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요한은 사람들을 배치하기 전에 다시 한번 고민을 거듭했다. 인원의 상당수를 경계, 수색에 배치했던 때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주변은 온통 바다뿐. 좀비나 변종에 의한 침략은 생각하기 어렵고, 헤엄쳐서 침투하지 않는 한 침략자들도 충분히 소음만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남은 인원 68명 중 전투 가능 인원은 3할에 못 미치지만, 작은 비중은 아니다. 전투력도 손색이 없다.
요한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운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인원분할과 경계방식, 생존수칙 재정립 및 수색조 개편.
내륙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가장 큰 변화는 주민들에게 자유도를 주는 것이었다. 생존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것. 요한이 바라는 것은 그거였다.
“인원은 17명씩 4개로 나눕니다. 각 마을에 보시면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 있어요. 마을에 배치해드릴 테니 원하시는 곳에 자리 잡으시면 됩니다.”
그러고선 수색조를 향해 돌아보고 말을 이어나갔다.
“수색조는 2개 조로 나눠서 자리 잡는다. 일 개 조는 신도 1리에서 시도 쪽 다리를 감시하고, 일 개 조는 2리에서 선착장 쪽 감시할 거야.”
요한은 최대한 사람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구성으로 인원을 재배치했다. 4개의 마을에 흩어져서 지내고 마을별로 어떠한 임무를 부여했다.
경계와 수색은 지금처럼 수색조가 전담한다. 그리고 기술조와 행정 담당 인원 일부를 관리해줄 서준을 제외한 모든 인력은 생산조로 투입. 겨울을 대비한 물자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한동안은 영종도에서 최대한 물자들을 수급해 올 테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섬 안에서 자급자족이 이루어져야 한다.
핵심은 박 노인.
박 노인의 연륜과 생활지식은 주민들의 자력 생존을 책임져 줄 것이다.
추수철이 곧 다가온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호재였다. 이 넓은 논밭에서 작물을 추수하면 당장 올해를 넘어 내년까지도 끄떡없다.
처음 신도를 거점으로 정했을 때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지만, 결과적으로 이곳을 선택한 게 신의 한 수가 됐다.
“한동안 수색은 쉴 거야. 체력 비축하고 섬 생활 적응하도록.”
요한의 말에는 속뜻이 있었다.
한동안 쉰다는 것, 즉 다시금 수색을 나간다는 것.
자급자족이 되고, 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사라지더라도, 그럼에도 수색은 나가야 한다. 수색으로만 얻을 수 있는 자원들도 분명히 있었으니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다른 인원들은 몰라도 전투 인원들은 절대로 평화에 젖어서는 안 된다.
전투 인원들은 날붙이다. 날붙이는 사용하지 않는 때라도 항상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야 했다.
“여기가 좋겠네.”
요한은 신도 2리에서 선착장이 바로 보이는 산기슭 펜션 중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해안이 전부 눈에 들어와 평소에도 해안가를 감시하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그럼 난 여기.”
세리는 보란 듯이 요한의 바로 옆 펜션에 자리를 잡았다. 속이 빤히 모이는 수작이었지만 요한은 굳이 내치지 않았다. 귀여운 수준의 수작이다.
한동안 바쁜 나날이 계속됐다. 박 노인, 박재범 의사, 김 씨, 서준, 지혜 등등 여러 기술조들은 각자의 특기를 살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수색조는 삼형제섬을 전부 청소하고 인근 지역의 지형도를 제작했다.
그중 가장 분주했던 것은 역시 요한이었다. 한 명 한 명 확인하며 작업의 우선순위와 방식 등등을 정리했으니까.
무임승차하는 사람이나 과로하는 사람이 없으려면 초장부터 인력 분배를 확실하게 해야 했다.
요한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김 씨.
김 씨에게는 섬 전체에 방송이 가능한 확성기와 내륙과 무전할 수 있는 아마추어 무전 시스템이 갖춰진 상황실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지시했다.
