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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서바이벌-135화 (135/176)

<135화>

으르렁거리듯 감정을 내뱉는 노아를 보며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라는 걸 깨달은 노아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여기저기에 개백정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난리 통에도 이 정도 영향력이면, 정말 난 놈은 난 놈이다.

그 명성에 비해서 어쩌면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승부였다. 모든 것이 대비되고 안배된 대로 진행됐고, 놈은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바뀌었지만, 놈의 무게감만큼은 죽어서도 확실히 여운이 남았다.

“어떻게 죽여도 모자란 건 확실하지만, 시체까지 한 점 한 점 난도질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했지.”

“사랑해, 친구. 네 말을 들으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진지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요한은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때 팅, 하고 무언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기에 걸린 권총 소리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지?”

“글쎄.”

요한의 물음에 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밖에 생존자라도 돌아다니나 보지. 신경 쓰지 말자고.”

잠깐 머리를 굴리던 요한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총성은 없었다. 제 동료들이 쓸데없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요한과 노아는 마치 담소라도 나누듯 자잘자잘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즐거웠고 해후는 기뻤다.

하나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요한은 캠프 운용에 대한 어려움을 털어 놓는 그를 다독이듯 고개를 끄덕인 뒤 금세 웃음기를 지우고 그에게 단호한 시선을 보냈다.

“오랜만에 친구를 봐서 반갑긴 한데, 자잘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시 한번 본론으로 들어가지. 너무 시간을 끌면 성질 급한 내 동료들이 공격해버릴지도 몰라서. 협상을 마무리하자.”

“그래. 좋지.”

노아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고선 씩 웃으며 덧붙였다.

“너랑 이야기한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왠지 너랑은 잘 맞았을 것 같다.”

“잘 맞았지.”

“싸움도 좀 하나?”

“글쎄. 한 몸 간신히 지키는 정도.”

흐음, 노아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개백정을 죽여준 대가로 내 친구들의 죽음은 묻어주마. 기쁘게 생각해도 돼. 이 난리 터지고 처음 있는 일이니까.”

“고맙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여기서 돌아가.”

요한은 그의 표정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내보내지 못해 안달인 걸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너희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충분히 난리가 날 만한 일이야. 그런데 우리 영역 안에서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조차 묵인한다면 난 캠프 리더에서 끌어내려 질지도 몰라. 인망을 완전히 잃을 거야.”

역시, 요한의 생각과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 그의 핵심적인 동료였던 사람들이 초기에 죽어 나가고 개백정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을 빠르게 흡수하다 보니 캠프의 장악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개백정의 간자가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린 가야 해.”

“도대체 왜? 왜 우리가 있는 걸 알면서도 바득바득 들어왔지? 왜 이렇게 무모하게 하는 건데.”

후- 요한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결국, 마지막 이야기까지 꺼내야 했다. 조금은 망설임이 들었지만, 털어놓는다고 해서 제게 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곧 원전이 터질 거야.”

“원전이 터진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원자력 발전소가 터져서 좀비 말고 방사능과도 싸우게 생겼어. 그래서 이 근처에 있는 어떤 물건의 설계도가 필요해.”

“원전이 터진다는 건 어디서 얻은 정보인데? 확실해?”

“그건 절대 말해줄 수 없지.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우리는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쉘터를 갖고 있었고 이곳에 들어올 이유가 한 개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바득바득 이곳으로 들어왔어.”

리나의 존재는 특급 보안사항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미래를 알 수 있는 예지자의 존재는 한바탕 전쟁을 일으키고도 남을 만한 영향력을 가졌으니까. 이것만큼은 캠프 밖의 누구에게도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이었다.

“정말이지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렸네.”

노아가 팔로 뒷목을 감싸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내외적으로 모두 난리가 난 그였기에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없겠지.

“그럼 우리도 안전한 게 아니잖아.”

“방사능 예방과 해독을 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라도 있으면 안전하겠지.”

“너, 진짜 화법 이상한 거 알아?”

“그런가.”

노아가 머리에 둘렀던 팔을 풀더니 책상을 퉁, 소리 나게 쳤다.

“잠깐 우리 쪽 고문을 불러도 될까. 사실상 한 명만 설득하면 네가 원하는 협상도 가능할 거야. 무전으로 말해도 되지만. 통신보안이라는 게 있잖아?”

“좋아. 잠깐만 기다려.”

요한이 무전기를 들고 송신 버튼을 눌렀다.

“요한이다. 지금 이쪽으로 한 명 더 들어올 거야. 들어오게 놔둬.”

-…라져.

스위퍼의 목소리는 무언가 탐탁지 못한 듯했다. 요한을 보던 노아가 꿍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사람들을 데리고 왔나.”

“통로 쪽 밖에서 대기 중이지. 피차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노아가 픽 웃고는 무전기를 들었다.

“거기, 문 선생 좀 잠깐 오시라고 해.”

-예.

잠시 후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인간의 정체를 본 요한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뭐야, 요한쓰? 네가 왜 여기 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의 정체는, 요한이 아는 사람이자, 지금 이 순간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아포칼립스 전에는 정말 온갖 더럽고 치사한 수로 회사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아포칼립스가 터진 이후의 전생에서는 두 번이나 캠프를 위험으로 몰아넣었던 인물. 끝끝내 믿었던 자신의 뒤통수를 쳤던 인물.

경성실업 시설경비팀 문성철.

요한도 이번만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문성철이 노아의 캠프에 있다고?

“이 사람은 왜….”

“왜. 아는 사람인가 봐?”

