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3부 - 종말의 장
* * *
11. 생존자들의 섬
마치 블러 효과가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흐릿했던 시야는 점점 선명도를 되찾아가더니 이내 그 색을 잃어버렸다.
이건··· 꿈이구나.
꿈의 주인은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익숙한 경험이다. 그 일이 터진 이후 몇 번이나 겪었던.
마치 영화 스크린을 보는 것처럼 장면 장면이 연달아 펼쳐졌다. 영화 필름에서 프레임이 넘어가듯 장면들이 휘리릭 넘어가다가 어느 한 장면에서 멈춘다.
펼쳐진 것은 어딘가 본 듯 익숙한 섬이었다.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웃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 모습만 보면 종말이 오기 전의 상황인지, 종말이 온 다음의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순간 장면이 빠르게 넘어갔다.
평화롭던 섬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죽은 자가 되어 옆에 있던 동료들을 물어뜯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좀비들이 끊임없이 몰아치고,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물이 딱딱거리며 저항하는 사람들을 찢어발겼다.
[정환아!]
[요한 형! 아아악!]
한 사내가 잔혹하게 물어뜯기는 사람을 보며 절규했다. 정환이라고 불린 사내는 누군가를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절명했다. 절규하던 사내 또한 주변을 둘러싼 좀비들을 막기 급급했다.
손에 꼽을 만큼 적게 남은 사람들이 좀비들로부터 후퇴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한 명씩, 한 명씩 아스라이 생의 촛불이 꺼져 갔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보물처럼 목에 걸고 있던 사내도, 용맹하게 싸우던 여인도, 백발백중으로 좀비들을 쓰러트리던 군인도 한 명씩 죽은 자들의 희생양이 됐다.
어느덧 남은 생존자는 단 세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한쪽 팔에 팔 대신 의수를 끼고 있던 사내는 어깨를 물어뜯긴 뒤였고, 그 주변으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의 좀비들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세 남자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세 사람은 제법 오랫동안 좀비들의 물결을 버텨냈다.
의수를 낀 덩치의 사내는 양손으로 무기를 휘저으며 좀비들의 시체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물리는 것조차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한 마리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는 듯, 쌍수를 휘둘렀다. 선 채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남은 사람은 두 사람.
그마저도 단발 히피펌의 사내는 아가리가 튀어나온 좀비를 막느라 등 뒤를 지켜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요한이라고 불린 사내 홀로 수많은 좀비에게 둘러싸여 발버둥 쳤다.
변종 좀비는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눈앞에 보이는 사내에게 휘둘렀다. 덕분에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좀비들이 우후죽순으로 쓸려나갔다.
마침내 인간이라곤 믿기지 않는 움직임을 보이며 홀로 수많은 좀비를 학살하던 단발 히피펌의 사내까지 괴물에 의해 양손이 뜯겨 나갔다. 사내는 절명의 순간 가까스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개 엿 같네. 형씨, 그렇지?]
히죽거리는 사내의 얼굴은 금세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요한이라고 불렸던 사내, 평화로웠던 섬의 마지막 생존자는 몰려드는 좀비들을 보며 허탈한 표정으로 팔을 늘어트렸다. 그 순간, 화면이 깨져나갔다.
“헉!”
“리나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헉, 헉······.”
수도명 바울리나, 리나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또 꿈을 꾸셨나 봐요.”
“베르다.”
“예, 아가씨.”
“지금 바로 피오를 불러 줘요.”
“그··· 용건은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던 리나가 베르다를 보며 입술을 축였다. 꿈이 이토록 생생했던 것은, 처음 좀비가 나타났던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분명 저 섬 내부의 풍경은 그녀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이 근처가 틀림없다.
잠들면 항상 꿈을 꾸었고, 어떤 것은 예지몽이기도, 어떤 것은 악몽이기도 했다. 매일 밤 꾸는 꿈들이 물감처럼 뒤섞여 어느 순간부터는 꿈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리나는 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오고 있어요.”
그녀가 꿈에서 그들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이 필요했다.
* * *
요한 일행은 삼목 선착장으로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목적지인 신도까지는 육안으로도 선착장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작은 어선들과 여객선 사이에 있는 낡은 중형 어선은 유독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선착장 안쪽으로는 주인을 잃은 차량과 문 닫힌 선착장 건물들이 보였다.
인적이 드문 지역인 만큼 눈에 보이는 좀비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정비.”
요한의 짤막한 지시에 일행은 다시 한번 짐을 풀고 재정비했다. 수색조 인원들은 빠르게 외곽으로 퍼져 비전투 요원들이 안심하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경계선을 만들었다. 마치 한 몸처럼 손발을 맞추는 조원들. 수색조의 외부활동을 처음 보는 캠프 생존자들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지는 모습이었다.
짐 정리가 끝나자 요한은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다음 단계를 지시했다.
“위험한 지역은 아니니까 각자 흩어져서 건물 하나씩 잡고 눈에 보이는 좀비들 정리해. 파밍은 적당히 하고 좀비들만 처리하고 와.”
요한은 수색조에게 짤막한 지시를 남기고 배의 시동을 걸기 위해 움직였다.
수색조 인원들은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흩어졌다. 워낙 인적이 적은 지역이었고 작은 건물들이 여러 개 있으니 모여서 수색하기보다는 흩어져 빠르게 정리하는 것이 확실히 효율적이었다.
애초에 좀비 청소 방식도 어두운 건물 안에서 싸우는 것이 아닌 입구를 뚫어놓고 좀비들을 밖으로 유인해서 처리하는 방식.
