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요한은 왔던 길을 따라 노량진으로 이동했다. 그 뒤로 수색조 인원들이 뒤따랐다. 부상한 정은과 에디, 그리고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진수는 용산역에 남았다.
노량진역 환승 통로에 도착한 요한은 조원들을 뒤쪽으로 물리고 통로의 끄트머리에서 노아를 기다렸다.
잠시 후, 노아가 도착했다. 자신처럼 동료들을 숨겨두었는지, 진짜 혼자 왔는지는 몰라도 주변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멀찍이서 보는 모습이었지만,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모습이 생생했다.
노아가 걷기 시작하자 요한도 따라 걸었다.
마침내 마주 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시선을 주고받기라도 하듯, 말없이 서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열린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숍 안에서도 사무실로 보이는 깊은 곳까지 들어서자 완벽한 밀폐공간이 드러났다.
이 정도면, 저격이나 함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요한의 눈앞에 앉은 노아는 기억 속에서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까끌까끌하던 수염도 없고, 고생한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 주던 거친 피부도 기억보다는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아였다.
“정말로 혼자 왔네. 배짱이 두둑한데.”
요한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수염 자른 모습도 잘 어울리네. 신노아.”
이름을 불린 그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날 아는군.”
“그러게. 넌 날 모를 텐데 말이야.”
요한의 음색은 담담했다. 반가움, 또는 서글픔을 지우기 위한 노력.
“날 어떻게 알지?”
“미안, 말해주고 싶은데, 말해도 믿지 않을 이야기라.”
“그래. 뭐,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
노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눈으로 곡선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방비하게 까딱대는 꼴이 마치 친구라도 마주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절제된 움직임에서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튼튼하게 다져진 근육이나 뿜어져 나오는 기세만 봐도 쉽사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이왕이면 커피도 한잔하고 싶은데, 종업원이 없네.”
“재미없는 농담은 여전하고.”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편안한 자리였다. 요한은 그를 안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믿든 믿지 않든, 털어놓고 싶었으니까.
“왜 나를 친구 대하듯이 대하지.”
“그것도 마찬가지야. 말해도 재미없는 농담으로만 들릴 거라서.”
“흐음.”
노아가 빤한 시선을 보내며 팔짱을 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드러났다. 캠프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지 고민하고 있겠지. 요한은 그의 생각을 끊으며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왜 먼저 공격했지?”
“…우리가 먼저 공격했나.”
요한의 말을 들은 노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들이 먼저 공격한 것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다.
“몰랐나.”
“몰랐다기보단.”
“캠프 장악이 덜 됐군.”
“…….”
“내부 분열인가. 캠프 내에 모든 침입자를 사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군.”
“와, 정말 놀라운데. 보통 이 정도 대화로 그렇게 정확하게 핵심을 파악할 수는 없을 텐데.”
요한은 말이 없었다. 선 뚜렷한 노아의 얼굴이 그를 향해 바짝 다가왔다. 특유의 날카로운 콧날에 벨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간자를 심어 놨나.”
“믿든 아니든 자유지만, 그건 아니야.”
“하긴, 그랬으면 더 좋은 타이밍이 많았을 테니까.”
노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무실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어디선가 캔 음료를 찾아 들고 왔다.
“먼저 공격한 건… 안타깝게 됐어. 하지만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먼저 영역을 침범한 건 너희들이니까.”
“경고?”
“신길역 근처에 경고판을 걸어뒀는데, 못 봤어?”
요한이 신길역 승차장에 박제되듯 세워져 있던 좀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느껴지던 이상한 위화감이 동시에 기억났다.
“한 가지 묻지.”
“얼마든지.”
“우리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지?”
“흐음.”
요한의 직설적인 질문에 노아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한이 기억하면 그라면 흔쾌히 대답하지 못한 질문에는 결국 대답하지 않는다. 고민될 때는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으니까.
요한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생각하고 있었던 가설을 확신에 가깝게 내뱉었다.
“캠프 춘향이군.”
역시나, 그의 반응은 솔직했다.
캠프 춘향과의 커넥션이 있었다.
수색조가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이렇게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중요한 거래를 앞둔 용병단이 자신들을 팔아넘겼을 리는 만무하고, 그들을 제외하면 이곳의 경로와 목적지를 알고 있는 유인한 생존자들은 캠프 춘향뿐이다.
역시, 이유 없는 호의는 무서운 거라니까. 요한은 중얼거렸다.
“내가 안일했군.”
“확실히, 부주의하긴 했지.”
“캠프 춘향과는 무슨 관계지?”
“뭐,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그저 우리가 그들을 건드리지 않고 공격하지 않는 대신 우리의 영역에 들어오는 자들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거래를 한 거지.”
“그들 입장에서는 그냥 모른척하거나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만약 그냥 도망치거나 그 방향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을 전부 잡아 죽였겠지. 나는 빚을 반드시 갚는 사람이니까. 개백정의 남은 부하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면 그런 생각은 못 할걸.”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캠프 춘향으로서도 본인들이 살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일 뿐이었다. 비록 그 선택이 자신들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버렸지만.
“이번엔 내가 묻지. 여기는 무슨 볼일로 왔지?”
“말했잖아.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무슨 물건인데?”
“…….”
“비밀이 많아. 협상이 안 되잖아. 나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대답해주고 있는데.”
노아가 음료수를 꿀떡꿀떡 넘겼다. 인상을 찡그리고선 미지근하다며 구시렁거렸다.
“설계도를 찾고 있어.”
“설계도라…….”
