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진주하 대령은 요한과의 접촉과 화해를 시도했으나, 요한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여기서 굳이 그들과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줄 마음은 없었다. 요한이 원하는 건, 그들을 제거할 명분과 완벽한 승리를 위한 계획, 그리고 타이밍뿐이었으니까.
며칠 사이 해군 지휘부에서도 심경의 변화가 생긴 듯했다. 결정적으로 요한이 일부러 자신들을 내쫓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는 호의를 가장하지 않았다.
당연히 식사나 향응 제공을 강제하지도 못했다. 사실상 요한 일행을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쾅! 쾅!
“아이, 깜짝이야. 또 시작이네. 저 빌어 처먹을 것들.”
밭일을 보던 한 여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수색’을 하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거나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사람이 없는 민가를 뒤진다든가 하는 일 말이다.
여기저기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에 주민들이 겁에 질린 건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섬 내부의 파밍을 진작에 끝내 놓은 상태였다. 결국, 낚시 따위를 하거나 몰래 과실들을 따 먹거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여전히 그들은 배를 출항시키지 않은 채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물론, 요한으로서도 그들이 그냥 내빼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본거지의 위치와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로서는 상상도 하기 싫은 위험부담이었으니까.
마치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발칸반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던 두 집단 사이의 신경전은 결국 사흘째 되던 날 대형 사고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뒤늦게 합류한 요한은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신도 2리의 한 민가 앞. 모든 주민이 동그랗게 모여서 민가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반대쪽으로는 몇 명의 부사관들이 얼굴에 비웃음을 걸고선 내려다보듯 턱을 올려세운 채였다.
멀리서부터 따각따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났다.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디 보자…….’
장교들의 표정을 보니 이 일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노선을 바꾸기로 했군.’
섬 관리자와 주민들의 민심을 얻는 데 실패했고, 해결책이 보이질 않으니 사흘 만에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크게 한판 벌이고 와, 싹 모아놓고 정신교육을 해 주지.’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장교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 쪽 사고뭉치는 혁이었다. 그는 한 여인을 등 뒤에 두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장교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황파악을 끝낸 요한이 혁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 자식이, 윤희를, 성희롱했어.”
“아, 무슨 소리요. 빈집인 줄 알았다니까.”
어설픈 군인의 변명에 윤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있는데 빈집이라니! 그리고 내 몸 더듬었잖아요!”
“이불 안쪽에 물건이 있나 찾은 거라고 말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후 사정도 듣지 않고 이렇게 폭력을 써서 되겠습니까?! 이거, 지난번 일 때문에 복수하겠답시고 트집 잡는 것 아닙니까?”
“이, 이익-”
타겟 좋고, 상황 좋고.
주민들 복장에 불을 질러서 한곳에 모이게 한 것은 좋았는데, 하필이면 혁을 골랐다. 역시나 주민들의 표정이 흉흉하다.
요한으로서는 최선의 상황이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혁.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혁이 화를 내면 주민들이 느끼는 감정의 여파가 크다.
정의 바보의 위력이랄까.
요한이 뭔가 일을 벌이면 ‘저 사람 또 무슨 무서운 짓을 꾸미지?’ 로 받아들일 일도 혁이 화를 내거나 사고를 치면 ‘상대방이 잘못했네.’ 라고 생각하기 십상.
요한으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지만, 어쨌든 현실은 그랬다.
명분도 좋다.
명색이 군인이라 하는 자들이 약자를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아녀자를 희롱하다니. 아니 될 말이지.
요한은 잠시 무대의 주역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후, 멀리서부터 느긋하게 다가오는 대령이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무장했군.’
장교들의 허리춤에 권총집이 달려 있다. 부사관들도 평소에는 거의 하고 다니지도 않는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총기를 가진 인원은 열 명 이내.
요한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해군 장병 여러분. 더 이상 여러분의 폭력 행위를 좌시할 수 없습니다.”
“허허, 요한 님.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요.”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해를 풀기에 앞서서 모든 무장을 해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이 사람이 어디서!”
