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 *
“헬기를 보고 싶은데.”
“안내해 드릴게요.”
요한은 리나를 따라 헬기장으로 이동했다. 공군에서 근무하던 시절, 심심찮게 하늘에서 보던 그 헬기다. AW-139. 나름 신형 헬기라고 들은 것 같은데.
“헬기는 어떻게 구한 거지?”
“흐흐, 내가 일하던 해경 근무지를 털었지. 거기 구조는 내가 꿰고 있었거든.”
요한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조종사 루카였다. 그는 자신이 헬기 조종사라는 사실이 못내 뿌듯한지 늘상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다른 직종은 몰라도 헬리콥터 조종사만큼 특별한 인재는 없으리라.
이 기동력은 분명히 두고두고 쓸 일이 있을 거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중대한 수확.
요한으로서는 기분이 좋은 걸 감출 수가 없었다. 가장 시급했던 추가 의료인에 쓸 만한 전투인력 두 명, 그리고 캠프의 기동력을 몇 계단 상승시켜 줄 헬기와 헬기 조종사의 합류까지.
한 방울의 희생도 없이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스위퍼에게 얻어터진 채 주둥이를 내밀고 있는 저 깐죽이조차도 예쁘게 보일 만큼.
“신도에 헬기장으로 쓸 만한 곳이 있나 봐야겠네. 우선 물자와 사람들부터 이동하자. 물자들은 어떻게 할래. 원한다면 너희 물자를 다 쓸 때까지는 따로 관리할 수 있게 해주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요한 님. 편하신 대로 하시면 돼요.”
“그래도 되겠어?”
“굶기진 않으실 거라 믿으니까요.”
도대체 이 사람은 뭘 믿고 자신에게 이렇게 신뢰를 보내는 걸까. 요한은 신뢰가 기꺼우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주의는 여전했으니까.
배를 타고 돌아가면서도 그녀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려 고민했지만, 쉽사리 그녀의 결정이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우리의 도움이 없더라도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들이라고 보기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애초에 수녀라는 직업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신도를 버리더라도 예지를 따르기로 한 부분에서부터 그녀를 이타적인 바보라고 부르기 어려웠으니까.
결국, 요한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배 안에서 슬쩍 그녀에게 물었다.
“난 솔직히 네가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그렇게 신뢰하는지 모르겠다.”
“제 모든 행동은 계시에 따를 뿐이에요. 요한 님. 요한 님께서 제 꿈을 같이 보셨다면 이해하실 거예요.”
“미래라… 네가 본 미래 중에서 나한테 말해 줄 만한 다른 미래들은 없어?”
요한의 질문에 리나가 갑자기 볼을 붉혔다.
왜 볼을 붉혀?
희한한 타이밍에 홍조를 띠는 걸 보며 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부분?”
“제가 가장 처음 요한 님과 함께 있는 꿈을 꾼 것은, 요한 님과 혼인하는 미래였습니다.”
“…….”
뭐라는 거야, 이 여자가?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세리가 마신 것도 없는데 헛기침을 뱉어냈다. 순식간에 묘하게 된 분위기. 요한은 인상을 찡그렸고 다른 사람들은 슬그머니 세리를 쳐다봤다.
복잡다단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한테 이렇게 호의적이었던 거군.”
수줍은 소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분명히 신뢰할 만하긴 하다만.
본의 아니게 분위기가 약간 서늘해졌다. 요한은 웬 호들갑이냐는 듯 심드렁한 시선을 보냈으나 옆에서 세리의 눈치를 보던 스위퍼가 요한을 툭 쳤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나 원 참…….’
제 성격을 안다면 어차피 현실 가능성 없는 얘기라는 걸 알면서 뭘 그렇게까지 쳐다보는 건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예지몽인데.”
“그렇습니까.”
“미안한데 난 연애든 결혼이든 육아든 전혀 생각이 없거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눈앞에서 고백을 거절하면서도 요한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로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사랑은 사치다. 연애는 없다. 누차 강조하던 것 아니던가.
