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요한은 우선 결정을 보류했다. 전부 사살하는 것을 보류한 건 마음이 흔들렸다기보다는 첫 번째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작은 의구심 하나를 파악해 유약해진 마음을 다잡는 확신을 더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다른 쓸모를 찾기 위해서였다.
광신도들을 통해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이들 또한 하나의 패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이미 카드는 손에 들어왔으니 더 신중하게 고민하고 싶었다.
“일단 캠프를 좀 둘러보고 결정하지요.”
“거참 신중한 애송이일세.”
“스위퍼, 하진, 혁. 따라와. 나머지 사람들은 인질들 몸수색하고 대기.”
요한은 세 사람을 호명했다. 정미와 노인이 그들의 인질이자 방패였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여야 하는 만큼 최정예 구성원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들의 캠프를 방문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함은 아니었다. 수색의 목적이 가장 컸다. 눈으로 확인하고, 조사하다 보면 분명히 무언가가 걸리기 마련이다.
“지금 손님들이랑 회관으로 갈 테니 쓸데없이 움직이지 말고 자리 지켜 자식들아.”
노인을 시켜 회관에서 대기하고 있는 잔당들에게 무전을 치게 한 후 일행은 다시 한번 좀비 떼를 건넜다. 요한은 직접 노인을 감시했고, 세 사람이 길을 뚫었다.
좀비의 수는 여전히 득실득실했으나 이미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이들의 장해는 되지 못했다.
세 사람의 전투를 보며 노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부하들이 잘 싸우는군. 하나같이 유능해.”
“부하가 아닙니다.”
“아니긴, 완전 부하 다루듯이 하드만. 아무튼. 제법이야. 아까 싸움도 그랬고. 갑자기 연막탄이 터져서 적잖이 당황했다고. 물론 급작스러운 기습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겼을 거야. 설마 생존자들을 미끼로 밀어 넣고 매복을 파악해서 습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 부하들의 유능함도 유능함이지만 아주 좋은 전략이었어.”
“여성회관 안에는 몇 명이 잠복해 있습니까.”
“어이, 사람이 말하면 좀 들으라고. 대화라는 건 주고받는 거잖아, 안 그래?”
“몇 명이 대기 중입니까.”
“니미- 네 똥 굵다, 그래. 회관 안에는 세 명이 대기 중이야.”
요한은 그의 대답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혀를 끌끌 차고서는 다시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훈련된 생존자들이다. 탐이 날 만큼.
특히나 자신을 제압했던 저 스위퍼라는 인간은 물건이었다. 본대가 대기하고 있던 곳까지 빠른 속도로 다가와 연막탄을 뿌리고 곧바로 자신을 인질로 잡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헤드인 걸 알았던 것처럼. 붙잡힌 상태에서 저항하려다 부하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저격에 변변한 반항도 못 하고 죽었다.
회관을 감시하기 위해 통유리 앞에 서 있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설마 저격까지 있을 줄은.
이 정도로 강하고 훈련된 집단은 처음 봤기에 적대감보다 호감이 먼저 일었다.
죽은 부하들에겐 미안하지만, 그건 임무 중에 일어난 사고다. 따지고 보면 교통사고나 다름없다.
교통사고로 부하가 죽었다고 가해자를 찾아가 복수한답시고 차로 들이박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심지어 쌍방과실이다. 안타까움은 있었으나 복수해야 한다는 감정은 그에겐 사사롭고 치졸한 감정이었다. 세 사람이 죽고 자신이 붙잡히지 않았으면 죽는 건 그쪽 사람들이었을 테니.
“도착했어요.”
요한 일행은 여성회관으로 들어왔다. 회관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와 철책 안쪽으로는 텃밭도 여럿 개간되어 있었고 마당 한쪽에는 큰 닭장이 있었다.
