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90화 (90/176)

<90화>

요한이 남긴 그 메시지가 주는 충격이 놈들의 발목을 붙잡는 덫이 됐다. 예상대로 개백정은 평정을 잃은 채 자신에게 무전을 쳤다.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혼비백산해 하면서.

절반이 넘는 전력이 잘려나갔다. 게다가 미지의 적은 자신들의 존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 누구라도 두려울 만한 상황.

이런 상황이라면 늘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판을 조종하는 지니의 성격상 그가 내릴 결정은 하나였다.

멈춰 서서 사태를 파악하고 다음 작전이 떠오를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는 것.

‘놈들은 움직이지 못한다.’

수가 읽히고 있으니 쉽사리 도망칠 수도 없을 터다. 차라리 대피소에서 한시 빨리 인질들을 확보하고자 하겠지.

하지만 대피소는 견고하고, 물과 식량이 충분하다. 서생연이 지하 대피소에 정신이 팔린 사이 수색조 캠프를 포위하면 놈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독 안에 든 쥐새끼 꼴이 난다.

저들도 포위되어 있으니 캠프에 불을 지를 수도 없고, 보급도 끊겼으니 버티고 버티다 말라죽거나 기어 나와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완벽했는데.’

말 그대로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캠프가 뚫리지만 않았다면.

개백정은 대피소의 생존자 수를 거의 근사치까지 알고 있었다. 뚫렸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다.

‘도대체 왜 벌써 캠프가 뚫렸지? 시간이 일러도 너무 이른데.’

지하실에 처박혀 문을 잠그고 물자들로 바리케이드만 쌓아도 넉넉하게 한 시간은 버틸 수 있었다. 방화는 변수 중 하나였으나 놈들도 노예로 쓸 생존자들이나 물자가 모두 불타 없어지는 건 바라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설령 방화를 결정하더라도 놈들이 대피소를 버리고 건물을 불태우기로 결정하기 전에 포위망을 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뚫렸다. 어째서?

요한의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됐다.

정환에게 변고가 생긴 건 아니다. 생존자들이 수색조 캠프까지 들어갔다는 건 정환이 지시를 전달하는 데까진 문제가 없었다는 뜻.

그러나 어떤 모종의 이유로 정환이 대피에 함께하지 못했을 거다.

누군가 말썽을 일으켜 정환이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거나 그랬겠지. 그러고 나서 정환이 없는 대피소에서 누군가 자신의 지시를 벗어나 행동한 거다. 캠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멍청한 짓을.

“후-”

치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 캠프 안에는 잃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술자들도 있었다. 박재범 의사나 박 노인 같은 경우가 그랬고, 김 씨 아저씨나 지혜 같은 경우가 그랬다.

요한이 간과한 것은 자신이 애지중지 업어 키운 생존자들이 아주 최소한의 기대치조차도 박살 낼 만큼 한심한 멍청이들이라는 점이었다.

그저 바란 거라곤 대피소에 처박혀서 장정들이 문을 틀어막는 것. 수색조가 놈들의 경로를 파악하고 지원하기까지 딱 삼십 분을 버티는 건데. 고작 그 삼십 분을 못 버텨서.

“2조, 이동준비는?”

-완료.

“좋아, 이동해.”

계획은 계획대로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몰살당하더라도, 반드시 개백정을 잡는다.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그들의 과업이다. 누군가는 지하실 문을 잠그고 침입자로부터 물자와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설령 동료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저 안에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 최소한 자신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자격을 만들어주기 위해 서생연을 놓칠 순 없다. 단 한 놈도 빠뜨리지 않고 놈들의 뼈를, 노력의 결실과 함께 묻는다.

붙잡힌 자들은 살아남을 자격을 스스로 증명하는 수밖에.

‘정환아, 살아남아라.’

녀석은 비록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어도 반드시 살아남을 터였다. 그래. 살 사람은 살아남게 되어 있다.

세리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정환을 남자로 보지 않는다고 못 박아 둔 그녀지만, 그녀에게 정환은 친오빠만큼이나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었다.

“진정해. 정환이는 살아 있을 거다.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니야.”

요한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세리를 진정시키며 용병단에 무전을 쳤다. 마지막 거래를 하기 위해서.

