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 *
신길역-용병단 캠프.
여의도 캠프 격돌 15분 전.
노인은 신길역을 지나고 있었다.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그저 백업을 칠 뿐이라고 말은 했으나 막상 애송이가 잡혀 있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마음에 드는 애송이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려서는 안 될.
노인은 백업하기로 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했다.
“얘들아 그거 가져와라.”
노인의 지시에 두 사람이 수레에 담긴 기관총을 끌고 왔다. 이전 서생연 수색 조장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기관총을 작은 손수레에 고정해 개조한 이동식 기관총이었다.
노인은 마치 연인이라도 쓰다듬듯 물건을 쓱쓱 쓰다듬은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동을 지시했다.
신길역에서 1호선을 지나 노량진에 도착한 용병단은 곧바로 전철 밖으로 나갔다.
-승강장, 클린합니다.
“좋아. 전진해. 밖으로 나가서 9호선 쪽으로 이동한다.”
노인의 지시에 따라 전철 밖으로 나와 육교를 건너 9호선 전철역으로 진입했다.
전철 밖에서 떠돌이 좀비들이 몰려들었으나 주변 단원들이 안정적으로 좀비들을 정리하는 사이 노인은 유유자적하게 산책이라도 나온 듯 거리를 활보했다.
“철구야.”
“예, 할배.”
“먼저 가서 앞길 막는 놈들 있으면 모가지를 따 줘라.”
“예.”
철구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철구와 그의 직속 부하들이 날랜 몸놀림을 보이며 전철 안으로 파고들었다. 용병단의 본대는 약 3분 정도의 시차를 두고 그들을 뒤따랐다.
-앞에 두 명 클리어. 할배, 경계병이 많습니다.
“철구야.”
-예, 할배.
“내가 너한테 징징거리는 걸 가르친 적이 있더냐.”
-…아닙니다.
“그럼 닥치고 가서 멱 따.”
-예.
노인의 짤막한 무전이 터지고, 두 명의 경계병을 향해 쇠뇌가 발사됐다. 두 사람의 목에 동시에 날아가 꽂혔다.
두 사람은 입에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픽 쓰러졌다.
뒤이어 곳곳에 숨어 있던 경계병들을 철구가 귀신같이 찾아내 순식간에 처리했다.
용병단 캠프의 에이스다운, 훌륭한 솜씨였다.
경계병 처리를 마치고 돌아온 철구를 노인은 마치 손자를 쓰다듬듯 쓱쓱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철구의 얼굴에 주인에게 칭찬받은 강아지, 또는 아버지에게 칭찬받은 아들 같은 뿌듯함이 감돌았다.
“병아리 훈련병들은 두 명씩 각 입구로 흩어져서 좀비들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2군은 개찰구 쪽에서 도망치는 놈들 잡아. 철구랑 에이스들은 나랑 같이 청소하러 간다.”
“예.”
신입의 대표로 갑수가 대답하고 노인의 말에 두 사람이 수레를 들었다. 노인의 옆에 있던 철구가 기관단총의 탄창을 갈며 몸을 풀었다. 노인이 무전기 소리를 키웠다. 타이밍이 딱 맞게 애송이로부터 무전이 도착했다.
-할배, 준비됐습니까?
“준비 완료다. 애송이.”
-라져. 시작하십쇼.
“그냥 눈에 보이는 놈들 다 조지면 되냐. 애송이는?”
-대장은 저희가 확보하죠. 할배는 마음껏 날뛰시길.
“좋아. 말하는 꼬락서니는 네 상관을 똑 닮아서는 마음에 드는구만.”
머리 긴 애송이가 무전을 쳐 왔다. 잠시 후 앞에서 교란작전이 시작될 것.
“자,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보자고.”
뒤이어 총소리가 들렸다. 어그로를 확실히 끌어 주고 있는 듯 전철역 안은 혼란의 도가니, 개판 오 분 전이었다. 노인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할배, 아래쪽에 적이 많습니다. 본대인 것 같습니다.
“오케이. 간다.”
9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러 가는 통로의 끝. 계단 아래에서 혼비백산하게 우왕좌왕하는 생존자들이 보인 순간, 철구가 뒤쪽을 보고 있던 경계병들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철구가 선제공격하는 사이, 두 사람이 기관총이 달린 수레를 내려놓았다.
