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요한이 말을 끝낸 후 뒷말을 잇지 않자, 한 생존자가 물었다. 혁과 함께 대학 동기였다는 청년이다.
“질문 있습니다. 대우라면··· 무슨 대우인가요?”
“여러분은 가장 좋은 무장상태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실 겁니다. 저희 연합이 어느 곳에 있더라도요. 캠프의 인원이 전부 배를 곯더라도 수색조만큼은 가장 먼저 보급을 받게 될 겁니다. 또한,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반드시 부족하지 않게 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수색조 인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목숨을 위협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채찍만으로는 등 뒤를 맡길 동료를 만들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동기와 목표, 그리고 보상이 필요했다.
서생연이 그렇게 악랄한 짓을 일삼고도 조직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공포도 아니고 안전 때문도 아니었다. 상위 서열이라는 이유만으로 얻을 수 있는 달콤한 권력과 보상.
그 보상에 취한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하게 조직의 분위기에 물들고 만다.
“질문 있는데, 대장 형씨.”
요한은 스위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여기처럼 다른 장소를 준비해두기도 했어?”
“다른 장소라면?”
“물자가 쌓여 있는 곳 말이야. 아까 얘기할 때 연합이 어느 곳에 있든 가장 좋은 장소에서 지낼 거라고 하길래, 혹시 장소를 옮길 생각을 하고 있나 해서.”
요한의 미미한 표정 변화를 감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디까지 솔직하게 대답을 해야 할까. 나는 이 사람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나.
“있어.”
“오호?”
“이곳 말고, 도시 밖 외진 지역에 2차 쉘터를 준비해놓았지. 그곳은 외지일 뿐만 아니라 사유지라서 사람의 발길이 닿기도 어렵고, 야생에 풀어 놓은 가축들도 있고, 각종 물자와 파종을 위한 곡식의 종자들도 있지.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좀비들조차 들어오기 어려울지도.”
헤엄을 치거나 하늘을 나는 변종은 본 적이 없으니까.
요한의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스위퍼는 대답이 되었다는 듯 손을 내렸고, 다른 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곳은 어디예요?”
“그건 말하기 곤란한데.”
“···예?”
“만약 침입자와의 싸움이 생겨 누군가가 인질로 잡히거나 고문을 당했을 때, 마지막 보루가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아.”
“아······.”
그리고 2차 쉘터는 생존자들을 규합할 희망이자 그들을 통제할 목줄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캠프에서 이탈해 저 몰래 쉘터를 침입하기라도 하는 짓을 벌이는 건 곤란했다.
“그럼, 저희는 언제 이동하나요? 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는 거죠?”
“첫 번째는, 인력. 식량이든, 생활용품이든, 기술이든 삶을 유지해주려면 인재가 필요해. 건축가든, 농업인이든, 공학자든 의사든. 지금 상태론 자급자족이 불가능해. 그리고 더 중요한 건. 2차 쉘터에 가기 전에 무장상태를 더 강화해야 해. 반드시.”
그곳으로 간다고 해서 좀비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고 확신할 순 없었다. 좀비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약탈자들에게도 계속해서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총기와 탄약, 그리고 인재. 동료로서의 검증까지 마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생존자들을 쉘터로 데려갈 것이다.
요한은 자신의 혼을 불어넣어서 만든 마지막 방주를 지키고 싶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마지막 인류의 안식처로.
“저··· 이 질문은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괜찮아.”
혁의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형은 언제부터 이걸 준비하신 거예요? 여기도, 그 2차 쉘터라는 곳도요.”
“아주 오래전부터.”
“헐··· 세상이 이렇게 될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난 사실,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 내려온 신의 사자거든.”
“예?!”
“농담이야.”
대학생이 과하게 놀라는 표정을 짓자 요한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미리 준비해 둔 건 아니야. 난리가 터지고 군인들이 징집한다고 돌아다닐 때 혼자 움직이면서 조금씩 준비한 거지. 다른 질문은?”
