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152화 (152/176)

<152화>

살려달라고?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말이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설명해.”

“…점점 견디기가 어려워집니다. 진실을 안다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면, 대장님의 말을 들을 걸 그랬어요. 차라리 모른 채로 살았더라면…….”

요한은 더 되묻지 않고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묵직한 공기가 비서실 안을 짓눌렀다.

그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의아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버거웠으리라. 혼자서 그 무게를 견디는 게 버거워 일부러 허술하게 티를 냈겠지. 마치 자신을 알아달라는 듯이.

제 입으로 진실을 꺼내기엔 죄책감이 들지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궁지에까지 몰린 것이었다.

미련하고 미련하다.

재호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낡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잡지 같기도, 오래된 논문 같기도 한 조악한 문서였다.

“사실, 그날. 저는 그 논문을 찾았었어요. 그리고 그 안에는 지금 상황을 나타내는 자료들이 들어 있었고요.”

“정확히 어떤 자료들이지?”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재호가 천천히 그에게 책자를 건넸다. 요한이 책자를 받아들여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질감이 생경하다. 아주 오래된 갱지 같기도, 두꺼운 도화지 같기도 했다.

얼마나 자주 꺼내 보았는지 겉면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손때가 가득했다.

책등에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나타내는 네임텍이 달려 있었다. 겉면은 흔한 인디자인 하나 없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색의 타이포그라피만 박혀 있었다.

요한이 첫 장을 넘겼다. 누런 종이. 역시나 오래된 질감. 몇 장을 더 넘기자 그림책 같은 커다란 삽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요한의 동공이 확장되고 넘기는 손 또한 점점 빨라졌다.

그 책을 처음 마주했던 날의 재호가 그랬던 것처럼.

책장을 넘기는 손길 너머로 재호의 변명 같은 말이 이어졌다.

“제가 고민한 건 대장님 말대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됐을 때. 미치게 되는 파장을 걱정했기 때문이에요.”

요한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금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를 받는 고막과 책장을 넘기는 손, 그리고 빠르게 회전하는 뇌가 정신없이 뒤섞였다.

이 책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던 거지? 누가? 어떻게? 왜?

“마지막 장을 봐주세요.”

재호의 말과 동시에 요한의 시선이 마침내 마지막 장에 다다랐다. 마지막 장에는, 지구를 장기 말 삼아 도박을 하는 괴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이 책에 나온 괴물들의 모습은 분명 변종이다. 자신이 전생에 본, 이번 생에 본 모든 변종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비록 조악한 삽화뿐이었지만, 겪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지막 장의 그림이 비약일 수 있다는 상상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 앞 장의 이야기들이 진실인 만큼, 마지막 장의 이야기도 설득력을 가졌다.

이 세상은 게임일 뿐이다.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살아왔던 삶은 한낱 누군가의 유희거리였을 뿐.

쾅!

요한이 책상을 내리쳤다.

그 이후 고요한 침묵.

“네 주관적인 해석을 말해.”

요한은 6개월간 고뇌했을 재호의 생각을 요구했다. 재호는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흐트러진 그의 모습에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언젠가 대장님은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죠. 이 세상의 아포칼립스는 작위적이고, 몰개연적이라고. 그리고 리나 씨는 말했어요. 누군가는 인류의 멸종을, 누군가는 인류의 보존을 바라는 것 같다고. 그리고 대장은 반박했지요. 차라리 그런 놈들이 있다면 인류의 생존을 두고 한바탕 도박을 하는 게 설득력 있을 거라고요. 대장, 그때부터 의심하고 있었나요?”

“그거야,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한 말이지.”

“하지만 딱딱 들어맞아요.”

“이 세상은 하나의 게임판이다. 누군가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다, 그 말인가?”

“예. 이전까지도, 지금도, 앞으로도.”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머릿속이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뎅뎅 울리다가 이내 찌르르 저려 온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간다.

이해. 부정. 그리고 분노.

화가 났다. 당장에라도 제 목숨을 끊어 그 몰가치한 유희거리의 판을 뒤엎고 싶을 만큼.

“처음에 저는 이 사실을 부정했어요. 유신론자였던 만큼, 절대자의 존재를 의심하진 않았지만… 나의 신이 이럴 리 없다. 이건 속된 말로 사탄의 농간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내용이 진실일 수도 있겠다. 이건 누군가의 묵시록이다, 라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했어요.”

그의 숨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더더욱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이것은 생존자들의 마지막 동아줄을 앗아 가는 행위였다.

처절하고 벌레처럼 아득바득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너희는 정말 장기판 위의 벌레다. 누군가가 너희를 두고 한판 거나하게 게임을 즐기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과연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절망과 정신병이 전염병처럼 돌 터고 많은 사람이 자살을 선택할 것이다. 좌절해서든, 분해서든.

“처음엔 그냥 자살할까 생각했어요.”

