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CQ, 반복한다. CQ.”
그날 이후로 요한은 HAM 라디오로 전 세계에 호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시도횟수와 비교해 응답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HAM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인지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이 자체가 적은 것 때문인지 몰라도.
요한도 크게 기대했던 바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 계획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설사 유의미하더라도 그의 의도처럼 게임 밖 존재들이 눈 하나 끔뻑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변수가 생겼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요한은 멈추지 않았다. 최소한 그들이 눈썹 하나라도 찡그리기를, 시위에 가까운 제 행동을 바라보고 눈살을 찌푸리기를 바랐다.
요한은 아예 교대를 나누어 24시간 내내 무선 호출을 반복하며 응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응답이 시작되었다.
“대장님, 교신에 응한 무선국이 있습니다.”
“연결해.”
재호의 부름에 상황실로 이동한 요한은 통역사를 불러 무전설비에 자리 잡았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요한이 말하고, 통역가가 송수신기를 잡았다.
“여기는 캠프 요한.”
요한의 말 뒤로 전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응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CANIN입니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남성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낮고 조용하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HAM 규정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호출하길래… 아니 세상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규칙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마는. 혹시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아니요. 저희는 특정인이 아닌, 생존자를 찾고 있습니다.”
-…….
사내는 침묵했다. 자신을 경계하며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수신기 너머로 들리는 듯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 치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느냐마는.
요한은 교신이 끊겼는지 잠깐 확인해 봤다. 교신은 연결되어 있었다.
“생존자는 당신 혼자입니까?”
-아니요, 하지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혹시 뉴질랜드로 이동해올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해요.
먼 지역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괜한 경계심만 증폭시킬 수 있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경계하다 힘들게 교신을 받은 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빠르게 본론을 꺼내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몇 가지 정보들을 알려드릴 겁니다.”
-몇 가지 정보요?
“예. 여러분의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정보들이니, 잘 기록하고 숙지해 두었다가 다른 생존자들을 보시거나 곁에 계신다면 꼭 전파해 주세요.”
-당신의 말을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정확히는 당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요한은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는 뉴질랜드에서 생존 중인 캠프 요한입니다. 지금까지 총 이백여 명의 생존자들이 무리를 이뤄 생존해나가고 있습니다. 군사시설과 통신, 농업과 목축업까지 전부 복원했고요.”
-…오, 하나님. 말도 안 돼!
“저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든 정보를 공유하려 합니다. 여러분들이 살아남고 생존하여 이 지식을 널리 널리 퍼트려 주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대가를 드릴 수 없어요.
“대가는 말 그대로 여러분이 받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양심과 신의에 맡깁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지옥도로 변한 세상에서 발견한 짤막한 호의. 그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마치 독이 든 성배를 발견한 것처럼 툭툭 건드릴 뿐, 받아마실 줄 몰랐다.
이해했다. 자신 또한 그랬을 테니까. 운만으로 살아남는 시기는 지났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재능과 생존력은 인정받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요한은 저들이 미끼를 물 것이라고 확신했다. 상대의 목적이 무엇이든 라디오 교신만으로 생길 수 있는 위협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정보는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정보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크게 손해 볼 것이 없었으니까.
“물론입니다.”
요한이 통역가에게 사전에 준비해 둔 대본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좀비들의 습성, 변종들의 정보, 의약품 정보, 전기와 물을 구하는 법 등등 살아남기 위한 모든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내용이 많습니다. 중간에 교신이 끊기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모든 내용은 기록해 두시기를 권합니다. 준비되면 말씀해 주세요.”
-예. 계속하세요.
“첫째로, 좀비의 약점은 머리와 심장이며… 둘째로, 변종이 근처에 있으면 물리지 않아도 대기 감염이…….”
교신이 이어지자 처음에는 그저 듣고 있던 사내는 급기야 ‘잠, 잠깐만요!’라며 뜸을 들였다. 무전기 너머로 후다닥후다닥하는 정신 사나운 소리가 들렸다.
-다시, 첫 번째 변종에 관한 이야기부터 다시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중간에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언제든 끊고 물어보세요.”
내용은 길었다. 근 몇 시간 가까이 전달된 정보. 캠프 챠닌은 중간중간 배터리를 교체하겠다며 무전을 끊은 뒤, 몇 분 뒤 그들이 사라졌을세라 다급하고 절박한 목소리로 요한을 불렀다.
정보를 전달하는 데만 근 몇 시간이 걸렸다. 추리고 추린 중요사항들만 전파하는데도 그만한 시간이 소요됐다.
“이상입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시작했던 교신이었는데, 어느덧 뉘엿뉘엿 석양이 지고 있었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말씀드렸는걸요. 뉴질랜드에 생존 중인 캠프 요한입니다.”