“유사시에는 확성기 방송 한 번에 모든 사람을 모으거나 대피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어려운 작업은 아니야. 단지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공급을 활성화하는 게 먼저지.”
“근처에 태양광판들이 많던데.”
“내가 둘러봤는데, 대부분 발전사업용으로 설치해 둔 거라… 음,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그렇습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천천히 보시죠. 일단 가솔린 발전기로도 어느 정도 전지 충전은 가능하니까요.”
김 씨 아저씨는 신나 보였다. 부려먹을 조수도 한 명 생긴 데다가, 부천에 있을 때보다 장비나 행동반경이나 본인이 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자유로웠다.
박재범 의사는 가방끈 긴 친구 두 명을 뽑아 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서생연과의 싸움 때 그를 보조했던 간호사가 사망했기에, 추가적인 의료인 양성이 필요했다.
박 노인은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논밭의 면적과 가축들을 어떤 식으로 기르고 수확할 건지, 하루 예상되는 달걀과 염소젖, 번식량 등등을 예상해 요한에게 가져왔다.
요한은 박 노인에게 가장 많은 인력을 배정하고 농축산을 전담시켰다. 남은 인력들은 대부분 낚시나 채집 따위를 맡겼다.
손재주가 좋은 지혜는 정 할머니와 의기투합해 서비스업의 선두주자가 됐다. 복지관 건물에 미용, 의상수선실에 더불어 배급소 겸 식당을 차렸다.
서준은 안 쓰는 창고 두 개를 각각 무기탄약고와 물자창고를 만들어 섬 내의 모든 물자 및 배치표, 주민생활기록부 등등을 만들었다.
몇 달 동안 호흡을 맞춰 온 사람들. 한번 뜰채에 걸러져서 남은 사람들은 게으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아니, 절대로 게으르고 이기적이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설령 본성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두들겨 패고 쥐어짜서라도 제 몫을 하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섯 명이 모이면 한 명은 병신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한 명의 병신을 걸러내기 위해 몇 개월을 소모했다.
생존자들의 섬에서는 생존자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평화였다.
12. 캠프 마리아
* * *
2017년 9월.
조금은 탁한 저수지의 수면 밑.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낚싯대를 걸기만 해도 물고기가 잡혀 올라올 정도로 많은 어류가 서식하고 있었다.
꼬르르륵.
물속에서 공기 방울이 수면을 향해 떠올랐다.
세리는 저수지를 헤엄치고 있었다.
기다란 호스를 입에 물고선 한 마리 민물고기처럼 매끄럽게 헤엄치던 그녀의 시야에 40cm 정도 되는 입 큰 배스 한 마리가 들어왔다.
세리가 바닥을 살살 긁으며 작은 물고기들이 내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자, 놈이 꾸물거리면서 다가왔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온 순간 세리의 손에 들고 있던 물고기 작살이 툭 튀어 나가 배스의 몸통을 꿰뚫었다. 사정없이 발버둥 치던 배스는 곧 질긴 낚싯줄에 주둥이가 꿰이는 신세가 됐다.
‘열한 마리 째.’
그녀의 반대쪽 손에는 벌써 열 마리가량 되는 배스가 줄에 걸려있었다.
‘슬슬 그만할까나.’
생각을 정한 세리가 부드럽게 유영하며 수면 위로 올라갔다.
“푸핫!”
세리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 잠수용 고글을 머리 위에 걸치고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빠!”
세리가 부른 곳은 저수지의 중앙, 정자 위에 요한이 편한 자세로 앉아 정자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리가 낑낑거리며 낚싯줄에 걸린 배스를 정자 위로 옮겼다.
요한이 빤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눈꼬리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눈웃음쳤다.
“왜? 새삼 너무 섹시하니?”
정말 변치 않는 레퍼토리에 그저 피식 웃어버리는 요한이었다. 물론, 확실히 딱 달라붙는 래시가드에 물에 젖어 물기를 뚝뚝 떨어트리는 발육 좋은 20대 중반의 예쁘장한 여자아이는 분명 매력적이긴 했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끼를 부려?”