“아, 없어요.”
요한은 미리 생각해둔 핑계를 둘러댔다.
굳이 모든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수색조는 능력 여하에 따라 추가로 뽑을 수도 있고, 수색조에서 뺄 수도 있습니다. 세리야,”
“응? 응.”
“지금 찍은 건 각 캠프에 돌아다니면서 모두 볼 수 있게 돌려.”
“응. 알겠어.”
세리가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며칠 동안만 거점으로 쓸 겁니다. 저희의 캠프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수색조 캠프로는 적절하지 않아요. 내일부터는 장거리 수색을 나갈 겁니다. 군부대에서 무기와 탄약을 보급할 거고, 이번 작전이 끝나면 저희는 상동역에 수색조 캠프를 다시 설치할 겁니다.”
요한은 말을 끝내고선 수색 2조의 여자 조원을 지목했다.
“거기, 이름이 뭐지?”
“애리요······.”
“애리, 그리고 정환.”
“네, 형.”
“둘은 남아. 이곳을 지키고, 김 씨 아저씨는 발전기 옮길 수 있게 확인해주시고요.”
“형, 저도 갈게요.”
“아니. 아직 회복이 덜 됐어. 방해야.”
요한의 단호한 말에 정환이 시무룩하게 반응했다. 물론 그의 부상을 고려한 것도 맞지만, 더 중요한 건 이곳을 지킬 인원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을 꼭 남겨둬야 했다.
이만한 물자를 아직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맡기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때마침 부상 때문에 적절한 이유도 있겠다, 그가 적임자였다.
“제가 말이 너무 길었네요. 남은 거 마저 드시고 내일을 위해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주세요. 저는 여러분이 개죽음당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그 말을 남기고서는 들고 있던 맥주를 단번에 마신 후 경계를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남겨진 사람들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롭게 알게 된 희망에 차기도, 어떤 사람들은 내일부터 있을 수색 활동에 겁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술자리 분위기가 파토 난 것에 불평하기도 했다.
“저 오빠, 학교 다닐 때 아싸였을 거야, 그치?”
세리의 말에 배꼽을 잡고 웃은 건 스위퍼뿐이었다.
* * *
“형, 대차는 하나 남겨둘까요? 여기 짐도 옮겨야 할 텐데.”
“다섯 개 다 챙겨. 어차피 두 번 왔다 갔다 해야 해.”
이른 아침부터 요한 일행은 분주했다.
도로가 막힌 부분에서는 차량이 아닌 도보로 움직여야 했기에 수색조는 탄약을 옮기기 위한 엘 트레이너 다섯 개와 예비 구르마 두어 개를 꺼내 짐들을 옮겼다.
“형, 엽총 총알은 얼마나 챙길까요?”
“최대한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겨, 어차피 탄약 가지러 가는 거니까 다 써도 돼. 식량은 각자 이틀은 버틸 만큼 챙기고. 세리야, 의약품은?”
“소독약, 항생제는 내복약으로, 드레싱 할 것까지만 챙기면 돼?”
“소염제도. 참, 동석은 공구도 챙겨. 절단기도 필요할 거야. 정환아 그건 뭐야?”
요한은 정환이 끙끙대며 옮기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혹시 쓸모가 있을까 싶어서. 일렉트로닉 마트 정리할 때 하나 챙겼어요.”
“흐음.”
정환이 탑차에서 꺼낸 것은 드론이었다. 마트에서 제일 비싼 거라며 덧붙이는 모습을 보며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거 드론을 사용했던 적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조작이 어렵고 실용성이 떨어져 몇 번 시도해보다가 포기했었다.
“실시간 영상 전송되는 거야?”
“와이파이가 없어서 그건 안 되고······. 녹화 모드로 해서 노트북으로 볼 수 있어요.”
“그래? 이거 드론 만질 수 있는 사람?”
