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러니까 이렇게 큰 곳에 숨어 있다면 일일이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의미냐고. 그리고 놈들이 도망가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해.”
“허니, 고작 두 시간이야. 이 넓은 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두 시간 안에 짐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급하게 몸만 뺀 거야. 사실 이렇게 즉각적으로 대처한 것도 예상외이긴 하지만.”
지니가 손가락으로 경계선의 모양을 쭉 가리켰다.
“울타리의 모양을 봐. 사각형이지? 이렇게 울타리를 쳐놓으면 각 모서리에서 사방을 경계하기도 쉽지. 사실 이런 도시 내에 방벽을 만든다는 게 정말 대담하고 멍청한 발상인데, 놀랍게도 딱딱 입구만 막아놨어. 아주 효율적이고 계획적으로 설계해서 말이지. 리더가 머리께나 쓰는 사람이야.”
“그래서 어쩌라고?”
“이 모서리 지점들. 여기에 캠프를 만들면 의식주와 경계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지. 모서리만 뒤지면 돼.”
호오, 개백정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난 발상이다. 머리 쓰는 놈들끼리만 통하는 세계인 듯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답안을 찾아냈다.
“좋아. 넷으로 나눈다.”
“잠깐, 허니. 그리고 여기 건물들 보면 입구가 다 부서져 있어.”
“그런데?”
“잠긴 금고에 돈이 있지, 열린 금고에는 돈이 없다구. 이놈들 건물의 문이란 문은 다 부숴 놨어. 아마도 방벽을 만들기 전에 작업했겠지. 저렇게 하면 나중에 방벽을 세운 다음 건물 안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좀비들이 없을 테니까. 문이 멀쩡한 곳 위주로 뒤져.”
책략을 내면서도 여전히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여태까지의 적과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이다. 선발조가 전멸하고 김설화가 잡힌 것도, 두 별동대로부터 연락이 끊긴 것도 예상외다.
거의 절반의 전력이다. 게다가 그들은 선발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양쪽으로 타격하기 위해 둔 보험과 같은 전력인 데다가, 진입로조차도 예상하지 못할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굳이 빙 돌아오는 길에 매복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개백정이 놈들의 리더와 무전을 한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생존자들을 대피시켰다는 점이다. 비상식적인 대응이 낯설었다.
놈은 자신들이 무전을 끝내자마자 습격할 거라는 걸 예상했다. 아니, 예상이 아니고 확신했다.
도대체 뭘까, 이놈들은.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지니의 눈에 경계선 모서리 끝, 한 풀빌라가 들어왔다. 대문이 멀쩡하고 지붕에는 태양광 발전판까지 들어차 있다. 위치, 상태, 그리고 느낌으로도 완벽한 피난처다. 머리 쓰기 좋아하는 적의 우두머리라면 딱 좋아할 만한.
지니가 딱 집어 가리키자 개백정이 난쟁이에게 턱짓했다.
난쟁이가 K201 유탄발사기가 달린 총기를 찰칵, 장전했다.
텅! 격렬한 반동과 함께 발사된 유탄이 창문을 깨부쉈다. 파사삭 깨진 창문 너머에서 유탄이 터지는 폭발음, 그 이후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소리를 들은 이십여 명의 사람이 동시에 섬뜩한 웃음을 보였다. 난쟁이가 다시 한번 유탄발사기의 격발 손잡이를 당겼다.
내부가 혼란의 도가니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난쟁이의 유탄은 장전된 발사 수가 다 떨어질 때까지 풀빌라의 층들을 골고루 타격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개백정이 다시 한번 턱짓하자 깨진 창문 안으로 연막탄이 휙휙 던져졌다. 건물 내부에서 백색 연기가 여기저기에 솟아올랐다.
이어진 신호와 함께 부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풀빌라 안으로 진입했다.
따다다다!-
총격전이 이어졌다. 캠프 생존자들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으나 조준과 발사 속도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애초에 전투 조라고 해도, 대부분 좀비들로부터 캠프를 지키던 것이 전부였던 인원들.
