이 분명하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 긍정적인 일이었다.
다만 그 도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호의를 베푸는 건 좋지만, 권리인 줄 알게 하면 안 되고, 구조하는 건 좋지만, 사람을 가려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요한 또한 어려워하는 문제기도 했다. 시간과 경험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그래. 나가 봐.”
혁이 나가고, 문밖에서 기다리던 하진이 들어왔다.
“난 스위퍼 불렀는데?”
“안다. 그 전에 해줄 말이 있어서 잠깐 들렀어.”
“해줄 말?”
“어제 낮에, 너 기절해 있었을 때 스위퍼와 예비군 캠프 사람들이 왔을 때 일이야.”
무슨 일인지 몰라도 하진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원래 늘 심각한 얼굴이기도 했다. 하진은 차분히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날, 스위퍼는 몸에 피를 잔뜩 묻히고 왔었어. 오는 도중 바이크 집단 잔당들의 습격을 받았다더군. 그래서 무슨 일인지 물었는데, 별일 아니라고 싸움이 있었다고 말하고 웃으며 얼버무리더군.”
“인원이 모자란다 싶었더니, 그쪽으로도 보냈었군. 그래서?”
“근데, 예비군 캠프 사람들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 거야. 겁먹은 느낌?”
“······.”
요한은 불안감을 느꼈다. 스위퍼는 짧은 시간 내에 그 특유의 친화력과 전투력으로 이미 연합 캠프의 주축 멤버가 됐다. 그가 이제 와서 뭔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곤란했다.
“그래서 안 중위에게 물었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저분··· 정말 인간 맞습니까? 저는 특공대 사람들도 저렇게 움직이는 건 본 적이 없어요. 눈앞에서 쏘는 화살을 피하고선 웃으면서 놈들을 도끼로 내려찍는데··· 정말 당황스러워서 돕지도 도망치지도 못했습니다. 뭔가 소름이 돋는 움직임이······.’
안 중위는 아직도 자신이 꿈을 꾼 것처럼 느껴진다고 설명했더랬다. 이야기를 들은 요한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굳었다.
그 느낌은, 분명 받은 적이 있었다.
백화점에서 그를 처음 만난 날. 자신이 쏜 화살을 피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저 우연일 거라고, 아니면 당황해서 조준이 잘 안 된 거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놀라운 움직임이었지만 그뿐이라고.
“확실히 날렵하거나 민첩하다고 넘어가기엔 과한 감이 있지. 하지만 그뿐이야.”
“이건 여담인데.”
“응?”
“바이크 집단이랑 싸운 날 기억나지?”
“기억나지.”
“그날 네가 화살 피할 때도 난 그런 느낌을 받긴 했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