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요한의 부연 설명에도 사람들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했다. 자신도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생존자가 남아있어서 좀비 웨이브가 진행 중이라면,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 좀비들의 움직임은 웨이브 상황의 움직임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막상 좀비들의 수를 눈으로 확인하니 고민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작전이다. 위험하더라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요한이 미리 준비해온 흰 종이에 부대 내부도를 그리며 설명했다.
“안 중위님이 말해준 내부도랑 지금 보는 부대 구조를 비교해서 그린 약도야. 다들 수첩에 간단하게라도 그려 둬. 탄약고는 부대 중앙 초소 옆이라고 했으니 아마 이쪽일 거고, 들러야 할 곳은 세 군데야. 탄약고, 보급창고, 내무반.”
“내무반?”
“어, 근데 세리야 너 글씨만 못 쓰는 줄 알았더니··· 그거 뭐야? 지옥으로 가는 지도인가?”
“아니, 내무반이 뭐냐고!”
세리가 약도를 따라 그리며 되묻자 요한이 농담하며 덧붙였다.
“병사들 자는 데. 내무반에는 병사들이 사용하는 총기들이 잠겨 있을 거야. 공구로 철사들 다 끊어서 최대한 챙겨 와. 조는 세 개로 나눈다. 유인조, 탄약 확보조, 총기 확보조.”
“와우, 유인조라니. 이름만 들어도 살벌한걸?”
스위퍼가 짐짓 너스레를 떨자, 요한이 그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유인조 조장은 스위퍼. 엄호는 하진, 동석.”
“오, 대장 형씨, 맨날 나만 위험한 일에 부려먹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지?”
“기분 탓이야. 옹 상병이랑 세리는 나랑 같이 탄약고로 간다. 혁이랑 나머지 인원은 내무실 돌면서 총기 확보하고 생활관 일 층에 상황실 들러서 무전기 다 확보해. 내부 지도도 있으면 챙겨오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유인조는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부대 밖에서 철망을 돌면서 소음을 내. 부대 좀비들을 이렇게 시계 방향으로 몰아간 다음에 이 지점.”
요한이 사각형으로 그려 놓은 부대 약도의 모서리를 가리켰다.
“여기서 몇 발의 사격을 한 다음에 바로 뒤쪽 산으로 빠져. 너무 무리하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흩어져서 쉘터로 각자 복귀해.”
“라져.”
“생활관이랑 탄약고는 반대편이니 들어가자마자 따로 움직인다. 혁이는 최대한 총기 챙겨서 여기, 북쪽 보급창고에서 합류한다. 최대한 어그로 끌지 말고, 근처에 있는 좀비들만 죽이면서 이동해. 한 번에 다 못 옮길 수도 있으니까.”
만약 총기나 탄약을 남겨 두고 갈 경우를 대비해서 그것들을 지킬 좀비도 필요했다. 이곳의 물자들은 온전히 제 것이어야만 했다.
작전 시작과 동시에 스위퍼 조가 부대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좀비들의 시선이 잘 끌리지 않았는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총소리가 들려왔다.
부대 바깥에 있던 좀비들까지도 시선을 끄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개미 떼처럼 검은 점조직이 한 곳을 따라 움직였다.
“스위퍼, 바깥쪽에서도 좀비들 붙는다. 상황은 좀 어때?”
-빡세. 대장을 잘못 만났나 고민 중이야.
“여유 있군.”
-빡세다니까······.
요한이 무전을 뚝 끊었다.
막다른 길도 없고, 좀비들이 갑자기 튀어나올 일도 없으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터다.
마지막에 몰린 좀비들을 따돌리는 것만 집중해서 하면 된다. 나름대로 생존에 일가견이 있는 인원만 추려서 보낸 거다.
그들은 알아서 잘해주리라.
“우리도 출발하자.”
열한 명의 사람들이 부대로 움직였다. 부대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수색조가 진입하자마자 위병소에서 다수의 좀비가 쏟아져 나왔다.
“거기 뒤쪽, 정문 닫아.”
요한의 지시에 혁의 대학 동기, 재희와 명진이 철문을 닫았다. 그 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쏟아지는 좀비를 쓰러트렸다. 위병소 좀비들을 모두 처리한 후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대차는 총 다섯 개. 두 개는 혁이 일행이 가져가서 하나엔 총기를, 하나에는 보급품을 담는다. 그리고 요한 일행이 가져가는 세 개에는 모두 탄약을 담는다.
