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죽이셔도 괜찮습니다. 시간을 드리지요. 저들이 팔아넘겼다는 동료가 누굽니까?”
“나랑······.”
요한이 서준의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서준에게 쥐여 주었다. 직접 죽이라는 의미였다. 서준이 지혜를 돌아보았다. 지혜가 질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인이 직접 죽일 줄 알았던 서준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럴까 하던 서준은 과거, 요한이 마트에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가 하는 결정은 세 개뿐입니다. 용서, 처형, 추방. 아, 물론 행위에 대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의 자격은 피해자에게 있는 거니까요. 캠프의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용서입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처형이 아닌 추방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피해자들 대신 죄를 용서한 것은 아니니, 피해자가 본인의 몫을 심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그것이 요한의 방침이기도 했다.
서준은 그를 향해 권총을 들이밀었다. 자신에게 죽으라고 고사를 지냈던 계집.
당연히 죽여야 마땅하다. 만약 요한이 직접 그 일을 당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방아쇠를 당겼을 거다. 하지만 쉽사리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배신자라고 해도, 아는 사람을 죽인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방아쇠에 닿은 서준의 손이 벌벌 떨렸다.
서준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아저씨, 무리하지 마세요.”
그의 손을 붙잡은 건 혁이었다. 혁은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과 같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니 말이 맞다.”
서준이 총구와 함께 고개를 떨어트렸다. 서준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자 요한이 노인에게 눈짓했다.
“좋아 볼일들 끝났어? 인수인계는 끝난 거지?”
“네.”
“거기 둘, 할 말 있나?”
노인이 수희와 마르코를 보며 묻자 두 사람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는 싶은데 지은 죄가 있어 말하기가 눈치가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들을 죽이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마르코는 수희를 바라봤고, 수희가 대신 입을 열었다.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놈들이 기관총으로 전부 죽이려고 했다고요. 그저 저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싶어서······.”
“그게 유언의 전부야?”
“예?”
눈을 동그랗게 뜬 수희의 이마에 동그란 총알구멍이 생겨났다. 탕! 사람들이 상황을 깨달은 건 그 뒤의 일이었다.
노인의 총구는 마르코를 향했고, 마르코가 두 손을 머리께까지 들어 올리며 막아보려 애썼지만, 총알은 손바닥을 꿰뚫고 정확하게 그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두 사람의 피가 아스팔트 바닥 위에 흥건하게 새어 나왔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사건 사고를 돌풍처럼 몰고 왔던 두 사람의 시신은 그저 싸늘함만을 남기고 힘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노인이 총구에 입바람을 불며 비릿하게 웃었다. 용병단 사람들과 수색조 몇몇을 제외한 모든 생존자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좋은 본보기가 되겠구만. 이봐, 쭉정이들. 우리는 동료를 팔아넘긴 자들과는 함께하지 않아. 동료를 팔다가 걸리면 사형이지. 잘 기억하라고. 그리고 애송이는 떠날 사람은 떠나라고 했지만, 난 보내줄 생각이 없어. 도망치면 전부 죽는 거야. 애송이, 불만 없지?”
“훌륭합니다.”
요한이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노인이 씩 웃었다.
“좋아, 빨리빨리 움직여. 지금부터 뺑끼 부리거나 이빨 보이면 다 뽑아버릴 테니까. 다 뒤졌다고 생각해. 군대 다시 왔다고 생각하라고. 어이, 애송이는 이리와 봐. 이거 사용법 알려줄 테니까.”
노인이 ‘이것’이라고 칭한 건 다름 아닌 한 상자의 다이너마이트와 공사용 드릴이었다.
건물이 불타오르는 이틀 동안, 용병들은 대형 크레인이 앙상하게 자리 잡은 재개발 하도급업체의 폐허 현장 안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구해왔다. 용접용 가스와 폭발성 자재를 모아 놓은 창고에서 구했다고 했다.
노인은 요한에게 사용법과 설치법을 꼼꼼히 설명했고, 그걸 받아적었다. 폭발물은 안전한 쉘터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퍼즐 중 하나였다.
생존자들의 인수인계와 폭발물 교육, 그리고 요한의 정보 전달까지 마무리된 후, 요한은 곧바로 이동을 준비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한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조금만 지체했다가 좀비 웨이브가 터지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줄어든 인원수에 더 큰 타격이 생길 수 있다.
용병단은 사람들의 정신 개조를 시킨다며 적당한 캠프를 하나 잡아 사람들을 몰아넣었고, 수술의 칼날을 피해 나간 사람들은 장거리 이동을 위해 짐을 쌌다.
수색 조원들은 소방서 급수차와 탑차, 그리고 건설기계들을 준비해 이동할 준비를 했다. 이동을 위한 지휘는 하진과 스위퍼에게 맡기고 요한은 다시 가족재단으로 향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남았다.
이제 서생연의 머리를 잘랐으니, 그녀도 처리해야 했다.
요한이 가족재단 옆, 김설화를 감금해둔 회색 건물의 철문을 열었다.
크르르르-
익숙하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죽은 자의 으르렁거림이 공간을 채웠다. 밀실 안에는 이미 좀비로 변한 김설화가 있었다.
김설화는 흡사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자신을 보자마자 으르렁거렸다. 왜 좀비로 변한 거지, 하는 의문에 요한이 그녀의 전신을 눈으로 훑었다. 수갑을 채워두었던 손목에 상처가 있다. 수갑을 풀기 위해 발버둥 치다 손목에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어리석긴.