세리는 해사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매번 느끼지만, 이 물고기는 어딜 가나 많은 것 같아.”
“번식력이 엄청 좋은 물고기니까.”
생태계 파괴 주범으로 찬밥 신세를 받았던 물고기였지만, 이 섬의 주민들에게는 좋은 매운탕거리이자 횟감일 뿐이었다.
생태계 보존은 커녕 그저 본인들의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는 세계였으니까.
세리가 잡은 물고기를 반으로 나눠 두 개의 빨랫줄에 각각 꿰었다.
“자. 들어.”
세리는 하나의 물고기 덩어리를 요한에게 건넸고 요한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두 사람은 구봉산 고개를 가로질러 보급창고로 향했다. 보급창고 간이 냉동고에는 벌써 수백 마리의 배스가 얼려져 있었다.
신도에 정착한 지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이십여 일 동안 요한은 섬 밖으로 나가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미뤄두고 우선 섬 내의 생활을 안정화하는 데 주력했다.
대부분의 생활은 정상화를 찾고 있었다. 여전히 멸망 이전의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삶이었지만, 최소한 은퇴하고 귀농했다는 생각은 들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문제는 없었다.
아니, 문제가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슬슬 생활이 안정화되었다고 판단한 세리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파를 던져온 탓이다.
이전까지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어영부영 넘길 수 있었지만, 요즘처럼 대놓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건 조금 난처하기는 했다.
원피스 수영복 위에 래시가드를 입고, 젖은 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자신을 향해 묘한 미소를 보낸다든가 하는 행동 말이다.
요한이 세리를 힐끔 바라보자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맑게 웃는 걸 보니 약간은 불편해졌다.
바보가 아니기에 그녀의 그런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 않지만. 난감하기는 했다. 그녀를 밀쳐내거나 선을 긋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여전히 연애에 대한 마음은 부정적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철벽을 치는 상황이었으니.
정환의 관심은 아영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아니, 지금 보면 당시 둘 사이의 묘한 관계가 단순한 우정이었나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변했다.
정환이는 약간 위험한 사업을 하는 중이었다. 마치 곱게 키운 여동생을 돌보듯 아영이를 돌보고 있는 것. 미성년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 때문에 우려할 법도 했으나, 상대가 정환이었기에… 사실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두 사람이 마치 자식 키우듯이 키우는 강아지 흑구는 한 달 동안 불쑥불쑥 자랐다.
그들뿐만이 아니더라도 생활에 안정을 찾은 젊은 외로운 남녀들은 어느새 의지할 사람들을 찾아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요한은 굳이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 있는 상황인 만큼, 멸망 이후의 감정은 충동적이고 일시적이다. 치정 문제로 살인사건만 벌이지 않는다면야, 개인사는 개인사였다.
산을 넘어가는 요한과 세리는 틈틈이 먹을만한 산나물이나 버섯 등등을 캤다. 버섯은 재호에게 가져가면 식용과 독성을 알아서 잘 가려주니 눈에 보이는 대로 캐면 되었다.
“오빠. 이거 또 있어.”
세리의 부름에 요한이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세리가 ‘이것’이라 칭한 것은 발자국이었다.
“몇 번째지?”
“여덟 번.”
짐승의 발자국 같기도 한데, 이 섬에 존재하는 짐승 중에 이런 발자국을 가진 짐승은 없었다.
가운데 발바닥 쪽은 움푹 들어가 있고 그 주변으로 네 개의 뾰족한 발톱 모양의 자국. 처음 보는 형태의 발자국이었다. 마치 작은 공룡 같은. 재호나 박 노인도 발자국을 보고선 고개를 저었다.
처음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는, 섬 안에 변종이 존재할 거라고 판단하고 몇 날 며칠을 섬을 샅샅이 뒤졌었다.
결과적으로 섬 안에 변종은 없었다.
‘과거에 변종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가 요한이 일단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발견. 묘한 위화감과 생존본능이 전신을 두드린다. 요한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정착 후 한동안 너무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이제 다시 긴장감을 끌어올릴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