“…….”

“인간의 존엄성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지식인이라 자부하던 나 자신이 한없이 미약하고 병신같아지고. 지금 우리가 살아남은 일종의 규칙들마저도, 그저 우리를 지켜보는 존재들의 변덕 한 번이면 모두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때마침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장대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지나가는 소나기인지, 아니면 철마다 돌아오는 장맛비인지.

빗소리가 바닷물을 때리는 소리가 선연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재호를 그대로 두고 요한은 시선을 문제의 책자를 향해 던졌다.

이건 누가, 어떻게, 왜 제작한 걸까.

리나처럼 계시를 받은 누군가가 기록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아니다.

그랬다면 종말이 터졌을 때 티가 났을 거다.

교수든, 석사든, 출판사 관계자든, 작가든. 혹은 일반 공무원이든 국립중앙박물관에 문서로 남길 정도의 위치가 된다면 단지 이렇게 하나의 책을 딸랑 남겨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종말을 대비하고 종말이 터졌을 때 뭔가 행동으로 옮겼겠지.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자신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이 사태를 만들어낸 장본인들, 그 빌어먹을 게이머들이 마치 퀘스트 아이템처럼 만들어 놓았다는 쪽이 차라리 설득력이 더 있으리라.

“어디까지… 갖고 놀아야 만족…….”

모든 것이 각본이었다.

자신이 기억을 가지고 되돌아온 것도.

사람들이 모인 곳에 변종들이 모여드는 것도.

변종 피콜로가 생겨나고 놈이 다른 변종들을 낳은 것도.

유난히 정부와 군사지역에 타격이 크고 일찍 무너진 것도.

좀비 행렬도, 전생에는 없었던 면역도.

동물이 감염되지 않는 것, 변종이 동물을 공격하지 않는 것,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에는 변종이 더 활개를 치는 것도.

어쩌면 자신이나, 스위퍼, 하진 등등의 인물들이 인간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까지도. 리나의 꿈까지도.

그 모든 것이.

잘 짜인 하나의 극본이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기 위해, 또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을 보기 위해.

“X까지 말라고 해.”

쾅!

요한이 다시 한번 책상을 내리쳤다. 이처럼 감정 조절을 못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예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다 못해 지각을 뚫고 터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요한이 책자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 창문을 통해 검은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하늘 어딘가를 노려보기라도 하듯이.

지금도 놈들이 지켜보고 있을까?

그럴 것이다.

만약 놈들이 이 게임을 보고 있다면, 자신처럼 아득바득 살아남는 사람이 재미없을 리가 없지. 상당히 인기 많은 쇼가 되었을 거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들.

지켜보고 있다면 응답해.

마치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듯, 하늘에 구멍이라도 내듯 시선을 보냈다.

실제로 구멍이 뚫린 듯 하늘은 피로하게 빗물을 뱉어냈고 토해진 빗물을 삼키는 바다의 우짖음이 면면했다.

그 순간,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수백 개의 시선이 몰려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 뒤로 번개가 해면을 찍어눌렀다. 화들짝 놀랄 정도로 지드런한 번개였다. 뒤이어 천둥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몸을 에는 감각들은 사라졌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아무렇지도 않게.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분노 대신에 자리 잡은 것은 고민이었다.

재호가 수 개월간 고통받았을 고민, 그 번뇌.

무턱대고 화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상대는 초월적인 존재였으니까.

놈들이 일차적으로 원하는 것이 인류의 발버둥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절멸인가 혹은 생존인가. 어떤 종류의 게임인가.

요한은 후자에 무게를 뒀다. 그들은 세상을 종말의 구렁텅이에 던져 놓고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을 보며 낄낄대는 것이다.

경마장의 도박꾼들처럼.

근거는 명확했다.

첫째로 변종의 수와 종말의 강도는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둘째로 면역자의 존재는 분명히 종말보다는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서책의 존재.

게임의 끝이 멸종일지 종말의 종식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이 게임의 참가자들은 게임 오버까지 인류가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었다.

의문점도 있었다.

회귀 전의 경험은 무엇일까. 게임의 리셋? 그리고 놈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지?

최종적인 고민은, 이 게임을 망치는 법. 그 길이 필요했다.

요한은 뒤돌아섰다. 그 짧은 찰나에, 굳은 결심을 한 듯한 결연한 표정이었다. 분노는 가라앉고 확신과 결의가 가득한 표정.

언제나와 같은 요한이었다.

“재호야.”

“예.”

“함구해.”

“…네.”

“그리고, 고생 많았다. 정말로. 네 노력과 고통에 감사를 표해.”

다 큰 성인 남자가 울먹거리는 듯한 표정은 두고 보기 부담스러웠다.

“라디오 방송을 준비해.”

“라디오요?”

“HAM 라디오로. 전 세계로 송출할 수 있게 준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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