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 *
지금부터는 속도전이다.
서생연이 당장은 움직이지 않겠지만, 전력이 약하다고 판단한 순간 곧장 캠프를 잡아먹으려고 들 것이다. 약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잔인해지는 놈들이니.
김설화가 움직이기 전에 그녀의 신병을 확보한 후, 얼마나 안전하고 완벽하게 함정을 파느냐가 관건이었다. 여유는 있었지만, 굳이 여유를 부릴 이유는 없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김설화의 존재와 서생연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두 캠프와 힘을 합쳐 서생연에 대항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김설화만 빼돌려 함정을 파고 두 캠프를 미끼로 던진 후 캠프를 잡아먹으려는 서생연을 잡아먹는 것.
대답은 당연히 후자다.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혹시 살아남는다면 살아남은 생존자들만 그대로 흡수하면 그걸로 됐다.
남은 사람들은 요한 일행이 세 명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서생연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에 더 집중할 거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고, 지나간 고통보다 눈앞에 닥친 동아줄을 잡는 습성이 있으니까. 빚은 충분히 지울 수 있다.
남은 사람들이 요한을 적대시할 이유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무조건 살려야 하는 인원은 노인이다. 그냥 미끼로 던지기는 쉬우나, 그 과정에서 노인이 죽어서는 안 됐다.
요한은 노인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작전 방향을 다시 잡았다. 노인을 제외한 다른 생존자들을 미끼로 던지는 전략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스쳐 갔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 잔인한 작전을 향하는 데 일말의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 놀랄 만큼이나.
때로는 마모된 인간성이 점점 돌아오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선택의 순간에선 한없이 매정해지는 자신이 낯설었다.
선택해야 할 문제는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두 캠프 몰래 김설화를 확보하려면 수색 조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그들에도 어느 정도 사실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누구에게 어디까지 공유할 것인가.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요한 씨, 기분 좋은 일이 있어 보여요.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서생연을 잡아먹을 생각에 들뜬 나머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정미가 이유 없이 웃고 있는 요한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요한은 상념을 멈추고 손을 휘휘 내저은 뒤 적당한 핑곗거리를 댔다.
“아닙니다. 정미 씨를 다시 만나 기쁘고 또 이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 걸 보니 보람차서요.”
“얼씨구. 염병들 떠네.”
요한의 말에 정미는 다시 한번 기쁜 표정으로 볼을 붉혔고, 노인은 한 마디 던지며 툴툴거렸다.
요한은 정미와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만하면 캠프를 둘러보는 것은 됐다. 내부 구조도 대부분 파악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정리됐으니.
“잠깐 노인분과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요한이 자신들의 처우를 결정했다고 생각했는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로 안내했다. 요한은 회의실에 들어가기 직전 조원들에게 다음 행동을 지시했다.
“스위퍼는 문 앞에서 기다려주고, 두 사람은 밖에서 수갑 하나만 챙겨와.”
“수갑?”
“우리가 오면서 잡은 좀비 중에 경찰복을 입은 좀비가 몇 있었어. 잘 뒤져보면 수갑이 있을 거야. 열쇠도 챙겨오고.”
“좀비 시체를 뒤지는 건 찝찝한데.”
혁이 살짝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곧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건물 밖으로 나갔다.
회의실에 들어온 요한은 정미도 내보냈다. 회의실 안에는 요한과 노인만이 남게 됐다.
“생각이 좀 바뀌었나?”
“네.”
“좋은 소식이군.”
“노인분께서 이곳과 거래했다는 사실, 그리고 약속과 신뢰를 중시하신다는 건 믿겠습니다.”
“그럼, 그럼.”
노인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요한의 말이 이어졌다.
“모든 인질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너, 좋은 새끼구나.”
“단, 목숨에 대한 값을 내셔야 합니다.”
“아니, 니미 시불탱.”
노인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다 잘 풀리리라고 생각했지만, 요한이 제안한 건 새로운 거래였다.
“이 캠프의 안전을 대가로 정보를 받으셨다고 하셨죠, 그럼 노인분과 부하들의 목숨값으로는 무엇을 내시겠습니까?”