저 수갑은 시쳇더미 속에서 주워 온, 좀비 피가 덕지덕지 묻은 물건이다. 당연히 저 수갑을 풀겠다고 손에 상처를 내면 감염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녀는 요한이 패할 거라고 확신했을 터다. 그러니 어차피 여기에 갇혀서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했겠지.
그 판단에는 동의했다. 그녀는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임은 분명했다. 자신은 그녀를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요한의 빤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좀비가 된 김설화를 죽여 안식을 선물할 수도 있었지만, 요한은 그녀를 그대로 두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녀는 좀비가 된 상태로 억겁의 시간을 이 안에서 홀로 고통받으리라. 그게 요한이 그녀에게 내리는 복수이자 형벌이었다.
건물을 나오면서 자물쇠 열쇠를 튕기듯 던졌다. 허공으로 던져진 열쇠는 창문 밖으로 날아가 배수구 속에 처박혔다.
마음 한쪽이 꽉 막힌 것마냥 편치만은 않다.
10. 안배된 시나리오의 마침표
연합 캠프에서 맞는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이 밤이 지나가면, 요한과 그의 사람들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생존을 시작해 나갈 것이다.
남은 육십여 명의 사람들을 세 개의 캠프에 나눠 넣고, 수색조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맥주를 마셨다.
전투원들에게 휴식과 스트레스 관리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니 힘든 사람은 들어가서 쉬라는 말에도 누구도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떠들 사람은 떠들고, 밤 경치를 구경할 사람은 구경하고, 술을 마실 사람은 술을 마시는 차분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치열했던 싸움을 이어 온 만큼, 쉬면서도 아직까지는 쉽사리 빳빳한 긴장감을 풀 수 없었던 탓이다.
잔잔한 침묵을 깨고 모두를 주목시킨 건 하진이었다. 하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맥주캔을 들어 보였다.
경계선 쪽을 감시하고 있던 요한도 시선을 그에게로 던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깜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과묵한 우리 대장을 대신해서 한마디 하지.”
어떤 거창한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뒤이어 던져진 그의 ‘싸우느라고, 오늘도 살아남느라 수고했다.’는 한 마디에 숙연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육 개월 전만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때로는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생사전을 벌일 거라곤 예상도 못 했던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럼에도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누군가는 죽어 나갈 터다. 하진이 난간 쪽으로 걸어나가더니 밤거리를 향해 맥주를 뿌렸다.
“동석, 애리, 재희. 먼저 간 녀석들에게도 한잔 올리자.”
뿌려진 맥주가 허공에서 반짝거리며 흩어졌다. 이어서 한 명 한 명, 하진을 따라 허공으로 맥주를 뿌렸다. 몇 안 되는 수색조의 여성 전사, 정은이가 단짝 애리의 이름을 흐느끼며 맥주를 쏟아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도 천천히 맥주를 바닥에 뿌렸다. 이런다고 그들이 이 맥주를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나마 죄책감의 무게가 줄어든 술의 무게만큼은 덜어진 기분이었다.
가라앉은 이들을 보는 요한의 심정이 무겁게 침잠했다. 이들은 이렇게 나약하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슬픔보다는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세상이다. 요한 역시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많다는 사실에 감사했으니까.
하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땅굴을 파다 못해 맨틀까지 뚫고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를 깨기 위해 요한이 입을 열었다.
“다들 주목해줘.”
이제 약속했던 대로 진실을 고백할 때였다. 이야기해서 좋을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나쁠 것도 없는 이야기. 오로지 겪은 자만이 그 진실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서생연을 몰살시키지 않았다면, 요한은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들이 살아 있는 이상, 요한은 그 어디에서도 두 발 뻗고 잘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제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와는 연결고리가 없다.
6개월간 주어진 시간 동안 준비해두었던 두 번째 쉘터에 도착하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그 시간 동안 안배된 모든 시나리오는 여기서 마침표가 찍힐 터다.
지금부터는 요한도, 그 누구도 모르는 세계에서 또다시 살아가야 한다.
웃고 떠들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침 분위기도 적당히 가라앉았으니, 지금 얘기하는 게 맞았다. 요한은 뜸을 들였고, 애꿎은 맥주만 줄어나갔다.
한참 달빛에 술을 기울이고 나서야 요한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지금,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좀비들이 나타나기 전, 이미 이 난리를 한 번 겪었었어.”
그답다고 해야 할지,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정말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사람들은 되묻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계절이 세 번 정도 바뀌었으니까······. 대략 삼 년 정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좀비들이 튀어나왔고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서 살아갔지. 회사 건물에서, 군부대에서, 여기 마트에서, 인천 대피소에서, 다시 서울로, 나중에는 여의도와 난지공원까지.”
요한의 맥주캔 홀짝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주변에는 풀벌레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죽을 고비였어. 배고픔, 갈증, 두려움, 배신, 변종, 인간 군상의 변질된 탐욕··· 바로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고 믿던 동료가 내일 싸늘한 시체가 된 적이 셀 수도 없네. 지금 살아있는 혁이, 정환이. 전부 지난 삶에서도 나와 함께였고, 난 너희의 죽음도 지켜봤지.”
“그런······.”
“결말은 시시하지. 결국, 저 서생연 놈들에게 처참하게 패배해서 동료들이 전부 좀비가 됐고, 마지막에 동료에게 물려 죽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지금으로부터 10개월쯤 전이군. 눈을 뜨니까 내 방이더라.”
요한은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대출을 한도까지 받아 종말을 준비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