드르륵, 드르륵.
대차 끄는 소리만 부대 안을 울렸다. 남아있던 좀비들이 여기저기서 대가리를 내밀었다.
한 손으로는 대차를 끌면서 한 손으로 좀비를 상대해야 했지만, 스위퍼 조가 미끼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는지 전진을 방해받을 정도의 많은 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전투가 익숙하지 않은 옹 상병이 고전할 때마다 세리의 거버 브로드컷 마세티가 휙휙, 허공을 갈랐다. 요한의 쉘터에서 챙긴 그녀의 신무기였다.
보자마자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나 어쨌다나.
요한 일행은 금세 탄약고 앞에 도착했다. 탄약고 자물쇠를 감싸고 있는 납봉이 그대로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일찌감치 무너진 부대였다. 군부대 내에서부터 감염이 진행돼서 탄약 분배도 제대로 못 해보고 무너졌으리라.
한국 군부대는 생각보다 실탄 보급 절차가 까다로운 편인 만큼 초창기에 재빠르게 반응을 못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에 민간인들이 이곳을 탈환하려 했겠지만, 납봉이 그대로 있다면 전부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개미지옥이었군.’
좀비의 습성에 대해 어지간한 이해도가 있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렵고, 시도해도 대부분 자살과 다름없었으리라.
깡! 낭낭한 쇳소리와 함께 탄약고를 잠그고 있던 자물쇠가 떨어져 나갔다. 탄약고 안에는 각종 탄약, 화약 물품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나무 팔레트가 깔려있었고, 그 위로 직사각형 모양의 철제 상자가 가득 차 있었다. 요한이 가장 앞에 있던 상자를 꺼내 양옆의 고정쇠를 힘껏 내렸다.
딸깍,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린 상자 안쪽에는 실탄이 가득했고, 안쪽으로 밀실 공간이 하나 더 있었다.
세리가 탄약고를 가득 메운 상자들을 보며 감탄했다.
“우와, 이게 다 몇 개야?”
“여기가 부천시 열 개 부대 사격장이지 말입니다.”
요한도 솔직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로또 맞았네.”
말 그대로였다. 이 정도 화력이라면··· 서생연이 아니라 서생연 할아버지가 와도 한 수 접어주지 않을까. 웬만한 좀비 웨이브에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상병, 원래 후방 부대 탄약고에도 수류탄이 있어?”
“탄약고마다 기본 구비 체크리스트가 있지 말입니다. 여기는 케이 넷공공인데, 요새는 넷하나삼으로 많이 씁니다.”
“그렇게 설명해 봐야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몰라. 그나저나 이 정도로 많은 탄약을 가지고도 걸어 다니는 좀비 따위에 부대들이 무너지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초기 혼란기만 잘 넘기면, 그 이후부터는 생각보다 미시적 부대들의 저항은 끈질기다.
몇몇 지방의 부대들은 작은 지역 하나를 수복한 사례도 있었으니까. 요한이 여덟 번째로 합류했던 캠프인 부대가 그랬다.
그곳은 세 번의 좀비 웨이브를 막아냈던 부대였다.
“수류탄, 클레이모어, 5.56㎜짜리 탄약만 챙기면 되겠다. 무거우니까 옮길 때 허리 조심하고.”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엄살이야.”
땀을 뻘뻘 흘리며 휴식을 외치는 옹 상병을 보며 세리가 혀를 찼다. 그녀는 보초 역할을 옹 상병과 바꾸고 직접 탄통을 성큼성큼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약했다.
세리는 탄통 옮기기 작업 시작 20분 만에 허리를 붙잡고 퍼져버렸고 결국, 세리를 보초로 세우고 다시 요한과 옹 상병이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형님, 20mm짜리가 생각보다 많은데, 꼭 5mm짜리만 실어야 합니까?”
“어차피 들고 갈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좀 더 범용적인 탄환을 들고 가는 게 좋아.”
“아아.”
“좀 쉬었다가 할까.”
“예. 아이고. 탄통 옮기기 이제 안 할 줄 알았는데······.”
상병의 자조 섞인 혼잣말에 요한이 피식 웃었다. 자신도 현역 시절 수없이 날랐던 게 탄통인 만큼, 그의 구시렁거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예비군도 끝난 마당에 이러고 있다.”
“헤헤, 형님은 어느 부대 나오셨습니까?”
“공군 대공포.”