소위 한 명이 버럭대며 나서자 진 대령이 그를 제지했다.
“지금 대한민국 해군에 명령하는 거요?”
“명령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누가 봐도 저희가 핍박을 당하는 처지지 않습니까. 그저 저희는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무장을 해제하시거나 섬에서 당장 나가주세요.”
“폭력이라니 당치도 않아. 게다가 나가라니. 이곳 원주민도 아니라면서?”
“하지만 이곳의 좀비를 정리하고 물자들을 모으고 터전을 가꾼 건 저희입니다.”
“그런 걸 법으로는 불법 점거라고 하는 거지.”
치열한 공방전에 조금은 피로해졌다. 총을 들어라. 더 강하게 위협하고 몰아붙여.
한 명만 걸려들어도 충분했다. 요한은 마침내 그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막말로 정부도 무너진 마당에 군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지 폭력성을 가진 무력집단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건방진!”
마침내 한 소위가 총기를 뽑아 들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직 장전되지 않은 상황. 요한은 천천히 허벅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천천히 마치 손에 가득한 땀을 닦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지금.’
요한이 허벅지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는 것과 장전하는 것, 발사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탕!
첫 번째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소위를 타격. 두 번째는 바로 눈앞의 대령.
탄환은 대령의 이마에 틀어박혔고, 대령은 동공이 확장된 채 뒤로 넘어갔다.
뒤이어 총기를 드는 간부들을 향해 세 번째, 네 번째, 탄약이 쏘아졌다.
“으아아악!!”
타당! 탕! 탕!
스위퍼와 정환은 요한의 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격발이 신호탄이다. 요한의 손에서 총기가 격발되는 순간.
정환과 스위퍼가 각각 인근의 장교 두 명의 목을 찌르고 권총을 뺏어 들었다.
“전부 엎드려!”
“악, 아악!”
주민들은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고 해군 수병들은 당황한 채 혼비백산하게 도망쳤다.
탕, 탕! 순식간에 마을 한복판은 격전지로 변했다.
일부 반격을 시도하는 부사관들이 있었으나 곧바로 몸이 벌집이 됐다.
장교, 부사관들이 쓰러지자 전투는 학살이 됐다.
해군들이 발사한 총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허공을 갈랐을 뿐.
수색 조원들은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진은 달려드는 수병의 목에 의수를 꽂아 넣었다. 우르르 달려들던 수병들도 순식간에 꼬치가 된 모습을 보고선 그대로 주저앉았다.
“막아, 막앗!”
누군가 정환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려 하자 흑구가 달려와 놈의 다리를 물었다. 정환이 그대로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도망치는 병사들의 길목을 피오와 베르다, 그리고 소희가 가로막았다. 여기저기서 관절 꺾이는 소리와 타격음이 들리고 이미 멀찍이 도망간 병사들의 등 뒤와 다리로 화살이 날아가 꽂혔다.
신도는 피와 신음과 비명으로 범벅됐다. 고작 몇 분 만에 지상 위에 두 발로 서 있는 군인들이 없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 봤자 날아오는 것은 스위퍼와 하진의 단검이었다.
시작은 전투였으나 끝은 학살로 변했다.
요한은 핏물이 낭자한 마을 어귀에서 꼿꼿이 선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욱, 매캐한 연기가 입과 코를 통해 뿜어졌다.
애초부터 경험치가 달랐던 이들 간의 싸움. 단순히 무력으로 압박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던 사람들과 그들을 만난 순간부터 생사전을 각오하고 틈만 보이면 그들을 죽이려던 자들과의 싸움.
결말은 빤했다. 일방적인 결착이었다.
좀비와의 싸움을 차치하고서라도 대부분 조원이 골드문, 백종수, 특수부대와 용병단, 서생연과의 두 차례 싸움을 거친 백전노장들이다.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 왔고 또 언제든지 죽여야 한다는 각오가 된 전사들. 더러운 장교와 간부들을 처리하기 위해 죄 없는 병사들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들.
비록 그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갈 것을 앎에도.
