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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서바이벌-80화 (80/176)

<80화>

요한은 전자를 제안했지만, 스위퍼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들에게 어떤 방식이든 접촉하는 것은 변수가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혹시 그 아가씨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한다면 큰일 나지 않겠어?”

“한 마디 실수하면 바로 목숨이 날아가는 데 그렇진 않겠지.”

“그리고 어차피 놈들은 다시 올 거라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매복해서 잡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

“최대한 빨리 개백정을 끌어내야 해. 만약 우리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놈은 2차 선발대를 보내겠지. 그렇게 2차 선발대마저 죽으면 놈은 우리를 강한 적으로 인식하고 우선 세를 더 키운 다음 습격하려고 할 거야. 세를 불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놈이니만큼 시간을 줄수록 더 감당하기 어려워져.”

놈의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면 강해지지 절대 약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서울로 들어가 놈들을 기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적지에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놈들을 모른 척하고 캠프를 옮기는 게 나은 선택지일 것이다.

하지만 선발대마저 격파한 상황이니, 내일 당장에라도 추가적인 적이 등장할지도 모르는 상황. 요한은 결단을 내렸다.

이번에 놈을 반드시 홈그라운드로 끌어내서 끝장을 본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항상 눈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 쓰이던 역린을 제거할 것이다.

그들을 끝장내고 가장 큰 후환을 제거해야 일행의 미래가 탄탄해진다.

“흐음, 그럼 김설화에게 뭐라고 말하도록 하는 게 좋을까?”

“일단 선발대가 전멸했고, 이쪽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전하게 해야지. 추가병력을 요청하도록 말이야. 스물다섯 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게 하면 되겠군.”

“뭔가 어설픈데. 개백정이 직접 안 올 수도 있잖아.”

“놈은 과반수의 인원을 움직일 땐 무조건 자신이 직접 이끌어. 만약 스물다섯 명을 보내려면 남은 인원은 그보다 적게 되니, 무조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지.”

개백정은 자신의 부하가 자신보다 많은 무리를 이끌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 말인즉, 만약 과반수가 참여해야 하는 전투에는 반드시 그가 직접 진두지휘를 한다는 거였다.

“호오.”

“자, 다시 한번 놓치는 게 없는지, 변수는 없는지 확인하자.”

“그 사이에 인원이 늘어났을 변수는?”

“좋아. 고려하자. 최소 서른 명 이상을 불러내는 거로.”

인원이 너무 많아도 문제였다. 인원이 많을수록 전투의 난이도와 위험성은 높아질 테니까.

될 수 있으면 개백정을 포함한 가장 최소한의 인원으로 놈들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

전원이 움직일 일은 없을 거다. 어차피 그곳의 식민 캠프를 감시하려면 인원은 남아 있어야 할 터.

요한은 지도를 펼치고 최대 마흔 명의 적을 상정한 채 진입로를 그렸다.

“용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셀 수 없이 많지. 게다가 놈들은 바이크를 타고 움직여서 사실상 어떤 길이든 올 수 있다고 봐야 해. 하지만 가장 유력한 진입로는 이 두 군데야. 이곳으로 온다고 가정하면 가장 좋은 매복 장소는 여기랑 여기.”

요한이 붉은 펜으로 두 개의 선을 주욱 그은 후 두 개의 지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첫 번째 진입로는 벌말로. 올림픽대로에서 굴포천을 따라 쭉 내려오다 대로에서 상동을 지나면서 오는 길이다.

또 하나의 진입로는 부평 IC 사거리.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빠지면서 있는 곳. 요한 일행이 피살한 선발대들의 주둔지였던 곳이었다.

두 진입로를 지정한 것은 이동 속도와 편의성 때문이다. 일반적인 국도는 차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차보다 좀비들이 더 많다.

하지만 대로는 갓길이 넓어 이동이 편할 뿐만 아니라, 좀비가 나타나더라도 피하고 따돌리기 쉬웠다.

“이 두 군데에서 매복해서 남은 클레이모어를 전부 설치하고 급습해. 모든 화력을 집중한다. 탄약이고 뭐고 남기지 말고 마지막 싸움이라 생각하고 챙겨야지. 놈들이 오는 시간과 길만 알 수 있으면 아무리 변수가 많아도 이기는 싸움이야.”

스위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집단 간의 정보 차이가 현격했다. 전력은 비슷할지 몰라도 정보전에서 밀리면 사실상 이기는 건 불가능할 거였다.

두 사람은 개백정과의 대화를 여러 번 시뮬레이션한 뒤, 김설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한층 화색이 도는 얼굴로 라디에이터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스위퍼가 그녀를 깨웠다.

“안녕, 아가씨? 일어날 시간이야.”

“으음······.”

풍기는 피 냄새에 움찔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더니 숨을 푹 내쉬었다.

요한 일행이 이겼다는 사실에 안도한 한숨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서생연의 간부가 자신들이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

사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녀로서도 그들의 패배는 곧 말라 죽는 걸 의미했다. 이기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리라.

요한이 김설화의 옆에 무전기를 내려놓고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했던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지금부터 너는 개백정에게 무전을 할 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선발대가 전멸했다는 사실, 그리고 예상보다 이곳의 병력이 많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최소한 서른 명의 추가병력이 필요하다고 요청해.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잠시간 놀란 표정을 짓던 김설화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개백정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몇 명이나 있는지, 등등 질문을 했을 때 답변해야 하는 정석을 알려주며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모두 꼼꼼히 전달했다.