“저, 저기!”
뒤늦게 경계병이 당한 것을 깨달은 생존자들이 그들을 가리키고 총구를 돌렸지만, 양팔을 걷으며 수레 위에 올라탄 노인의 공격이 먼저였다.
드르르륵! 두두두두!
엄청난 반동과 함께 탄환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가고 사람들이 종잇장처럼 쓰러졌다. 연속적인 격발음과 동시에 탄피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두두두! 탕! 탕!
그 와중에도 몇몇 똘똘한 놈들의 반격이 거세게 되돌아왔다.
“제법인데.”
이 정도로 불리한 전황이면 일반적으론 전의조차 상실하는 게 일반적이건만, 여의도 캠프 생존자 중 일부는 침착하게 반격을 해 나갔다. 덕분에 용병단 한 명이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눈먼총알 몇 발이 그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으나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준 격발기를 돌리며 탄창에 남은 탄약을 소모하기 바빴다.
전투가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즈음, 요란한 총성 사이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총성 한 발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최전방에 있던 백구가 의문의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철구의 눈에 불꽃이 튀며 휙 돌아갔다. 총알이 바닥에 박혀 있다.
위에서 아래로 쏜 탄환.
철구의 시선이 빠르게 역 안을 훑었다. 배전반 상자 위쪽에 저격용 총의 볼트액션을 당기고 있는 저격수가 눈에 들어왔다. 뒤이은 재빠른 브리핑.
철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총소리를 뚫고 퍼져 나갔다.
“우측 상단 배전반 상자 위! 저격수입니다!”
철구의 외침에 노인이 총구를 확 틀어 박스 위에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조준도 필요 없었다. 그저 화망을 그려 강력한 화력으로 작살 낼 뿐!
노인이 공격하지 않는 다른 방향에서도 화망이 넓게 펼쳐지고 시체 위로 탄환이 두 발 세 발씩 쏟아졌다.
“휴우.”
한 탄창을 모두 소비한 노인이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곳에는 피어오르는 연기, 꿈틀거리는 사람들, 시체들, 그리고 낭자한 혈류뿐이었다.
“끝인가.”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철구와 용병단 에이스들이 전철역을 구석구석 뒤지며 숨어 있던 잔당들을 솎아냈고, 여기저기서 남아 있던 비명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인은 살점과 핏물을 자박자박 짓이기며 건너편 코너에서 기다리던 스위퍼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웬 카페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뭐 해?”
“아, 아직 대장 형씨 볼일이 안 끝나서.”
“볼일은 뭔 놈의 볼일이야.”
만류할 새도 없이 노인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문 안쪽에는 이마가 뚫린 시신 한 구와 그런 시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채 이야기하는 노아와 요한이 있었다.
요한의 손에 들린 채 노아를 겨냥하고 있는 총구만 아니었다면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노인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야, 붙잡혀 있다더니?”
“아, 오셨습니까.”
“아, 오셨습니까?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노인의 툴툴거리는 말에 요한이 흐뭇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황급히 저를 구하겠다고 달려온 모습이 역력했다.
“잠시, 이야기가 안 끝났는데. 얘기를 마저 하게 자리를 비워 주겠습니까.”
“그러지 뭐.”
“아, 잠시만요. 피해 상황은요?”
“적 중에 살아있는 놈은 없고, 우리 쪽 새끼 한 명 죽었다. 잘 쏘는 저격수가 한 명 있었어.”
“유감입니다.”
“이 새끼, 또 우리 방패막이로 썼지? 이 발랑 까진 애송이 새끼.”
노인이 툴툴거리자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용병단도 중요한 우방 전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의 피해는 정말 본의가 아니었다.
노인도 그냥 불퉁거려 본 건지 더는 요한에게 잔소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사건의 원흉인 신노아를 힘껏 노려봤다.
“이놈은 어떻게 할 건데? 왜 살려 두냐.”
“일단 얘기를 좀 더 해보려 합니다. 스위퍼, 포박해.”
“쯧, 무슨 얘기를 한다고. 그냥 모가지를 쳐버리면 간단한 것을.”
