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82화 (82/176)

<82화>

요한이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색 조원 한 명 한 명이 모두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준비를 위해 움직이려던 찰나, 혁이 손을 들었다.

“형, 그런데 가족재단과 용병단 캠프에도 이걸 말해줘야 하지 않아?”

요한이 의견을 낸 혁을 빤히 바라봤다. 녀석다운 의견이었다. 미끼로 쓰는 사람들에게 일신을 지킬 최소한의 정보는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의도는 물렁물렁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지적도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을 방패로 쓰려고 한다고 한들, 아무것도 모른 채 기습을 당하게 만들 순 없었다.

만약 매복이 허사로 돌아갈 경우, 그들은 곧바로 가족재단 캠프로 갈 거다. 그들은 요한 일행이 뒤를 잡아 줄 때까지 버텨야 한다. 무력하게 당해서는 곤란했다.

“좋아. 가서 적들의 잔당들이 올지도 모르니 경계를 강화하라고 말해줘.”

“응!”

“그리고 정보에 대한 대가로 PRC-999K 무전기 하나 받아 와라.”

“응?”

“왜, 뭐?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뭐 해? 빨리 갔다 와. 무전기 못 받으면 합류하지 마. 그냥 거기서 살아.”

“······형.”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활기찬 표정을 짓던 혁이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요한에게 떠밀리듯 쫓겨났다.

“더 질문 없지?”

“잠깐, 요한.”

하진이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응. 말해.”

“이번에도 믿는다.”

뜬금없는 말에 요한이 눈을 깜빡였다.

“실없는 소리는.”

“이전에도, 이번에도, 앞으로도 믿는다. 우리는 널 믿고 목숨을 맡긴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이젠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말해준다라. 무엇을?’이라고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한이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

알고 있었음에도 묻는다고 말해줄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도 묻지 않는 거일 뿐이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다면 말해주는 게 맞다. 제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너희들에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 너희가 믿든, 믿지 않든 이번 전투가 끝나면, 모두 설명해 주지.”

요한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러니 한 명도 죽지 말고 깔끔하게 이기자.”

* * *

정환은 빠르게 내달렸다. 요한이 데드라인으로 정한 시간은 두 시간. 두 시간 안에 모든 생존자를 수색조 캠프로 모아야 했다.

시간이 촉박하지는 않았다. 모여서 이동하는 시간이라 해봐야 30분에서 1시간이면 모두 끝날 시간이니까. 그럼에도 급해지는 마음에 정환은 달리면서도 계속해서 무전을 쳤다.

“여기는 정환입니다. 캠프 리더분들, 들리시면 응답해주세요.”

몇 번을 불러도 응답이 없던 무전은 외곽순환도로를 지날 즘 대답이 돌아왔다.

-어, 정환아. 서준이다.

-들립니다.

연이어 네 캠프에서 모두 응답이 들려왔다. 정환이 황급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지금 캠프로 가고 있는데요, 모든 생존자 한 명도 빠짐없이 바로 마트 앞으로 모여주세요.”

-전부 모이라고?

“네. 한 명도 빠짐없이요. 요한 형 지시예요.”

잠시의 침묵 후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약 삼십 분 후, 정환이 마트 앞으로 도착했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을 고르며 사람들을 훑었다.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전부라기엔 숫자가 부족했다. 파크타운 캠프의 생존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단지 마르코와 그의 호위 몇 명만이 나왔을 뿐이었다.

“다른 분들은요?”

“다들 뭔갈 하고 있어서, 무슨 일인지부터 알려달라고······.”

“시간이 없는데 무슨, 빨리 다 나오라고 하세요.”

길길이 뛰는 그를 박 노인이 진정시켰다.

“진정하게 정환 군. 모여 있으면 좀비 웨이브가 올 거라고 요한 군이 얘기하지 않았나.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주게.”

노인이 찬찬히 그를 다독이자 꾸물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초조해지는 마음이 다소 진정됐다. 그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정환이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밖으로 나간 수색조의 전투. 서울 생존자 연합의 존재. 그리고 그들이 지금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비쳤다.

“아니,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하고 다니시면 어떡합니까. 캠프 사람들이 모두 위험에 빠뜨리는 일 아닙니까. 조심하셨어야죠.”

마르코가 무신경한 말을 내뱉자 정환이 울컥 쏟아지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움찔한 마르코가 말을 돌렸다.

“그럼 물자들부터 빨리 옮겨야겠군요.”

“물자들 옮길 시간이 없어요. 수색캠프 안에 예비 물자들이 있으니 일단 빨리 파크타운 캠프 사람들 모여서 이동해요.”

“잠깐, 그 많은 물자를 전부 버리고 가겠다고요?”

“버리는 게 아니고요. 우선 사람들부터 대피하자는 거예요.”

“잠시만.”

마르코가 정환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고선 주변의 사람들과 숙덕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순 없어요.”

“요한 형의 명령이에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이동해야 합니다. 협조하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어요.”

“이보세요, 정환 씨!”

답답했다. 그들에게는 물자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들이 합류한 이후 캠프에 협조해온 것도, 경계선을 설치하는 데 기여한 것도 맞지만, 대부분의 물자는 요한과 수색조가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차라리 마트 안에서 농성하겠습니다. 저 많은 식량을 모두 약탈자들에게 넘길 수는-”

마르코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서준의 리볼버가 그의 얼굴을 겨냥하고 있었다. 서준은 마르코를 향해 쏘아붙였다.