병사들 대부분 죽거나 죽어갔다.
살아 있는 군인은 캠프 마리아 출신의 사람들이 제압한 사람들과 소희가 다리를 노려 쏜 사람들뿐이었다.
“…다 죽인 거야?”
피오와 베르다가 병사들을 포박해 오며 놀란 토끼 눈을 했다.
“한 명도 안 죽이고 제압했다는 게 더 놀라운데.”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모를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한다. 부상자가 좀비로 변할 수도 있고 언제든지 반격을 해올 수 있으니까.
복잡한 표정으로 전투 현장을 바라보는 신입들을 보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행동은 교정해 줄 필요가 있겠군.
요한은 시체들의 뇌를 파괴하도록 지시한 후 옹 상병에게 무전을 쳤다.
“옹아. 주갑판에 남은 애들 처리해라.”
-옛슴다.
“자, 잠깐. 형.”
혁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급하게 요한을 불렀다. 자신이 벌인 일이 이 정도까지 크게 번질 줄은 몰랐을 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을 텐데. 이딴 유약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거다.
“혁아.”
“…….”
“잘했다.”
매번 전투 때마다 이렇게 멘탈 케어를 해 줘야 한다는 사실은 번거롭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의 일등공신에게 치하를 좀 해 줄까.
“네 덕분에 놈들의 시커먼 속내를 깨달았어. 역시 죽일 필요가 있는 놈들이야. 가만히 놔뒀으면 분명 약탈자가 됐을 거다.”
“그, 그럴까?”
무슨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그래. 너는 할 일을 했고, 네 덕분에 주민들을 구했어. 라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럼 당연하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수탈하고 약탈하고 겁탈했을 놈들이야.”
“맞아…….”
“통제되지 않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혁아. 놈들은 결국 어울림 교회나 서생연이랑 똑같은 놈들이야. 아니 더한 놈들이지. 아닌 척 접근해서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을 놈들이었으니까.”
요한의 말에 혁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시대에 군인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그렇지?”
스위퍼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시체들을 정리했다. 탄약이나 식량을 좀 소모하기는 했지만,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새로운 동료들의 전투력 측정도 끝냈고, 그들에게 우리의 포지션도 명확하게 밝혔다.
우리는 호구도, 선한 피해자도, 착한 일을 하며 사람들을 구하는 구원자도 아니다.
우리는 빼앗고 지키는 자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자신들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었다. 매번 듣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거랑은 다를 테니까.
분명 이 일로 우리가 가지는 폭력성에 대해 반감을 품는 사람도 있을 거다. 죄 없는 사병들까지 공격했다고 속상해하거나 분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금 완벽한 승리로 시체들 앞에 서 있는 수색 조원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수색조는 강하다.
수색조에게는 힘이 있다.
이들이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클리어.
때마침 타이밍 좋게 옹 상병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요한은 피를 쓱 닦으며 씩 웃었다.
“아니, 대장 형씨. 제발 무서우니까 그 타이밍에 웃지 말아 줄래.”
“왜, 뭐. 섹시하기만 하구만.”
세리가 덧붙이자 요한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둘이서 뭐라는 거야.
뒷정리를 한 조원들은 주민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전리품을 챙기러 이동했다.
솔직히 사람을 죽이고 웃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품속에 들어온 전리품을 생각하면 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군함.
“헬리콥터에 이어 군함이라니. 상상도 못 했는데.”
“빛 좋은 개살구지. 이런 걸 운용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이나 기술도 문제지만, 이걸 운용할 연료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요한이 관심 있는 건 떡보다는 떡고물이었다.
중화기는 다른 것보다 운용할 수 있는 인력과 기술이 가장 문제다. 있어도 사용법을 모르니 그림의 떡. 그러나 지금 함정 주갑판에 달려있는 기관총과 대공포는 다르다.
“미스트랄이네.”
미스트랄 지대공 휴대용 유도미사일.
대천 사격장에서 실사격 경험까지 있는 요한의 공군 현역 시절 특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