다행히 그녀는 한 번에 말귀를 알아들었다.
“괜찮습니다. 여러 미래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긍정적인 태도는 좋네.”
살포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한의 대답과 리나의 반응이 적절했는지 잠시 경직됐던 분위기도 어느새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여전히 미심쩍긴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었던 호의의 원인을 알게 된 건 큰 수확이었다.
“그래, 그것 말고 다른 꿈은?”
“음…….”
리나가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말을 하기 전 잠깐의 상념에 잠기는 게 버릇인 듯.
“사람들과 싸우는 장면을 봤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싸우는 내내 요한 님께서 굉장히 슬퍼하셨어요.”
“사람이 죽으면 슬프지. 네 꿈에선 꼭 누군가 죽는 것 같네.”
“이런 세상이니까요.”
“그래. 이런 세상이지.”
“그런데 누군가가 죽어서 슬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싸움 자체가 아주 싫고, 피하고 싶고, 슬퍼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
“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슬프고 피하고 싶은 싸움이라. 지금으로써는 상상이 되질 않는다.
전투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될 수 있는 대로 폭력사태는 피하고 싶지만, 전투 자체가 슬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당연하게, 살아야 하니까 누군가를 죽이는 것뿐.
그때, 배가 잠깐 흔들렸다. 스위퍼가 조타석을 향해 소리쳤다.
“정환아! 형들 토한다!”
“죄송해요!”
초보 항해사 정환을 향해 한번 잔소리를 해주니 다시금 운전이 잠잠해진다.
“내버려 둬. 초보치곤 잘하네.”
몇 안 되는 주제로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일행은 신도로 도착했다. 오늘 아침 수색을 나갈 때보다 6명이나 많아진 인원이었다.
“마침 이쪽에도 교회가 하나 있으니까, 그 근처에 자리를 잡으면 될 거야. 막내는 얘들 교회랑 식당이랑 상황실 안내해 주고 쉬었다가 저녁 먹고 상황실로 모여.”
조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요한은 조원들보다 먼저 상황실을 향했다. 상황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긴 했으나, 복지관 3층 강당을 개조한 통제용 사무실로. 대형 지도와 HAM라디오, 지역 확성기, 작전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저씨.”
“오, 요한 왔니?”
“네,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수고는.”
요한이 얻은 보물 중 하나. 설비부터 하드웨어 전기 기술까지 만능 기술자인 김고인 씨. 이름이 콤플렉스라 김 씨 또는 아저씨로 불리기 원하는 그 덕분에 수월해진 것들이 한둘이 아녔다.
“한번, 볼까요?”
김 씨가 앉아 있는 라디오실에는 테라스에 걸린 대형 안테나와 상황실 한쪽을 채운 설비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마추어 무선 HAM 라디오.
부평구청과의 20km라는 거리를 통신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구청 용병단에게 전진기지의 역할을 기대하는 만큼 끊임없는 연락을 취해야 했으니까.
휴대용 무전기나, 군용 무전기로는 주파수 한계가 있을 것 같아 미리 어느 정도는 입을 맞춰놓고 나온 상황.
요한은 신호를 보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신호를 보냈다.
여전히 신호가 없다.
“연락이 없구만.”
“뭐, 확인하면 다시 신호가 오겠지요?”
몇 번 시도해보다가 포기하려던 때,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라디오 음성이 들렸다.
-거기 ---냐, 애송이?
“수신 감도 불량.”
-잠시 대기.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한참 동안 들리더니 이내 다시 한번 딸깍거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잘 들리냐?
“네. 들립니다.”
-늦었군, 애송이.
“이것저것 하다 보니. 별일 없으십니까?”
-아주 많은 일이 있지.
“무슨 일이요?”
-일단 이것저것 받아간 애송이가 입 싹 씻었고.
요한이 실소하듯이 웃었다.
“정정하셔 보이는군요.”
-변종 한 마리가 왔었다.
“흠.”