스위퍼가 그의 두 손을 묶고 무장을 해제하는 사이, 요한이 노인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참, 그리고 어르신.”
“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은 노아에게 들은 정보를 이야기했다. 캠프 춘향이 그들의 정보를 팔아넘겼다는 것. 이야기를 들은 노인이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냐? 춘향맘이 그런…….”
요한은 노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캠프 춘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냥했고 다정했으니까. 특히나 그런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와 그 어린아이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듯한 이미지의 캠프였던 만큼, 충격이 클 거다.
같은 동상일몽으로 침잠하는 두 사람의 의식 사이에, 노아의 잔잔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너희, 총 몇 명이지?”
“내 동료들이 열여섯. 지금은 열다섯이지. 그리고 용병단 분들이 열다섯.”
“많네.”
“뭐?”
“캠프 춘향에서 넘겨준 명단보다 많다고. 그것도 두 배 이상.”
요한과 노인이 다시 한번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상황은 명백했다.
그녀가 세 캠프의 뒤통수를 동시에 후려갈겼다.
왜?
요한과 노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말을 꺼냈다.
“이런 시부랄! 이 쳐죽일 계집이!”
“부평구청으로 돌아가 보셔야겠습니다.”
주변에 있는 가장 강한 세 세력을 동시에 부딪치게 했다. 이건, 절대로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설계다.
그녀가 노릴 만한 것은 단 하나.
부평구청의 용병단 본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물자.
“먼저 돌아간다. 마무리는 알아서 해.”
“예. 몸조심하세요.”
노인이 쯧, 혀를 차면서 나갔다. 여기저기서 쾅쾅거리며 물건을 때려 부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를 못 이긴 듯 뭐라도 걷어찬 모양이었다.
요한의 표정 또한 밝지 못했다. 부평구청에는 정말 흔치 않게 맑은 선인들이 있었다. 특히 정미 같은 좋은 사람이 자신의 부주의로 죽는다는 것,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우리 캠프 사람들이 전멸했다고……. 게다가 피해가 한 명?”
노인이 나가고 난 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노아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말했잖아.”
“그러게. 정말 강하구나. 네 동료는.”
요한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슬퍼하는 모습도, 비통해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면서도 동시에 허망하다는 듯한 표정. 동료를 잃을 때마다 그가 지었던 표정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던 요한으로서는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런 요한의 의문을 무시한 채, 노아가 입을 열었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거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고통 없이 죽여줄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혼자 캠프에 참여해도 되고.”
“내 부하들을 모두 죽여놓고서 나를 캠프에 받아도 안심할 수 있겠냐.”
“안심할 수 없겠지. 그래도 원한다면 데리고 갈 거다. 당장은 스며들기 어렵겠지만, 모두를 좋아하게 될 거야. 동료를 잃고 또 다른 동료들과 함께한다는 거, 이런 세상에선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설득하려 하기는.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치곤 대우가 너무 조악한걸.”
노아가 묶인 두 팔을 내밀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이 모양이니 허망하네.”
요한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노아는 깊은숨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내쉬다가 이내 벅벅 마른세수했다.
“실은, 조금 후련하네.”
“……?”
“개백정이 죽었다는 소문이 돈 이후, 나는 또 다른 서생연이 등장하는 걸 막기 위해 주변의 캠프들을 닥치는 대로 모았어. 그중엔 문성철이나 김준, 신진청처럼 호전적이고 통제 안 되고 정치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제법 껴 있었지.”
요한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어. 나는… 이런 캠프를 원하지 않았어. 닥치는 대로 캠프 인원을 늘리고, 침입자들을 죽이고, 생존자들을 강제로 합류시키는 캠프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통제에서 벗어났지. 이번 싸움. 개백정을 죽였다는 너희와는 더더욱 싸우기 싫었어.”
뒤이어 들려온 그의 말은, 정말 한 치의 예상도 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래서 내 통제를 따르는 사람들을 전투에 제외했어. 워낙 호전적이어서 강경파에 물들어버린 재원이를 제외하고.”
“그 말은…….”
“리더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있지만, 나랑 피를 나눈 내 진짜 동료들은 전부 마포에 있다. 나와 초장기부터 함께했던, 개백정이 죽인 승희와 선화를 제외한 내 친구들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