요한을 보고 당황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공격한 게 요한이라고?”

“말은 바로 해야지. 공격은 너희가 먼저 했어.”

요한은 곧바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그는 요한의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니 근데 인마. 얻다 대고 반말을 찍찍 하고 있어?”

“나는 캠프 리더로 이 자리에 온 거고, 여기는 회사도 학교도 아니지. 너야말로 입조심 해야 할 것 같은데. 문성철.”

“하. 진짜 이상한 새끼네. 이거.”

문성철의 입가에 비웃음 비슷한 웃음이 걸렸다. 둘 사이의 관계가 이상한 것을 느낀 노아가 그를 중재했다.

“말조심해. 문 선생.”

요한으로서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개백정의 간자로 잠입했다가 노아의 캠프에 스며든 김준뿐만 아니라, 그가 아는 최악의 정치질 달인인 문성철까지 한 캠프에 있다면 노아가 힘겨워하는 게 이해가 됐다.

저놈들은 작정하고 정치질을 하는 놈들이니까. 감당하기 힘들 거다. 뿌리부터 어지간히 썩어 있는 캠프.

초반부터 노아와 함께한 몇 명. 그나마도 개백정과의 싸움에서 죽지 않은 사람들만이 노아의 우방이 되어 주었으리라.

처음에는 분명 피를 흘리지 않고 협상을 끝내기를 고대했다. 그를 만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대는 확신이 되어 갔다. 그는 요한이 기억하는 노아가 맞았고, 여전히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나 문성철이 나타난 이상 협상은 의미가 없다. 이들은 우군이 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이다.

문성철.

내가 분명히 다시 만나면 죽여버린다고 했지.

요한은 고민을 끝냈다. 아니, 일말의 고민조차 할 이유가 없었다.

김준과 문성철이 함께 있는 캠프와 동맹을 맺는다? 세기의 멍청이도 안 할 짓이었다.

“즐거웠다. 노아. 아무래도 우리는 이번만큼은 공존하긴 어려울 것 같네.”

“자, 잠깐 요한. 왜 그러는데.”

요한이 테이블을 깰 것처럼 말하자 오히려 당황한 건 문성철이었다. 그는 자신 때문에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다급히 요한을 붙잡았다.

요한은 그게 연기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는 어차피 전투 요원도 아니고, 전선에 앞서서 싸울 의향도 없다.

그저 자신 때문에 협상이 깨졌다는 이유로 캠프 내 제 위상이 떨어질 것만 걱정하고 있는 것뿐이다.

어차피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 없는 인간이지만 저 때문에 깨지는 것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노아가 협상을 하든, 전쟁하든 모든 결과를 노아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밑밥을 던지고 있겠지.

“진정해 친구. 그리고 문 선생. 여기 이 친구가 곧 원자력 발전소가 터질 거라고 하네.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무슨 설계도를 찾으러 왔다는데. 캠프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협조해 줘야겠어.”

노아의 말에 문성철의 표정이 굳었다. 고민하는 것 같기도 질색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

“원전이 터진다고? 진짜야?”

요한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와서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말해줄 의무가 없어.”

“이봐, 요한.”

문성철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공부 못 했던 거 티 내는 거야 뭐야? 원전이 왜 터져. 응? 그리고 원전이 터진다고 한들 네가 설계도를 찾아서 뭘 어떻게 막을 건데? 기술자라도 되세요?”

“막는다고 한 적도 없어.”

“그렇겠지. 원전이 터진다는 것도 네 뇌내망상일 뿐이고.”

“문 선생. 말 좀 예쁘게 하지.”

“이봐, 리더. 지금 이런 개수작에 넘어가서 약을 사고 있는 거야? 이 자식 회사에 있을 때부터 이간질에 거짓말에 마지막에는 무단결근으로 퇴사한 녀석이야. 믿으면 안 돼.”

시작됐군.

요한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는 정치질. 그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봐, 원자력 발전소에는 자동냉각장치라는 게 있어요. 아무리 이 난리가 났다고 해도 비상사태가 되면 버튼 하나에 원자로 냉각이 시작된다고. 영화에서처럼 빵하고 뻥 터지는 게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만약 뭔가 문제가 생겨서 터졌다고 해도 말이지, 왜 지금 와서?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멀쩡하던 원전이 왜 터져?”

“문성철!”

“아, 왜 이래! 리더, 저 자식은 우리 동료를 네 명이나 죽였어. 캠프 규칙을 잊었어? 응? 이런 거짓부렁에 놀아나고 있으니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당장 죽여서 놈들에게 목을 던져야 한다고.”

“문성철!!”

노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다. 요한은 조소했다. 일말의 미련과 망설임조차 말살하는 놈의 작태를.

오히려 감사했다.

네 덕분에 나약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됐다.

고맙다 문성철.

이 쓰레기 새끼야.

요한은 무전기 송신 버튼을 두 번 눌렀다.

띠리리릭, 무전기 송신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날아와 꽂혔다.

“뭐야? 방금?”

문성철이 요한을 경계하며 노려봤다. 요한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너는 변한 게 없네.”

“그래도 꼬박꼬박 반말을 찍찍…….”

“만나서 즐거웠어. 노아.”

의도를 알 수 없는 인사에 노아가 인상을 썼다.

“지금의 너는 이전 생만큼 유능하지는 않은 듯하네. 먼저 떠난 사람들이 아주 아쉽게 됐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글쎄, 어깨를 으쓱한 요한이 번개같이 허벅지에서 권총을 뽑아 공이를 당김과 동시에 격발해 문성철의 이마에 총알을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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