요한이 무전기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무전기 가까이에 바짝 다가갔다. 멈칫하는 손짓, 역시나 망설임이 보였다. 잠시 후 무전기의 기능 손잡이를 호출로 돌린 후, 송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몇 번의 호출과 조작 이후에 반대쪽에서 송신되는 듯한 지지직대는 노이즈가 들려왔다. 김설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설화다.”

-······잠시 대기.

무전기 너머로 낮고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다시 무전이 울리고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소 경쾌하지만 경박하지는 않은 색 진한 목소리다.

-오오! 마이 다알링, 잘 지냈어?

개백정의 목소리다. 요한은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저 목소리.

-네가 직접 웬일이야? 2조장은?

“조장이 당했어. 선발대는 전멸했고······.”

잠시간의 침묵 후, 개백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호.

“생각보다 여기 저항이 세. 추가로 사람을 보내줘야 할 것 같아.”

-그래? 몇 명이나 있는데?

“총 든 사람만 스무 명 넘게 있어. 서른 명은 보내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알았다.

“어, 언제쯤 보내줄 거야?”

-다시 연락하지. 기다려.

“알겠어.”

무전은 간단했다. 개백정은 상황에 대해 가타부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요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무용지물이 됐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요한은 인상을 쓰며 천천히 무전기를 내려놨다.

* * *

개백정은 웃으며 천천히 무전기를 내려놨다.

그는 마치 태초의 모습인 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상태였다. 전신에 흉터가 어지럽게 있었고 근육질의 몸에는 핏줄이 여기저기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개백정이 무전기를 내려놓자마자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무전기를 들고 가려던 사내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하, 재밌네.”

“네?”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양쪽 눈 옆에 얕은 주름을 자아내던 눈빛이 이내 크게 뜨이며 번뜩거렸다.

“독사 년이 배신했어.”

“김설화 님이··· 요?”

사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설화는 서생연의 간부이자 리더의 첩이 아니었던가.

“뭐, 협박이라도 당했나 보지. 야. 지겹다. 제대로 해 봐라.”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하라고.”

여인이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아니. 더 위.”

여인의 입술이 점점 올라갔다. 상냥한 듯 움직이던 입술이 쭉 올라가다가 끔찍한 흉터 바로 직전에 멈칫했다. 여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거기야.”

여인의 눈동자 앞에 놓인 것은 무언가에 물어뜯긴 상처였다. 그리고 그 상처가 좀비에게 물린 상처라는 것쯤은 이곳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뭐 해? 시작해.”

여인의 당황은 길지 않았다. 이미 학습된 충성은 일말의 거부감이나 공포, 반항심마저도 모두 앗아갔다. 여인이 그의 흉터를 천천히 훑었다. 개백정이 한동안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음미하더니 벌떡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좋아 그만. 일어나.”

여인이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요 앙큼한 년을 어떻게 하지?”

개백정이 웃으며 무전기를 툭툭 쳤다.

* * *

요한이 인상을 쓰며 무전기를 툭툭 쳤다.

아무래도 반응이 심상치 않다. 이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닌데. 절대 그렇게 만만한 자가 아니다. 고민하던 요한이 짧게 내뱉었다.

“개백정이 눈치챘군.”

“뭐?”

스위퍼와 김설화가 동시에 반문했다.

“김설화가 배신했다고 눈치챈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없어.”

“뭐? 어떻게?”

요한은 다시 한번 잠깐의 침묵 뒤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선발대를 끝장내기 전까지 선발대와 개백정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몰라. 만약 선발대가 김설화가 연락이 안 된다고 보고했다면···. 그 이후 김설화에게 선발대가 전멸했다고 연락을 받았으니, 아마 함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흠······.”

선발대가 전멸했는데도 김설화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곧바로 미심쩍음을 느낀 거다. 그렇게 느낄 줄 알고 여러 가지 핑곗거리를 준비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지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배신을 눈치챘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까지도 깨달았을 수도 있다.

그때, 무전기의 알림음이 울렸다. 김설화가 불안한 눈빛으로 요한을 바라봤고 요한은 받아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설화.

“으, 응?”

-옆에 있는 놈 바꿔.

김설화의 동공이 공포에 흔들렸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어지러웠다.

역시 요한의 예상대로였다. 후, 정말 몇 번이고 놀라게 하는군. 요한이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말해.”

-그래. 내게서 훔쳐간 년의 맛은 어떻던가?

무전기 너머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글쎄. 널 직접 죽이지 않으면 만족을 못 할 것 같은데. 싸움은 마무리해야지. 네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잖나. 직접 와라. 오지 않으면 이 여자의 사지를 찢어 좀비 밥으로 던져주지.”

-오, 친구. 강단이 대단한데.

“안 오면 우리가 가지.”

-하하, 어디서 개수작이야.

개백정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 여기 오면 내가 직접 네 뒤를 따먹고 내장을 파내 주지. 참, 그리고 이왕이면 그 배신자년의 최후를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면 좋겠어. 짜릿하고 흥분될 것 같거든. 어때, 카메라라도 보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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