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말이 좋아 교제지 사실상 원나잇 요구나 다름없는 뉘앙스였다. 거절했더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보급품을 점점 적게 보내준다고.
특히나 수색조를 아직 어려워하는 캠프였고, 그나마 말을 붙여볼 만한 게 세리여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한다고 했다.
“그 자식이 그렇게 말을 했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의 뚜껑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들이 좋아 떡을 치든 연애를 하든 그건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하필이면 추파를 던지고 있는 남자가 일밖에 모르는 워커홀릭에 목석같은 남자라서 연애에 ‘연’자도 진행되지 않는 일방통행인 건 불만이었지만, 남의 연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원나잇을 대가로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도 오케이였다. 전적도 있는 데다가 사상 자체가 자유분방한 그녀였으니까. 본인들끼리 좋다는데 뭐.
하지만 수색조라는 힘을 이용해서 강압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그건 폭력과 다를 바 없었다.
세리는 곧장 물건을 보급하고 있는 창고로 달려가 창고 문을 쾅! 하고 세게 걷어찼다.
“아, 깜짝이야. 뭐야?”
씩씩거리며 들어온 세리의 기세에 사람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하진이 ‘무슨 일이야?’라고 묻자 정환이 ‘모르겠어요, 빡 돈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
세리가 천천히 진수에게 다가가 해사하게 웃으며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왜, 왜 이러세요?”
“진수야.”
“···네.”
“고추 잘리고 싶어?”
세리의 웃음은 섬뜩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나?”
“몰라서 물어, 이-”
세리는 뒷말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무전기에서 요한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수색조 전원 지금 바로 캠프로 복귀할 것.
전례 없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필시 무슨 변고가 생긴 게 분명했다.
“너, 가서 보자.”
세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진수의 옷깃을 놓으며 칫, 헛바람을 낸 뒤 요한에게 무전을 쳤다.
“오빠, 나 세리야. 아직 물자 보급이 다 안 끝났는데, 그냥 복귀해?”
- 부사수들한테 맡기고 사수들은 전부 복귀해.
“알겠어. 수색 1조 복귀해요.”
세리는 동석, 정환과 함께 수색조 캠프로 복귀했다. 캠프의 1층, 회의실에는 혁이를 제외한 모든 사수급 수색 조원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다. 뒤늦게 들어온 세리가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다 모였으니 긴급회의 시작한다.”
요한이 빠른 속도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수색 나간 혁이와 2조가 붙잡혔어.”
“붙잡혀? 누구한테?”
요한의 말에 하진이 당황하며 반문했다. 정의 바보와 의리 바보라 죽이 잘 맞아 최근 제법 같이 붙어 다녔던 둘이었다.
“놈들의 캠프는 굴포천역 근처 어울림 교회. 인원은 약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사이로 보이고, 정확한 전력과 의도는 알 수 없음. 이번에 혁과 함께 갔던 2조의 두 명이 돌아왔어. 그들 말에 의하면, 남은 네 명을 인질로 잡고 두 명은 풀어줬다더군.”
“그냥 풀어줬다고? 설마 우리 캠프를 알아내기 위해서··· 꼬리는 안 붙었나?”
“일단 듣자마자 주변을 뒤졌는데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어. 하지만 혹시 모르지.”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일부러 생존자를 풀어줬다면 자신들의 캠프 위치를 적에게 대놓고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슨 함정을 파고 있거나, 생존자들의 캠프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었다.
돌아온 두 명은 미행이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 몰래 따라붙어 캠프의 위치만 확인하고 곧바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멍청한··· 풀어줬다고 쫄래쫄래 캠프로 바로 기어 들어왔단 말인가?”
“어쩔 수 없지. 그들 입장에서는 한시 빨리 혁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어차피 부사수급 조원들에게는 기대치가 낮았다. 그들이 이런저런 상황까지 파악해서 행동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좀비들을 피해 무사히 복귀한 것만도 용한 일이다.
“붙잡혔다는 건 죽지는 않았다는 건데, 어쩌다가 붙잡힌 거지? 화력이 그만큼 센가?”
“처음엔 그냥 생존자 그룹인 줄 알았다더군. 생각보다 캠프 관리도 잘 되어 있고 사람들도 희망차 보이는 분위기라서 방심한 모양이야. 환영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전부 잠들었고, 깨어나 보니 묶여 있었다고. 마실 물에 뭐라도 탄 모양이지.”
자리에 앉은 조원들이 안타까움에 침음 섞인 탄식을 냈다.
하필이면 그들을 만난 게 사람 좋은 혁이여서. 그들을 보자마자 뛸 듯이 기뻐했을 텐데.
“한 가지 더. 돌아온 조원들이 말하길, 그들의 리더를 ‘메시아’ 라고 부른다던데.”
“오우, 사이비 종교집단까지 등장했네?”
사이비 종교집단. 스위퍼의 말이 맞을 것이다.
회귀 전에도 공포와 희망을 이용한 사이비 종교집단이 곳곳에서 성행했었다. 아닌 말로, 종교는 사람들을 통제하기에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니까.
“맹목적인 수준이라더군.”
“골치 아프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 종교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단순히 종교만으로 사람들을 맹목적이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한 카리스마나 수완이 뒤받쳐 주어야만 하는 것.
만약 생환자들의 말처럼 그 집단의 믿음이 맹목적인 수준이라면, 캠프 리더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공포, 또는 믿음, 또는 희망. 근원이 어떤 종류이든 맹목적인 집단은 상당히 까다롭다.