사람을 향해 사격해본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인원들은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사람을 향해 총기를 쏴야 한다는 중압감. 그 중압감이 낳은 몇 초의 머뭇거림이 다른 전투와는 확연하게 차이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살고 싶으면 전부 엎드려!”
난쟁이가 자동 연발 사격으로 드르르륵 탄환을 긁듯이 쏘아대며 위협했다. 그 와중에 안 중위가 격발한 권총 탄환 한 발이 서생연 생존자의 가슴을 관통했다.
처음으로 서생연에 타격을 입힌 유의미한 저항이었다.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쓰러졌다.
안 중위의 반격을 시작으로 유탄과 연막탄의 혼돈에서 벗어난 생존자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대부분 정조준하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는 탄환들이 많았으나, 몇몇 사격 훈련이 잘된 생존자들의 총알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침입자들에게 적중했다.
침입자들도 하나둘 쓰러졌다.
그러나 장비의 차이가 극심했다. 쓰러졌던 침입자들 중 방탄복을 입고 있던 자들이 복부를 부여잡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쓰러진 줄만 알고 있었던 침입자들이 벌떡 일어나 흉기를 휘두르는 통에 용감하게 반격하던 생존자들도 하나둘 제압됐다.
그 와중에 안 중위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안 중위는 총에 맞은 자리를 붙잡고 일어선 침입자의 미간에 다시 한번 총알을 박아넣었다.
“컥!”
부하가 쓰러지는 걸 본 난쟁이의 시선이 곧바로 안 중위를 향했다. 금세 쏘아진 탄환이 안 중위의 양쪽 발에 연달아 박혔다. 안 중위가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안 중위님!”
그를 향해 달려가는 병장의 뒷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치는 난쟁이. 그가 병장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는 개머리판으로 내려쳤다. 그러고 나서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후 질질 끌고 갔다.
건물 안에 총상을 입은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이 가득했다. 격전은 순식간에 마무리됐다. 일방적인 전투였다.
서생연 생존자들의 손에 상처 입은 사내들이 한 명씩 붙잡혀 있었다. 대부분 목숨이 위중한 중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유탄이나 탄환을 맞고 절명한 생존자도 세 명이나 있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하나둘 총상이나 타박상을 입은 채 신음했다.
동료들의 죽음을 목도한 일부 생존자들이 그제서야 황급히 교전을 포기하고 지하실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도주로가 몇몇 서생연 생존자들의 시야에 걸렸다.
원래라면 단단히 잠겨 침입자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어야 했던 장벽, 지하실 문은 채 닫히기도 전에 침입자의 도끼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괴한이 문을 닫으려던 사내를 제압해 그의 머리에 총기를 들이밀었다.
“놈들이 지하에 있습니다!”
지하실 안에는 거의 기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요한 캠프의 비전투요원들이었다.
그들은 줄줄이 상처 입은 채 괴한들의 손에 끌려 내려오는 동료들을 보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호우!”
생존자들을 발견한 개백정이 마치 금광을 발견한 대항해시대의 항해단처럼 입에서 바람 소리를 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숨어 있을 줄은!
다시 봐도 놀라운 규모였다. 무려 백 명이나, 이렇게나 규모가 큰 캠프였다니.
게다가 그들 뒤로는 물자들도 제법 많이 쌓여 있었다. 백 명이 넉넉하게 먹어도 일주일 이상 버틸 만한 양이었다. 감탄이 나왔다.
끙끙거리는 자신들의 전투 인원들, 그리고 먹잇감을 바라보듯 살벌한 괴한들의 눈빛에 생존자들의 눈빛이 공포로 물들었다.
도대체 이 괴한들은 누구란 말인가. 자신들을 지켜주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
개백정은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마저도 마뜩잖다는 듯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서생연 조직 이래 최대의 성과라 할 만했다. 개백정이 총구를 위로 향한 채 개머리판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벌벌 떠는 생존자들을 바라봤다.
“반갑다. 친구들. 먼저 환영 인사를 좀 해 볼까? 세 명을 죽였으니, 앞으로 딱 두 명만 더 죽일 거야. 아주 자비로운 처사지. 그렇지 않나?”