가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폭력 대신 거래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목숨은 요한 일행이 쥐고 있었으니 그들 방식대로라면 마땅히 목숨값을 받아 내야 했다.
“너희 캠프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이면 어때?”
“기각합니다.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희 캠프가 위험할 일이 없으니까요. 애초에 저희 캠프랑 붙어서 이길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온 조원은 그저 일부일 뿐입니다. 이후에 다시 싸워도 질 것 같지는 않네요.”
끄응, 노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샜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인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번 던져 본 거였다. 젊은 놈이 왜 이렇게 빡빡한지. 노인이 한참을 요한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군.”
“의뢰를 하겠습니다.”
“무슨 의뢰?”
“근처에 저희와 적대관계에 있는 한 캠프가 있습니다. 전투가 불가피한 상황이고요.”
음, 노인이 대충 이어질 말을 예상한 듯 하얗게 센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의뢰 내용은 저희를 도와 그 캠프의 모든 생존자를 섬멸하는 것. 그리고 대가는 약 500kg가량의 잘 보존된 식량과 좀비에 대한 중요한 정보 세 가지. 그리고 인질들의 목숨입니다.”
그저 인질들의 목숨을 대가로 거래를 원하는 줄 알았는데, 추가적인 대가도 상당히 컸다. 노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눈앞의 청년은 계산이 확실한 자다. 거래하기로 결심한 이상 손해와 이익을 분명하게 계산하고 합리적인 제안을 한 것일 터.
“대가를 보니, 상당히 위험한 의뢰인가 봐?”
“아직은 적의 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더 죽을 수도 있겠지요.”
“좋아. 대신 품목을 하나 바꾸지.”
“말씀하세요.”
“좀비에 대한 정보는 됐어. 네 정보가 궁금하다. 너, 난리 전부터 좀비 웨이브에 대해 알고 있었지? 네가 뭐 하는 놈인지 말해.”
노인의 강퍅한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요한은 그의 눈빛을 물끄러미 받아주다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보통이 아닌 노인이다.
“저에 대한 정보는 값이 비쌉니다. 수지가 안 맞네요. 거래 품목 중 식량을 빼겠습니다. 추가로 질문할 수 있는 건 한 번뿐입니다.”
“니미럴. 안 해.”
“거래하시겠습니까?”
“선택지도 안 주고 선택하라고 하는 건가?”
“자존심을 지키고 죽는 선택지를 선택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내가 그런 멍청이로 보이나?”
“제 동생 중에서는 얄팍한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멍청이도 있습니다.”
“그 멍청이에게 모가지 간수 잘하라고 전해주게나.”
요한은 제 아픈 손가락인 혁이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노인은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담배를 물어 흰 연기를 뿜어냈다.
무엇을 고민하는지는 불명확했다. 자신에 대한 정보를 원하고 있는지도, 그게 아니라면 아예 새로운 제안을 하려고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렸다. 담배 두 개비를 연달아 태운 후 노인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담보로는 노인분을 잡겠습니다.”
“그 노인분이라는 호칭은 어떻게 좀 할 수 없어? 계집애처럼 굴지 말라고.”
“의뢰가 끝날 때까지는 노인분에 대한 처우가 다소 무례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 양해 부탁합니다.”
“네놈은 정말이지 지 할 말만 하는구나. 거래처에 대한 신뢰도 없고.”
“거래할 때는 고용주의 입맛에 맞추는 게 기본 아닙니까.”
“알겠어. 까다로운 고용주 새끼야.”
시나리오대로 첫 번째 계획이 끝났다. 노인은 담보라는 핑계로 자신들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하들은 사지로 내몰리겠지. 전멸하든, 몇 명이 살아남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 이후의 일이다.
요한은 노인을 방 안에 두고 수갑을 가지러 가기 위해 일어섰다. 방을 나가려는 찰나, 노인이 그를 붙잡았다.
“참.”
“······?”
“너희가 죽인 세 명에 대한 목숨값은 별도다.”
요한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 밖에는 스위퍼가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다리를 반쯤 꼬고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한 번 으쓱 들어 올렸다.