“별관은 새로 들어온 생존자들을 격리하는 곳이고, 본관 뒤쪽으로 기존 회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예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지나다니면서 정미 일행을 본 아낙들이 ‘안녕하세요, 협회장님.’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얼굴에는 화색이 보였다.
“그냥 호칭일 뿐이에요. 민망하네요.”
정미는 제 호칭이 쑥스러운지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요한 일행은 그보다 살아 푸드득 움직이는 닭에 더 관심이 갔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노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 치킨 한 마리가 사람 목숨 한 명 값이지. 믿어져? 근데 뽁실 아지매 치킨 맛을 한 번 보면 목숨을 걸게 된다니까.”
노인의 실없는 말에 꼬박꼬박 웃어 주며 정미는 회관 구석구석을 요한에게 안내했다. 마치 자신이 일구어놓은 터전을 자랑이라도 하듯,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요한은 창고에 쌓인 쌀을 보고선 한 차례 더 놀랐다. 센터 차원에서 사회 약자계층을 위한 복지의 일환으로 사용하려 했던 거라는 정미의 설명이 이어졌다.
정미가 이 센터와 어떤 접점이 있는지는 몰라도, 좋은 캠프를 골랐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요한은 가감 없이 소감을 말했다.
“잘 유지되는 캠프군요. 훌륭합니다.”
정미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요한은 그녀의 반응을 유심하게 살폈다.
자신에게는 3년의 기억이 더해져 색채는 옅었지만, 경성실업에 다닐 때까지 그녀와는 상당히 친밀도 있는 관계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는 난리 이후에도 그녀와 일정 시간 함께했고, 다시 일행이 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었다.
요한이 그걸 예상하거나 기대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로서는 다를지도 몰랐다. 만약 그녀가 자신과의 합류를 기대하고 염원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든든한 우방이 되어줄 거다. 게다가 그녀는 목숨을 연명한 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종의 부채감이다.
“이제 별관도 마저 봐요. 별관에는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있어요. 참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제 처음 만난 사람들입니다. 캠프로 데려가긴 불안하고 내버려 두기엔 안쓰러워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이쪽으로 보낸 거죠.”
요한은 약간의 조미료를 더해 거짓 없이 설명했다. 굳이 숨길 필요도, 예쁘게 포장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 말이 그답다고 생각했는지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일주일 동안 합류했던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많아지게 돼서 고민 중인데······.”
“총인원이 몇 명이나 됩니까?”
“새로 합류한 사람들을 합치면 마흔 명 가까이 되네요.”
“스무 명 이상이 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한 달 좀 넘은 것 같아요.”
위험수위군. 정확하게 웨이브가 발생하는 시점은 요한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저 스무 명이라는 숫자는 안전 기준치니까. 아마 그 이상이어도 웨이브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흔 명은 다소 많았다. 확실하게 웨이브가 발생하는 수치다.
“캠프를 분리해야 할 겁니다. 최소 도보 15분 거리 이상 벌려서 캠프를 하나 더 만드세요. 한 캠프당 스무 명 이하가 안전합니다.”
“네? 네!”
“있는 사람들끼리 꾸려 나가도 충분해 보이는데 왜 굳이 위험한 짓을 계속하려는 겁니까?”
요한의 솔직한 질문에 정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알면, 아마 묻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는 질문의 요지를 완전히 잘못 파악했지만, 요한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피해자일 거라는 과한 망상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아포칼립스 시대의 인간은 포식자와 사냥감으로 나뉘기 마련이다.
가령 지금의 상황처럼.
요한은 생존자 무리에서 한 여성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차갑게 식고, 역설적으로 불같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일주일 내에 합류했다는 생존자들 사이에는 요한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희대의 악당 중 하나가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서울 생존 연합 간부이자, 개백정의 두 번째 첩.
그리고 ‘캠프 깨기’에 최적화된 최고의 악당.
독사 김설화가.
* * *
독사 김설화.