-리스트에 있던 놈이더군. 키다리라고 이름 붙인 녀석이었어. 상대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피해가 큰 거래였는데 제품이 밥값을 해서 다행이지.
키다리. 골룸이랑 비슷한 수준이거나 그보다 좀 더 낮은 단계의 변종이다. 사실상 좀비 웨이브와 대기감염만 조심하면 막기 어렵지는 않았을 터다.
그보다 궁금했던 건.
“어쩌다 웨이브를 맞으셨죠? 인원 분배에 실패하셨습니까?”
-아니다, 이 자식아. 웨이브가 터진 캠프는 20명이었어.
“…….”
-그래서 캠프 하나 더 늘렸다. 15명씩으로. 참, 그리고 서울 쪽에 거래를 텄어. 아마 서울 쪽 상황도 심심찮게 전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낯선 사람은 조심하시고요.”
-내가 애냐? 엉?
“그보다 제가 보내드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어떻긴 뭘 어때, 개처럼 뺑이치고 있는 거지. 쓰레기들.
이번엔 약간 더 크게 웃음이 나왔다.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약간은 청량해진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도 정신을 못 차리던 사람들. 고생 좀 해 봐야 한다.
-그래도 뭐, 싹수가 보이는 친구들도 있고.
“다행이네요. 참,”
요한이 말을 꺼냈다. 전해 주어야 할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좀비의 행렬을 봤습니다.”
좀비 행렬. 웨이브랑은 좀 다르지만, 분명히 특이사항이랄 만한 부분이었다.
요한은 자신이 봤던 상황을 가감 없이 설명했다. 돌아온 건 터프한 욕설이었다.
-우라질. 정말이지 가만히 놔두질 않는구먼. 아무튼, 고맙다. 애송이야.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그랴.
머리 한구석이 지끈거리게 아파져 왔다. 20명 규모에서 웨이브를 맞은 적은 드문 일인데.
요한이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의식이 상념 사이로 침잠한다.
* * *
긴 하루가 지나가고, 최소한의 경계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상황실로 모였다.
회의 주제는 이번 수색의 내용과 특이사항 점검.
그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사안은 바로 영종도에 잔존한 군인들과 가까운 미래에 이곳을 침략할지도 모르는 변종의 존재였다.
영종도 잔존 세력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했다.
일차적 방관.
“아무래도 세력 규모도 모르고, 부딪힐지 아닐지도 모르는 세력을 먼저 공격하는 건 좀 그렇지.”
굳이 분류하자면 온건파인 하진과 혁의 입장은 단호했고. 다른 사람들은 요한에 판단에 맡기겠다는 의견.
당연한 말이지만, 새로 합류한 인원들은 이 대화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저, 그런데 요한 씨가 군인들과 싸우자고 하면 싸울 생각들은 있는 거예요?”
베르다가 코에 걸쳐진 안경을 들어 올리며 묻자 스위퍼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싸우라면 싸워야지.”
“아니 군인들이랑 어떻게…….”
당연한 반응에 캠프 요한 사람들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좋아. 그럼 다른 의견이 없으니 영종도의 군인들은 좀 더 지켜보기로 하자. 더 중요한 것들이 눈앞에 있으니까. 사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추수야. 이번 추수가 얼마나 성공적이냐에 따라 내년 일 년이 결정될 수 있으니까. 생산조 수색조 가리지 말고 박 노인께서 요청하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라져.”
“그리고 문제는 변종인데…….”
오늘 처음 들은 이야기인지라 명확한 솔루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대신 요한은 낮에 리나에게 들었던 정보들을 종합해서 전달했다.
“일단 리스트에는 없는 신규 변종이야. 증언만 놓고 보자면 노 패턴인 듯하고. 꿈이라지만 부대가 전멸할 정도면 최소 다윗급의 전투력은 가졌다고 봐야겠지.”
긴장감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변종 다윗과의 치열한 전투가 떠오른 탓이다. 특히 그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었던 하진은 팔꿈치 윗부분이 시리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