“그래서 형씨, 이제 어쩌게?”
스위퍼의 물음에 요한이 수색조 사수급 조원들을 훑어보았다.
“의견을 들어보지.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의 입에서 의견을 듣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대부분 중요한 결정은 요한이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따르는 방향으로 진행됐었으니까.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있자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세리였다.
“당연히 구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해.”
“저도요.”
세리의 말에 정환이 동의했다. 하진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손을 들었다.
“스위퍼는?”
“의견은 아니고 걱정인데. 일부러 보란 듯이 함정을 파둔 느낌이 나잖아.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아, 구하지 말자는 건 아니야. 근데 몇 명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내는 건 뭐랄까······.”
스위퍼는 요한을 흘깃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대장 형씨가 바라는 방향은 아닐 것 같아서 말이지.”
그의 말에 대부분의 사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로 붙잡히느니 그냥 혀 깨물고 죽으라고 말하는 요한이었다. 인질을 구하려면 캠프 전체가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그런 일을 방지하자고 누차 강조하기도 했다.
요한이 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더라도 사실 누구도 반박할 수는 없는 상황.
“게다가 한 가지 공유해줄 게 있어. 대장 형씨의 지시로 굴포천에 갔다 왔는데, 강물이 완전히 썩었어. 똥물이더라고. 식수는 고사하고 용수로도 못 써.”
“얼마나 더럽길래?”
“좀비 시체가 물에 둥둥 떠다니고, 오물인지 내장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덩어리들이 가득해. 몸에 닿기만 해도 감염될 것 같은 느낌? 물이야 지난번에 원미소방서에서 일차적으로 확보하긴 했지만, 얼마 못 버텨.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해. 적들에게 위치까지 노출됐으니 결정은 빠를수록 좋지.”
그의 말은 혁을 버리고 이사하자는 말에 가까웠다. 하진이 짐짓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그에게 반문했다.
“혁을 모른 체하자고?”
“주장은 아니야. 상황 공유일 뿐이지. 나야 뭐, 대장 형씨가 하자는 대로 하거든. 우리가 언제 형씨한테 이래라저래라 했어? 까라면 까는 거지.”
요한은 스위퍼를 뚫어지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이 와중에 그나마 가장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역시 그뿐이었다.
“옹 상병이랑, 동석은?”
“저는 잘 모르겠지 말입니다‧······.”
“조장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잠깐.”
스위퍼의 말로 의견이 모이는 분위기가 되자 하진이 끼어들었다.
“혁이 조의 두 명이 있잖아. 자기네 조원들이 붙잡혀 있는데도 모른 척하면 그들이 캠프 내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다닐지도 몰라. 사기를 위해서라도 동료는 구해야 한다고 본다.”
하진의 말을 끝으로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결국은 요한이 결정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결정을 하든 그대로 따르리라는 것도. 몇 분의 침묵 끝에 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더 할 말은?”
요한의 표정은 평온했다. 동료가 위기에 빠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잔잔한 수면처럼 냉정한 얼굴이었다.
“없으면 내 결정을 이야기하지.”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굴포천역으로 간다.”
요한의 결정에 몇몇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크게 동요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뿐.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어. 우리의 주목표는 2조 구출이 아니야.”
“그럼?”
“캠프를 건드린 것에 대한 응징이 1순위다. 구출이 2순위고. 만약 놈들이 혁이 일행을 인질로 삼으면 인질을 포기하더라도 놈들을 섬멸한다. 만장일치로 동의하면 출발하지. 한 명이라도 거절하면 가지 않아.”
단순히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면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캠프가 노출된 상황이었다.
놈들이 캠프에 어떤 위협을 가하기 전에 선제 타격해야 했다.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합리적인 판단이다.
일행을 구출하기 위해 그들의 안위를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전부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정말 그들을 구출하고 싶으면 보다 확실한 각오가 필요했다.
“반대하는 사람?”
반대는 없었다.
“좋아. 이사는 지금 고려할 문제는 아니니 이후에 생각해보고 인원을 나누지. 동석이 막내 둘 데리고 캠프를 지켜.”
“예.”
“잠깐만,”
세리가 끼어들었다.
“막내는 안 돼. 오늘 파크타운에서 소란이 있었어.”
“무슨 소란?”
“진수 그 자식이 수색조 권한을 남용해서 수희 언니한테 몸을 요구했어. 그냥 남겨 놓고 가면 또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처벌이 필요해.”
세리의 말에 요한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이 빌어먹을 캠프는 정말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차라리 죄질이 더럽기라도 했으면 본보기로 일벌백계하기도 쉬울 텐데. 처벌하기 모호한 수준의 사건들이라 더 골치가 아팠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진짜로 다 뒤집어엎어 버릴까.
“신고는 본인이 한 거고?”
“응.”
“진위는?”
“무슨 진위?”
“증거나 증인은 있냐고.”
“그건 없지만, 언니가 왜 거짓말을 했겠어. 그럴 이유가 없잖아.”
흐음, 요한이 볼을 스치듯 건드렸다. 인상만으로 선입견을 품으면 안 되겠지만, 수희와 진수의 인상만 놓고 봤을 땐 둘 다 무언갈 꾸밀 만한 인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진수는 파크타운 캠프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수색조에 합류한 인물.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다소 위화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