표독한 성격과 정반대의 청순가련한 외모로 먹잇감 캠프에 스며들어 캠프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캠프 깨기’에서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성적을 올리는 악당 중의 악당이다.
조금 전까지 침대에서 관계하던 상대라도 웃으며 주저 없이 소도를 목에 꽂아 넣으며, 어린아이와 노인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인다.
고간을 뜯어내거나 청산가리를 타는 등, 살해 방법도 각양각색으로 오로지 목표의 살해만을 위해 움직이는, 마치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암살자 같은 여자였다.
김설화는 서생연에 나중에 합류하는 인원이 아니다. 개백정과 난리 전부터 내연관계에 있던 여자로 알려져 거의 초창기부터 개백정과 함께 움직이는 인원. 즉, 이 여자는 이미 서생연에 합류 후에 이곳으로 온 거다.
서생연이 왔다.
그녀는 절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근처에서 그녀와 함께 이쪽으로 넘어온 하이에나들이 그 누런 이를 들이밀고 사냥감을 찾아 배회하고 있을 터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그 눈을 번뜩이고 있겠지.
원래대로라면 지금 시기에 서생연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지금은 놈들이 좀비 웨이브에 대해 슬슬 인지하고 막 규모를 키워나가는 시점일 테니까.
회귀의 시기가 3개월이 빨라지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요한이 알고 있던 대부분의 과거는 현재가 되어 비슷하게 흘러갔다.
추측건대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현대인의 특성상 생활 패턴이 거의 일정하기 때문이리라.
가령, 회귀 전에도 정환은 마트에서 일하고 있었고, 회귀 후에도 마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혁과 건은 회귀 전에도 가장 먼저 마트를 향했고, 회귀 후에도 가장 먼저 마트를 향했다.
시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역장으로 움직이기 위해 두 번의 시도를 한 것도 과거와 동일하게 흘러갔다. 마치 순리에 따르듯이.
시기로 인한 소수의 변화는 있었지만, 대부분 과거의 흐름을 따라갔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요한이 알고 있는 부분에서는 그랬다.
개백정도 여전히 서생연을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 ‘서생연’이 인천으로 들어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들은 서울을 벗어나면 안 됐다.
그런데 대체 왜? 무엇이 나비효과가 되어서?
요한의 머릿속에 두 가지 가설이 세워졌다.
서생연과 연관되어 크게 변한 것이라면 백종수가 죽은 것. 하지만 그게 원인은 아니리라.
오히려 그의 죽음은 서생연의 확장과 이동 시기를 늦추었으면 늦추었지 빨라지게 할 리가 없다.
또 다른 과거와 달라진 역사.
‘김정미. 당신이군.’
혼란 초기에 요한은 원래대로라면 서울에서 혼란을 맞이해야 할 정미를 구해 인천으로 들어오도록 도왔다.
게다가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가장 중요한 웨이브에 대한 정보도 줬다. 그게 트리거가 된 거다.
자신이 직접 미래를 바꾼 것은 마트 캠프 인원을 구한 게 처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미를 도움으로써 원래는 죽었거나 서울에 있어야 할 그녀가 인천으로 들어왔고, 살아남아 캠프를 구축했고, 방송을 통해 서생연을 불러들였다. 정미와 엮인 순간부터 미래는 바뀌어온 것이다.
그녀를 살린 걸 후회해야 하느냐?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요한은 웃었다. 쾌재를 불렀다.
백종수가 죽어 서생연의 팔 하나가 잘린 시점에, 김설화까지 제 손아귀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이 잘 꾸려진 캠프를 잡아먹을 희망찬 생각으로 가득 찬 독사가.
지금 개백정은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 그리고 아직 서생연의 세력이 확실하게 자리 잡기 전이다.
기백 명에 가까운 무력집단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지금이라면 그저 함정에 빠진 하나의 캠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복수, 그리고 미래를 위한 도약의 판이 깔렸다.
서생연의 씨를 자르고 싹 쓸어버릴 절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찬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