“꼬장꼬장한 늙은이네.”
“다 들렸나.”
“뭐, 둘 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말이지.”
그는 요한이 던진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여태까지 그는 요한의 행적을 고스란히 함께해 왔다.
그가 요한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이 없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이 대화를 듣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항상 그래왔다. 한없이 신뢰가 가고, 한없이 수상쩍을 만한 처세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제 선 안에 들인 사람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
“글쎄, 대장 형씨는 필요할 때 필요한 것만 딱딱 말해주는 타입이잖아. 언젠가 필요하면 말해주겠지.”
“그래.”
방긋방긋 웃는 스위퍼를 보며 요한이 마주 웃어 주었다.
부디 내 신뢰가 무너지는 일이 없기를.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 * *
요한은 조원들에게 한동안 회관 근처에서 머무를 것을 지시했다. 다음 싸움이 있을 거라는 건 얕은 수준으로만 공유했다.
스위퍼의 말대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공유해주는 것이 요한의 스타일이었기에, 더 꼬치꼬치 캐묻는 인원은 없었다.
노인은 부하들에게 거래 내용을 이야기했다. 대장이 담보로 잡힌다는 부분에서 발끈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이미 성사된 거래다, 이 개새끼들아.’라는 노인의 한 마디에 다들 조용해졌다.
어느 정도 결정이 되었다고 판단한 요한이 하진을 앞으로 내세웠다.
“노인분은 저와 함께 움직이면서 작전에 참여하실 겁니다. 그리고 용병 여러분은 우선 이 친구의 지시를 한동안 따라 주시면 됩니다. 이 친구가 노인분의 의사를 대신 전달해 줄 겁니다.”
“우린 다른 사람의 명령 따위 듣지 않아, 애송이 의뢰자 양반.”
철구라고 불렸던 흉터 사내가 반발했다. 아마도 그자가 이 무리의 이인자쯤 되는 사람인 듯했다.
“명령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저 노인분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별도로 여러분께 지시할 사항이 있으면 이 친구를 보내 내용을 전달할 겁니다.”
어차피 자신 일행 중 누군가 저들을 이끄는 것은 곤란했다. 일행은 한 명도 잃을 생각이 없었고, 그러려면 그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여주어야 했으니까.
요한의 말에 자신들을 존중해 준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용병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두 번째 계획까지 차근차근 풀렸다. 그리고 그날 밤, 세 번째 계획이 실행됐다.
어두운 밤, 어둠 속 거리를 두 사람의 인영이 헤쳐나갔다. 두 사람은 이 미터쯤 되는 담벼락을 손쉽게 넘고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목표는 별관 임시대피소.
타겟은 독사 김설화.
요한이 선택한 건 스위퍼 한 명이었다. 경계가 허술한 늦은 시각을 이용해 그녀를 제압하고, 납치한다. 그녀가 무서운 점은 무력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스위퍼의 등에는 커다란 자루 하나가 메어 있었다.
두 사람은 전등의 빛도 최소화한 채 기억을 의존해 더듬어 나갔다. 어둡다고는 해도 별빛이 있고 달빛이 있다. 게다가 내부 구조는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다시피 들어와 있다.
잠긴 문을 달그락거리며 여는 소리가 조심스럽다. 누군가 깨면 곤란했다.
별관 대피소 안에는 제법 많은 여자들이 있었고 내부가 어두워 누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이쯤에 사람이 있구나, 정도만 파악할 수 있었다.
요한은 침입자들의 습성을 떠올렸다. 아무리 위장을 한다고 한들, 타인에 대한 경계심은 당연한 것. 그녀는 가장 구석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을 거다.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여인은 두 명. 요한이 한 여인을 향해 천천히 손전등을 비췄다.
김설화가 아니었다. 다시 발길을 돌린 요한 일행이 나머지 한 여인을 향해 천천히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딸깍, 희미한 전등이 아주 찰나의 시간 점멸한다.
얼굴을 확인한 요한이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해 OK 사인을 냈다. 스위퍼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천천히 자루를 열었다.
그때, 김설화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번쩍거리며 벼락같이 스위퍼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