“잔말 말고 이동해. 그렇게 지시한 이유가 있겠지. 우리가 누구 덕에 살아있는지 잊었냐? 다른 건 몰라도 요한의 말을 거부하는 건 용납 못 해.”

“지, 지금 총을 겨눴습니까?!”

서준이 총기를 겨냥하자 마르코의 주변 호위들도 그를 향해 총을 꺼내 들었다. 놀란 마트 캠프 경계병들도 연이어 총기를 꺼내 들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정환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진정하세요. 제발!”

정환이 빽 소리를 지르자 두 사람이 흠칫했다. 그는 명실공히 캠프의 주요 인사였다.

그가 캠프 내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요한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받고 있는지는 다들 잘 아는 바였다. 그럼에도 정환은 다정한 성격 탓에 늘 서글서글하게 사람을 대했고 누구나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조원이었다.

그가 저렇게 흥분한 상태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서준도 처음 봤다. 정환이 손수 마르코와 서준의 총구를 내리자 그 뒤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들도 하나둘 총구를 내렸다.

“여러분, 요한 형은 여러분 모두를 살리고 싶은 거예요. 지금 우리가 싸우는 사람들은 그냥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살인귀들이라고요. 당신들의 배를 찢고 강간하고 좀비들에게 던져 놓을 거라고요. 어차피 이곳이 발각되면 물자가 있어도 죽고 뺏겨요, 그리고 이곳이 발각되지 않으면 물자도 그대로 있을 거고요. 만약 물자를 모두 뺏겨도, 어차피 요한 형이 금방 다시 채워 놓을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입시다. 제발!”

정환의 간절한 음성에 마르코가 입술을 축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파크타운 캠프 사람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같이 가자. 도움이 필요할 거야.”

두 사람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파크타운 캠프를 뒤지며 흩어진 사람들을 모았다.

파크타운 캠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수희를 중심으로 모인 여성 생존자들은 정환과 말도 섞기 싫다는 표정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서준과 정환, 마르코가 합세해서 그들을 설득하고 나서야 하나둘 주섬주섬 이동할 준비를 했다. 한쪽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요한 형이 매정하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영아! 아영이는?”

“어, 아까 오전엔 있었는데?”

정환은 습관처럼 시곗바늘을 쳐다봤다.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고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도대체 왜 이렇게 꾸물대는 건지.

파크타운 캠프 생존자들의 인원을 확인했다. 총원 중 한 명이 비었다.

정환은 명부에 있는 사람의 이름과 명단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한 명이 빈다. 정환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르코에게 물었다.

“여기, 이 남은 분은 누구죠? 아영이라는 분, 어디에 계세요?”

“아영? 아영이가 없다고?”

마르코의 말에 캠프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정환도 아영이라는 여고생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었으나 워낙 존재감 없이 조용조용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던 생존자였다.

교사 캠프에서 지난번 인원 섞을 때 파크타운 캠프로 이동한 학생이었는데, 종적이 묘연했다.

‘시간은?’

시간을 보니 데드라인에서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불안했지만 여유가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지금 빨리 찾으면 될지도 모른다. 정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 명도 빠지면 안 돼.’

요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한 명도 빠지면 안 된다. 요한의 말은 그에겐 곧 법이었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여러분은 수색조 캠프로 이동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세요.”

정환이 사람들을 수색조 캠프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캠프 전체 인원이 모두 거주하기엔 좁은 공간이었지만, 불만을 받아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정환은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됩니다. 며칠 동안은 그냥 쥐죽은 듯이 산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전부 지하실로 내려가시고요. 서준 아저씨, 인솔을 부탁해요.”

“정환아, 너는?”

“아영이만 찾아서 금방 따라갈게요.”

정환이 굳은 표정으로 서준을 안심시켰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람들을 인솔해서 나갔다. 정환이 텅 빈 공간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 잡듯 샅샅이 뒤져도 건물 안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정환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파크타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파크타운은 아파트 단지 초입에 위치한 제법 규모 있는 종합상가 건물이었다. 캠프 앞쪽으로는 도로가, 뒤쪽으로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는 사실상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건 금지된 곳이었지만, 한바탕 수색조가 아파트 단지를 수색하고 좀비들을 끌어낸 적이 있어 사실상 좀비의 위협으로부터는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파크타운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상당히 높은 철책이 쳐져 있다는 것도 안전함에 한몫했으리라.

만약 캠프 내부에 없다면 단지 안에 있을 공산이 컸다.

정환이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만약, 단순히 실종된 게 아니라면 어떡하지. 만약 그녀가 뭔가 다른 숨기는 게 있다면? 지금 싸우는 적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떡하지?

하지만 정환의 의심은 근거가 부족했다. 그 여학생은 안 중위와 함께 오토바이 무리와 싸움 직후 합류한 생존자였다. 아무리 존재감이 옅다고 해도 그 정도로 오래된 인원이 배신자였다면, 진작에 사달이 나고도 남았을 터였다.

게다가 요한은 일찍이 ‘내부에 타 캠프에서 심어놓은 간자는 없다.’ 라고 못 박아 두기도 했다. 단순히 캠프 내 의심병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함인지, 정말 그렇게 확신한 근거가 있는 건지 정환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정환이 다시 한번 시계를 흘깃거렸다. 초조함에 자꾸만 시계로 눈이 갔다.

미니멈 데드라인까지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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