그가 총기를 들어 생존자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그러다 휙 몸을 돌려 난쟁이의 손에서 피를 토하는 군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 친구가 가장 높은 계급이구먼! 안준민 중위. 응?”
개백정이 그의 얼굴에 대고 이죽거렸다. 안 중위가 고통에 찬 얼굴로 그에게 침을 뱉었다. 개백정이 손바닥을 들어 슥 침을 닦아 냈다.
“이런 고루한 클리셰는 하지 말자고, 응?”
개백정이 들고 있던 소총을 빙글빙글 돌렸다. 씩 웃는 섬뜩한 웃음 뒤에 그가 개머리판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퍽!
날아간 개머리판은 안 중위의 옆얼굴을 후려쳤다. 그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쓰고 있던 방탄모는 벗겨져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갔다.
개백정이 끝장을 볼 것처럼 퍽! 퍽! 하고 연달아 머리를 내리쳤다. 고통에 신음하던 병사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안 중위님!”
통탄한 외침에도 안 중위는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축 늘어트린 채였다.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개백정이 그 위로 소총을 두두두 연사했다.
머리가 찌그러지다 못해 완전히 터져나갔다. 두개골이 깨지고 고불고불한 뇌가 튀어나왔다. 뇌수와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꺄악!
다시 한번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했다.
“후, 이거 운동 되는걸? 자, 한 명 남았어. 지원자를 받습니다. 많이 성원해주라고.”
아무도 손드는 자가 없다. 그저 공포에 벌벌 떨고 있을 뿐. 누구도 저렇게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야, 없어? 그것참 아쉽구만. 여기 다음 리더가 누구야? 서열 있을 거 아냐?”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생존자들의 머릿속에는 그저 살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과 이 상황에 대한 공포뿐이었다.
“그냥 대충 기관총 후려갈겨서 한 대여섯 명 죽여볼까, 그럼.”
“이, 이 사람이에요!”
개백정이 생존자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자 뒤쪽에서 몸을 떨고 있던 수희가 서준을 가리켰다. 서준이 눈을 부릅떴다.
“오호, 아저씨. 리더가 그렇게 숨어 있으면 돼?”
개백정이 서준을 질질 끌고 나왔다. 서준은 머리채가 잡힌 채 발버둥 쳤지만, 개백정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저항 못 하고 그대로 끌려 나왔다. 개백정이 자신을 노려보는 서준을 향해 입꼬리를 활짝 들어 올렸다.
“아저씨. 눈빛이 좋군.”
서준의 턱을 들어 올린 채 개백정이 그의 눈에 자신의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자, 마지막으로 떠들 기회를 줄게. 내가 지금 상당히 많은 개를 발견해서 기분이 좋은 상태거든. 아무 얘기나 재밌는 얘기를 떠들어 봐. 또 모르지, 재밌으면 살려줄지도.”
“건드리기만 해 봐······ 요한이 네놈을 죽여버릴 거야.”
서준이 이를 갈았다.
정환의 지시대로 곧장 지하실로 모였어야 했는데, 망할 놈의 캠프 리더들. 고립되면 위험하다고, 무조건 높은 곳에서 고지를 점하고 사격해야 한다고 박박 우겨대던 자들이 지금 이순간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싸우려고 멋대로 행동했으면 싸우다 뒤질 것이지, 하필이면 이곳으로 도망쳐 온 탓에 멀쩡히 대피해 있던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트렸다. 통탄할 노릇이다.
결국, 요한이 몇 번이나 경고했던 밥그릇 싸움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후회하기엔 완벽하게 늦어버렸다.
비록 정환이 전달해준 요한의 지시사항을 제대로 따르지 못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지만, 그는 믿었다. 지금 이 위기에 보란 듯이 나타나 그들을 구해줄 것이-
퍽!
개백정이 콧소리를 내며 개머리판으로 서준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죽이긴 누가 죽인다고 그래? 너희는 이제부터 개야. 짖으라면 짖고 앉으라면 앉는 개. 나는 개 잡는 백정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