“노인분, 접니다.”

-아아, 애송이. 상황은 어때?

“놈들은 부천시청으로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거래를 요청합니다. 원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안 해! 이 자식아!

“하게 되실 겁니다.”

요한은 당연하다는 듯 내뱉었다.

* * *

아영이를 찾은 정환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상 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 적이 도착했다. 그나마 대피가 사전에 끝난 게 다행이었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이대로 대피소까지 가는 건 무리다. 혹시라도 가는 도중에 발각될 수도 있고, 발각되면 자신이 가던 방향으로 적이 생존자들의 피난처를 알게 될 수도 있다. 자신 하나 때문에 그 많은 생존자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차라리 반대쪽으로 도망칠까?

반대 방향으로 도망간다면 혹시 발견되더라도 최소한 다른 캠프 생존자들은 한결 안전해질 터다. 물론 이쪽은 더 위험해지겠지만.

정환의 시선이 불안에 떨고 있는 아영이를 향했다. 이 작고 가녀린 소녀가 자신 때문에 같이 위험해지는 건 안 된다.

숨자. 이럴 땐 더 꼭꼭 숨는 게 정답이다. 놈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빙 돌아서 요한에게 합류한다.

정환이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아영이의 손을 다시 잡고선 바로 앞에 보이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선 황급히 캠프 생존자들에게 무전을 쳤다.

“정환입니다. 모두 대피 완료하셨죠?”

-어 그래, 정환이냐. 아영이는?

“찾았어요. 근데 지금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요. 놈들이 왔어요.”

-뭐, 벌써?

“네. 말씀드린 대로 꼭 전부 지하실로 내려가셔서 한 발자국도 나오시면 안 돼요! 꼭입니다!”

정환이 꼭을 강조했다. 요한이 지시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수색조 캠프의 지하실은 수류탄으로도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철문이니 무장한 인원들이 마음먹고 철문만 막는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거봐, 정환이 말 들었지?

-아니, 높은 곳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고지에서 싸워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뒤지려면 너 혼자 뒤지라고!

-아니, 서준 님!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무전기 너머로 여러 목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아무래도 대피소에 대해서 탁상공론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속이 터졌다.

분명 대피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수색조가 구조하러 온다고 했는데, 왜! 무조건 지하실로 들어가야 한다니까!

정환이 다급한 마음에 다시 무전을 쳤지만, 누군가 송신 버튼을 누르고 있는 듯 정환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하던 정환이 가까워지는 바이크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다시 전달했다.

“지하실입니다, 지하실······.”

이제는 오토바이 소리가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환이 황급히 무전기 소리를 음소거로 돌렸다.

정환은 아영이를 데리고 삼 층 계단을 내달리듯 올라 복도의 창가로 붙어 숨을 골랐다.

오토바이는 어느덧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자신들이 방금 있던 정자에 향해 있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딱 집어서 저 위치를 찾았지?

하지만 정환은 금세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두 사내의 옆에는 사람 허리까지 오는 대형 사냥개가 혀를 날름거리며 헉헉대고 있었다.

한 번만 물어뜯기면 살점이 뭉텅이로 빠져나갈 듯한 사나운 모양새로.

정환이 헛바람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창문 너머로 두 사내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개코 님, 지니 님께서 돌아오라는데요.”

“닥치고 잠시 기다려 봐, 근처에서 여자 분내가 난다고.”

“···시체 썩은 냄새밖에 안 나는데요.”

“닥치래도. 스왈로우, 여기 있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지?”

월! 대형 사냥개가 크게 한 번 짖더니 킁킁거리며 정자 주변의 냄새를 맡는다.

이내 코를 벌름거리며 자신이 있는 아파트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을 찾는데 최적화된 사냥개다.

제기랄. 이래서 요한 형이 도망쳐도 소용없다고 했구나.

그저 튼튼한 곳에 숨는 게 최선이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사냥개까지 동원했다면 백여 명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금방 따라잡혀 버렸을 터다. 각자 따로 숨어 있었어도 마찬가지다.