“어떤 물건을 만들어야 하거든.”
요한은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그렇군. 시대 상황과 맞지 않는 단어인걸.”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그때까지만 지켜보고 있어. 건드리지 않으면 물지 않는다. 만약 건드리게 되면 너희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들었겠지만, 우린 개백정을 잡은 캠프니까.”
요한의 경고는 진심이었다. 지지 않는다. 전면전이든 전술전이든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감에 압도라도 된 듯 노아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난 너희를 보내줄 수 없어.”
“후회할 텐데. 이유는?”
“내 동료들을 죽였으니까. 그것도 아주 아끼던.”
“먼저 공격한 게 너희의 동료들이야. 그렇게 따지면 내 동료도 죽었고.”
“유감이네.”
“유감이지.”
“하지만 그래도 안 돼. 너희가 먼저 경고판을 무시하고 들어왔고, 나는 내 동료들을 죽인 놈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확실히 많이 변했다. 이미지가 그때보다도 더 차갑고, 더 사나워진 느낌이다.
“어차피, 안 보내줄 거라면. 왜 불렀지.”
“그건,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었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인사?”
“개백정을 네가 잡았다며. 덕분에 우리가 살았으니. 인사는 해야지.”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위험을 감수했다고?”
“빚이니까.”
“멍청하네.”
“진짜 직설적이구나, 너.”
노아가 계면쩍다는 듯 웃었고 요한도 마주 웃어주었다.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 그대로다. 자신이 기억하는 신노아.
“빚이라고 생각되면 갚아야지. 그게 네 신조잖아. 그냥 보내줘. 싸우지 말자.”
“날 참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잘 알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요한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가며 다음 카드를 꺼냈다. 여기서 쐐기를 박고 협상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승희랑 수현이, 선재형이랑 선화는 잘 지내나.”
“…너 뭐야?”
요한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들이 등장하자 그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급변했다.
마치 남극에라도 온 것처럼 순식간에 얼어붙어 냉랭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눈빛은 당장에라도 요한을 잘게 썰어낼 듯한 표정이었고, 목소리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UDT에서 근무했던 건 지금 동료들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겠지. 별로 숨길 만한 비밀도 아닌데.”
쾅!
노아가 책상을 내리쳤다.
요한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너, 대체, 뭐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신노아. 믿는 것은 네 자유지만 내 말은 전부 진실이니까.”
“당장 말해. 그 입을 찢어놓기 전에.”
“난 회귀를 했어.”
요한의 말에 노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한마디로 죽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야. 나는 지난 생에서 똑같은 좀비 사태를 겪었고, 3년 동안 살아남았어.”
“…….”
“그리고 죽기 전까지 너와 함께 했다. 동료로서. 근 일 년 반 동안.”
요한은 순순히 비밀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만큼은 털어놓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노아의 눈빛이 미친 사람 보는 듯했으나, 그저 진실하게 사실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같은 동료들을 만났고, 같이 변종과 싸웠고, 함께 개백정과 싸웠지만 패배했지.”
“정말 얼토당토않은 얘기네. 미친 소리야.”
“그래서 너를 알지. 잘 알아. 네 여동생만큼이나. 그래서 나는 지금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다. 신노아. 지금 나는 전 동료들과 현 동료들이 동시에 죽어 나가는 걸 보고 있어. 싸움을 멈춰라. 부탁한다.”
요한의 호흡만큼 길었던 말이 끝나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믿을까?
믿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심이 많은 친구니까.
믿으면 함께하고, 믿지 않으면 싸울 뿐이다. 그뿐이다.
“그렇군.”
그리고 그가 한 마디 내뱉는 순간, 요한은 무언가 가슴속에서 왈칵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친구.”
노아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얼굴로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렇게 반응하자 되레 당황한 건 요한이었다.
“…뭐야?”
“그냥, 나는 너를 모르지만, 너는 나를 몇 년 동안 봤다며. 제법 오랜만에 봤으니 반가울 것 같아서. 네 얼굴만 봐도 날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알 수 있거든. 전 동료에 대한 예의랄까.”
“하.”
주책맞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코끝이 찡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이번 생에 죽어서, 다음 생에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스위퍼나 하진을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렇겠지.
“두 번이나 이 짓거리를 하다니. 정말 고생이 많네.”
요한의 복잡다단한 표정을 본 노아가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지간히 좋아했나 보네. 내가 좀 마성의 바이 섹슈얼한 매력이 있긴 하지. 혹시 사귀었냐?”
“뭐래, 정신 나갔나.”
“흠, 그건 아니군.”
“다른 사람들은 건강한가.”
요한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노아의 얼굴에 급격하게 수심이 드리워졌다.
“승희는 죽었어. 선화도. 부탁이니 어떻게 죽었느냐고는 묻지 마라.”
“…….”
딱 좀비 사태가 3개월 일찍 당겨졌을 뿐인데 달라진 게 너무나 많았다. 원래는 3년 가까이 죽지 않았어야 할 이들이 고작 10개월 만에 모두 죽었다는 소식.
개백정에게 죽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끔찍한 죽음이었을 거다. 상상하기도 싫은.
“선화는 내 전 연인이었지.”
“개 X발. 엿 같은 상황이네. …면목이 없다.”
노아가 뱉은 두 마디 욕에서 오만가지 감정이 드러났다.
“미안하다.”
지키지 못했구나.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복수는 내가 직접 했으니까.”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지. 내가 직접 죽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일 뿐이야. 말해. 개백정은 죗값에 맞는 고통을 치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