훈련받은 전사들에게는 위험한 일도 아니었다.
“응? 아영아, 넌 굳이 안 따라와도 돼. 위험하니까 들어가 있어.”
정환이 슬그머니 자신을 따라오는 아영에게 멀리 떨어지라는 듯 손짓했다. 아영이 잠깐 주춤했다.
“훠이, 훠이.”
미성년자들은 웬만하면 모든 작업에서 열외를 받는다. 괜히 도와준다고 어물쩍거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용한 곳에 모여 있는 게 더 낫다는 판단 때문. 정환이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따라오는 아영을 되돌려보내려고 말했다.
“응?”
그러나 아영은 못 들은 척 그를 따라붙었다.
난처한데.
정환은 난색을 보였다. 아, 이거 왠지 요한 형한테 걸려서 털릴 것 같은 느낌인데.
정환이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아영이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해사한 여고생이 자신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니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 역시. 누군가한테 싫은 소리를 하는 건 정말 쥐약이야.
정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심해야 한다? 수색작업은 장난이 아니야. 아영아. 진짜로 위험하다고.”
아영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겠지.’
예전의 자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지킬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요한 형의 말대로 여기까지 오면서 거의 좀비들과 마주치지 않았을 정도로 그렇게 위험한 지역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역시 여자를 대하는 건 어렵다. 그나마 세리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이라 편하고, 지혜는 워낙에 다정다감한 탓에 자신과 잘 맞는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어렵다. 심지어 같은 수색조인 정은이도.
세리를 생각하니 또 계면쩍은 느낌이 들었다. 한때는 굉장히 뜨거운 감정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또 아무렇지도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민망하긴 했다. 괜히 요한 형에게 투정 부렸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자다가 이불을 두드린다.
“어… 아영아.”
“네.”
“근데 왜 나를 따라오는 거야?”
정환은 어색한 침묵을 지우기 위해 한 질문치고는 상당히 좋은 질문이라며 자신을 칭찬했다. 아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개미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무서워서요.”
“하하, 나는 안 무섭단 뜻으로 들리는데.”
민망한 듯 하하, 웃었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긍정하듯이. 정환은 약간은 시무룩해졌다.
“내가 좀 만만하긴 하지.”
“그런 뜻이 아닌데.”
“응?”
“오빠는 강한데, 다정하니까….”
“어…… 어?”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다. 뭔가 놀랍기도, 가슴속이 찌릿찌릿한 느낌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직접 인정받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가슴이 간지럽고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형들 사이에 껴 있다 보면 운동신경이든 전투력이든 항상 모자람을 느꼈다. 천덕꾸러기까진 아니더라도 받는 신임에 비해 비중 있는 전력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으니까.
‘강하다’는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들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색하지만 조곤조곤하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새 목표로 했던 건물의 문 앞까지 도착했다.
정환이 아영에게 멀리 떨어지라는 신호를 줬다. 아영이 후다닥 달려가서 명치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정환이 어시장 건물 문을 벌컥 열고선 재빠르게 두어 걸음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좀비 한 마리가 힘없이 걸어 나왔다.
“하압!”
마치 사이드암 투수처럼 수평으로 정환의 나이프가 휘둘러졌고 좀비는 선 채로 머리와 몸이 분리됐다.
좀비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눈과 입을 껌뻑거리던 좀비의 머리에 정환의 대검이 푹, 소리를 내며 박혔다.
웬일인지 평소보다 몸놀림이 가벼웠다.
정환은 한결 자신감 가득한 몸짓으로 열린 어시장 철문을 퉁퉁 두드렸다. 아직 안에는 좀비들이 남아 있었다. 죽은 자들의 하울링 소리가 들렸다. 둘, 많으면 셋.
문제없다.
“나온다. 둘, 또는 셋.”
아영이를 향해 경고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갑자기 다수의 좀비가 튀어나왔을 때 그녀가 놀라 소리를 지르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좀비들은 그르렁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쪽에서 헤매는 모양인지. 정환이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
캬아악!
갑자기 튀어나온 좀비 한 마리가 정환을 향해 두 손을 덮쳐왔다. 하지만 정환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정면으로 나이프를 찌르며 동시에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좀비 한 마리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쓰러졌다.
두 마리, 세 마리. 문 앞에서 차례대로 튀어나오는 좀비들을 박살낸 후 바깥쪽으로 잡아채듯 집어던졌다.
“후…….”
스위퍼 형이나 하진 형이 봤다면 꼴랑 세 마리 잡으면서 무슨 액션 영화 찍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멋있어 보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영은 놀란 토끼눈으로 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슈퍼 히어로를 보는 듯한 눈길이다.
‘방심하지 마.’
마치 세뇌하듯 주입식 교육받은 요한 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방심할 뻔했다.
“무서운 사람…….”
이 와중에도 환청이 들리다니. 정말 무서운 형이라니까. 정환은 요한 형의 말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철문을 두드렸다. 이대로 어두운 건물 안에 들어갔다가 다수의 좀비와 마주치면 의문사할 수도 있었으니까. 건물 진입 전 두세 번 확인은 수색조 기본 중의 기본.
두 번으로도 모자라 한 네 번쯤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좀비들이 없거나, 있어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으로 판단. 정환이 짧은 나이프로 바꿔 쥐고, 한 손에는 손전등을 쥐었다.
투둑, 툭.
상당히 오래된 건물이다. 천장에서는 모래와 작은 돌덩어리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고, 건물 천장은 부식이 된 건지 금이 가고 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굳이 손전등이 없어도 내부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밝은 상태였다.
“불안하게. 천장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