요한은 이곳이 발각당한 순간, 숨는 건 의미가 없어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정환이 생각하는 사이 개는 점점 자신이 숨은 아파트로 다가왔다. 정환이 총기를 그러쥐었다. 아직 놈들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선제 타격해야 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아영이가 정환의 품속으로 안겨 왔다. 익숙하지 않은 스킨십에 정환이 긴장감 속에서도 당황했다.

품속에서 느껴지는 여인의 감촉에 하반신에 절로 피가 쏠려왔다.

미친놈아, 이런 상황에! 게다가 학생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정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다시 침입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수는 두 명과 한 마리. 이쪽은 그들을 보고 있고, 그들은 이곳의 위치를 모른다. 수적 열세 정도는 충분히 극복 가능한 조건이다.

정환은 두 명 중 타격 우선순위를 정했다. 그러다 개를 끌고 있던 한 사내가 다른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가 더 높은 서열이다.

저자부터 공격해야 한다. 정환이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막상 선제 타격을 하려고 하니 긴장감에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전투 경험은 충분했지만, 이렇게 단독으로 전투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었다.

엄연히 따지면 그는 스스로를 그저 보통의 생존자라고 생각했다. 약간 후하게 평가해도 보통보다 조금 나은 정도.

사격 실력도 보통, 근접전 전투력도 보통, 머리 쓰는 것도 보통. 그냥 보통의 남자다. 그런데도 요한은 스페셜리스트 셔터맨이니 믿을맨이니 하며 중요한 역할을 늘 맡겨 왔다.

그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정환은 늘 든든한 형이 고마웠다. 그저 겁쟁이였던 좀비물 덕후를 이만큼이나 성장시켜 준 그의 형을,

‘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

정환이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열린 유리창 사이로 총기를 정조준했다. 동그란 가늠자에 가늠쇠를 넣고 개를 붙잡고 있는 생존자의 얼굴에 갖다 댔다. 몸통은 안 된다. 방탄복을 입고 있을 수도 있다.

정환은 지체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햇빛에 총열이 반사되어 반사광이라도 보인다면 더 위험해진다. 시간이 없었다.

첫발은 무조건 적중해야 한다. 첫발이 빗나가면 이 대 일의 불리한 전투가 시작된다.

아니, 어쩌면 근처에 숨어 있는 괴한들이 더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제거하고 저 사냥개만 없앨 수 있으면 꼭꼭 숨어들 수 있다.

몇 초의 심호흡.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정환의 시선이 목표물에 고정됐다.

저건 좀비다. 이 정도 거리에서 좀비는 수도 없이 죽여 봤잖아. 할 수 있어.

방아쇠에 닿아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탕! 발사된 총알이 정확하게 개코의 얼굴을 강타했다. 왈! 왈!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찼다.

명중이다! 정환의 전신에 쾌감을 동반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쾌재를 부를 새도 없이 이어 정환의 총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다른 사내의 얼굴을 조준했다. 사내가 총구를 이리저리 흔들며 엄폐물을 향해 달려갔다.

‘캠프 외 지역에서는 그 장소가 어디든, 상대가 좀비든 사람이든 은폐 엄폐가 기본이다. 항상 서너 걸음 안에 은폐가 가능한 곳으로만 다녀.’

정환이 요한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세 발을 연사했다. 놈은 장애물을 향해 달려가다가 몸통을 맞고 쓰러져 발버둥 쳤다. 피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역시나 방탄복을 입었다.

놈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개가 짖는 방향을 향해 발악하듯이 사격했다. 정환이 잽싸게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가 발포음이 멈추자마자 다시 잽싸게 사격 자세를 취했다.

탕!

정환이 쓰러져 있는 사내를 향해 다시 한번 탄환을 적중시켰다. 곧바로 조준점을 돌려 이곳을 향해 짖고 있는 사냥개까지 사격에 성공한 정환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늘 요한이 강조하는 유리한 환경에서의 일방적인 전투.

저들은 자신들의 강함을 과신했다. 게다가 방벽 안이라는 사실과 생존자들이 도망쳤다는 사실에 부주의했다. 정면 승부였다면 차가운 땅바닥에 뉜 시체가 자신일 수도 있었지만, 자신은 결국 승리했다.

승리.

처음으로 단독전투에서 승리했다.

정환은 이 장면을 요한 형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소리 없이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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