“와, 공군 공부 잘하는 사람들 가는 데 아닙니까? 공부 좀 하셨나 봅니다.”
“아니, 미달이었어.”
그리고 지금은 후회 중이야. 전차부대 같은 델 갔었어야 했는데 하고.
요한이 숨을 고르며 탄통 위에 걸터앉았다. 때마침, 혁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형, 나 혁인데. 총기 거의 꽉 채웠어.
“어, 수고했다. 여긴 좀 오래 걸릴 듯하니까, 와서 좀 도와줘야겠어. 그럼 탄약 챙기는 건 모여서 한꺼번에 하고 일단 보급창고에서 보자.”
-알겠어.
요한은 무전기를 왼쪽 어깨에 꽂아두고는 옹 상병에게 말했다.
“여긴 아무래도 다 같이 해야겠다. 일단 보급창고부터 다녀오자.”
“옛슴다.”
요한은 탄약을 꺼내 예비 탄창을 만들고서는 세리와 옹 상병에게 다섯 개씩 건넸다. 옹 상병은 자신의 소총을 제 몸처럼 붙들고 있었고, 세리도 제압한 군인 좀비로부터 소총 하나를 받은 상태였다.
소총을 멘 세리가 권총보다 무겁다며 볼멘소리를 하긴 했지만, 요한은 꿋꿋하게 그녀에게 장전, 조준, 발사하는 법을 가르쳤다. 소총 사용법은 반드시 익혀둬야 했다.
요한 일행이 막 출발하려던 찰나, 다시 혁에게서 무전이 왔다.
-형, 나 보급창고 앞인데, 빨리 와 봐야 할 것 같아.
혁의 말을 듣고 서둘러 도착한 보급창고 앞에는 좀비 한 떼거리가 몰려 있었다. 마치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하다. 얼추 눈대중으로만 봐도 이, 삼백은 되어 보이는 수.
창고 건물이 있는 곳은 주변보다 지대가 살짝 낮은 곳이었다. 가파르진 않았지만 올라가다 보면 절로 허리가 숙여지는 정도의 경사였다. 이것 때문인가, 요한이 확신 없는 추측을 했다.
“어, 형.”
혁이가 요한을 보자마자 손짓했다. 혁 일행은 보급창고 앞쪽 건물 뒤쪽에 몸을 숨긴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대차 하나에는 K-2 소총이 가득 담겨 있다.
“이쪽에만 아직도 좀비가 이렇게 많아. 어떻게 그냥, 후퇴할까? 아니면 총알 가져와서 싹 갈겨버릴까?”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두 개 다 요한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전투식량은 장기간 보관하기 아주 좋은 고영양식이고, 지금은 눈앞의 식량을 두고 돌아갈 만큼 한가로운 시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화기로 쓸어버리는 것은 더 곤란했다. 예비 탄약의 문제라기보단 소음의 문제다. 여기서 사격파티를 벌였다간 기껏 몰아 놓은 좀비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혹시 몰라서 챙겨두길 잘했네. 대차 하나는 여기에 두고, 빈 차만 끌고 들어가자.”
“저길 들어간다고? 어떻게?”
혁은 요한이 다시 한번 인원을 나눌 생각인가 싶었지만, 그가 배낭에서 푸르스름한 물체 세 개를 꺼내는 걸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훈련용 수류탄이었다.
“이 정도면 어그로 끌기 딱 적당하지.”
요한이 잠시 대기를 지시한 후 훈련용 수류탄을 반대 방향으로 던졌다. 30m쯤 날아간 수류탄이 작은 소음과 노란 연기를 내뿜으며 터졌다.
딱 국지적으로 어그로 끌기에 좋은 소리였다. 좀비들이 소음이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요한이 기존보다 더 멀리 수류탄 두 개를 연속으로 던졌다.
좀비들이 진흙 터지는 소리를 따라 우르르 빠져나갔다.
수신호에 따라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챙겨온 빠루를 이용해 잠근 문을 열자마자 내부의 악취가 훅 풍겨왔다. 사람들이 동시에 코를 틀어막았다.
“이게 무슨 냄새······.”
지독한 악취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음식물 썩는 냄새 같기도, 오랫동안 절은 체취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요한에게 악취보다 더 놀라운 것은 문 건너 보급창고 안에 있는 세 명의 생존자의 존재였다. 보급창고 안에는 젊은 남성 세 명이 쭈그리듯 앉아 있었다.
‘생존자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