요한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색 조원들을 보면서 물었다.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은 챙겨갈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요한과 정환을 힐끔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각자 할 일을 했다.
“당장은 쓰기가 어려울 것 같아. 일단 이건 네가 갖고 있어.”
“네······.”
“다 준비해두면 쓸 데가 있겠지.”
요한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정환을 위로하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출발을 앞두고 수색 조원들은 긴장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군부대인 만큼 반드시 큰 전투가 있을 거라는 요한의 경고 때문이었다. 요한은 더도 덜도 말고 자신이 추측한 상황과 예상되는 전투 규모를 담담하게 설명해나갔다.
모든 시나리오와 루트 브리핑을 끝내고 요한은 각 캠프에 무전을 쳤다.
“여기는 수색조, 마트부터 각 캠프 상황 보고 바람.”
- 서준이다. 이상 없음.
“안 중위님?”
- 이상 없습니다.
“병원은?”
- 이상 없어요.
“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무전 치시고, 저희 없는 동안에는 경계 더 철저히 부탁합니다. 그럼 공팔시 공공분, 수색조 출발합니다.”
요한이 수신호 하자 수색조 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총원 열네 명.
앞뒤로 세 명씩, 양옆으로 네 명씩 다이아몬드형으로 자리 잡은 채 가운데에 엘 트레이너를 끌고 전진했다.
소음 방지 윤활유를 발랐다고는 해도, 역시 다섯 개의 트레이너가 움직이는 소음은 좀비들로부터 적잖은 관심을 받았다. 수색조는 몇 발 떨어지기 무섭게 좀비들과 부닥쳤다.
움직이는 동안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경험이 적은 신규 합류자를 위주로 진형을 세웠다.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경험도 최대치로 쌓고, 적당히 몸을 풀게 해 긴장을 덜려는 조치였다.
확실히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사람들의 몸짓은 가벼워졌다.
부대가 있는 곳은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이 정도 인원으로 움직였던 것 중에 가장 장거리 일정일 터다.
다행히 요한이 가장 우려했던 생존자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작전 중에 생존자들과 마주치는 것은 곤란하다. 구조하기도 외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요한 일행은 두 번을 쉬었고 해가 완전히 중천에 떠서야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했다.
요한 일행은 부대로 진입 전 고가도로 위쪽에 자리 잡은 후 부대 전경을 쌍안경으로 훑었다.
271부대. 사단급은 아니더라도 근처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탄약고가 있는 부대인 만큼 제법 규모가 있는 크기의 부대였다.
역시나 내부에는 좀비들이 가득했다. 오히려 군복을 입고 있는 좀비들보다 민간인이었을 좀비들의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정문은 열려있었고, 정문을 제외한 철책이나 방벽의 상태는 온전했다.
“내부에서부터 무너졌어. 좀비 웨이브가 있었는데, 좀비 웨이브로 무너진 건 아니야.”
요한은 상황을 짤막하게 정리했다.
“두 번에 걸쳐서 공격받은 것 같은데. 내부에서 발생한 좀비로 한 번 부대가 무너졌고, 그 이후 생존자들이 몰려들면서 좀비 웨이브가 같이 빨려 들어간 거야.”
“좀비 웨이브가 같이 빨려 들어갔다고?”
“아마 저쪽이나 저쪽에서 먼저 좀비 웨이브가 터졌겠지. 좀비들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군부대로 도망쳤어. 그게 안전하다고 판단했겠지. 그리고 부대까지 좀비들의 영향권이 돼서 그나마 남아있던 생존자들까지 같이 휘말린 거로 보이는군.”
현재는 군데군데 좀비들이 몰려 있기는 하지만, 좀비 웨이브의 현상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좀비 웨이브 때 정문을 통해 들어온 좀비들이 상황 정리된 이후에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거로 보였다.
마치 밀물 때 해안가로 밀려왔다가 썰물 때 어망에 걸린 물고기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