평이한 대답에 사내는 질문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요한으로서도 다른 대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누구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그들도 질문의 오류를 깨달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감사로 대신했다.
-감사합니다.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당신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사람들을 구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근처에 방송하든 회지를 만들어 뿌리든, 반드시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정보들을 뿌려 주세요.”
-예. 노력하겠습니다.
“믿을 만한 정보인지 의심하는 것은 자유이나, 필요한 시점이 되면 반드시 사용하세요. 건투를 빕니다.”
요한이 회신을 종료하려 하자 사내가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믿습니다. 저희가 알아낸 정보들과도 일치한 부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저희도 드릴 정보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겁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들의 생존을 바랍니다.”
요한의 단호한 대답에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더 물어도 되돌아올 대답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질문의 범위가 조금 달라졌다.
-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요한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재건(rehabilitation).”
교신은 그걸로 끝이었다.
요한은 다른 캠프를 찾기 위해 또다시 HAM 라디오로 교신을 요청했다.
* * *
며칠 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는 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음질 테스트를 위한 시범 방송이었다. 몇 차례 테스트를 마친 재호는 준비 완료를 알리는 손뼉을 몇 번 쳤다. 장벽 위쪽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돌아온 요한이 재호에게 물었다.
“라디오 방송 준비는?”
“끝났습니다. 스피커 설치는요?”
“무난해.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고, 괜히 좀비들이나 끌어당기지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설마 이 동네에 좀비들이 더 남았으려고요.”
재호의 농담 섞인 말에도 요한의 표정은 차분했다.
“총 몇 개지?”
“네 개요. 주파수만 맞으면 뉴질랜드 전역에 방송을 내보낼 수 있어요.”
“좋아. 지금부터 한 번에 6시간씩, 총 하루 4번 24시간으로 방송을 해. 우선 생존자 구조 방송은 구조용 쉘터가 만들어지기 전까진 보류하고, 생존 가이드만.”
요한의 말에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자 구조 쉘터는 언제 만드시려고요?”
“오늘부터.”
요한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라디오 방송을 듣고 생존자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게 최우선이었지만, 결국엔 직접 구조작업을 해야 한다. 혹시라도 멋모르고 움직이는 생존자들이 변종의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인구가 늘어나도 먹일 수 있는 식량 확보와 근처 변종들. 특히 피콜로들을 제거하는 게 가장 우선이었다.
“바빠질 거다. 아무 생각할 틈이 없게 자신을 혹사해. 일할 수 있는 건 축복이다, 재호야.”
재호가 희게 웃었다. 죽은 듯이 누렇게 떴던 피부도 어느덧 혈색을 되찾았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대장님.”
그날부터 상황실 곳곳에 설치된 장비를 통해 사제 주파수 여기저기서 구조 방송이 흘러나갔다.
요한은 일차 준비를 완료한 뒤, 곧바로 수색조를 모았다. 최소한의 경계를 남겨둔 채 조원들이 한곳에 모였다.
모인 4개의 수색조가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춰 섰다. 그들은 긴장한 표정도 없이 그저 굳은 표정으로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은 줄 맞춰 서 있는 수색조를 눈으로 쓱 훑어본 후, 네 명의 조장들을 안쪽으로 불렀다.
“전원 모였습니까?”
“그래. 무슨 일이냐, 애송이야.”
“전달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조례 때 전달하지 않고?”
“중요한 사안이라서요. 여러분의 동의가 끝나면 직접 조원들에게도 전달할 생각입니다.”
요한의 말에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로 중요한 일인지 몰라도, 요한이 이렇게 전면에 나설 정도라면 상황이 상당히 중하다고 봐야 했다. 그들은 긴장한 채 요한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지금까지는 안전하고 천천히 수색 범위를 넓혀갔지만, 이제부터는 속도를 좀 높일 생각입니다. 조를 두 개씩 묶어서 오클랜드 위아래로 장기 수색을 진행할 겁니다. 아포칼립스가 터진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만큼 생존율이 급격히 내려갈 테니까 최대한 빨리 생존자들을 찾아내셔야 합니다. 동시에 야생화된 목장과 변종들도 찾아내셔야 하고요.”
요한의 말에 조장들은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여태까지의 그의 수색 신조와 상당히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더라도, 내부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생존자를 살리기 위한 구조작업보다 오히려 캠프 요한이 살아남기 위해 희생된 수가 더 많을 정도였으니까.
이제 와서 생존자 구조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지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네 사람의 의문을 대표해 하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지시 방향이 다르군.”
“달라. 목표가 달라졌으니까.”
“달라진 목표가 뭔데?”
요한은 승부수를 던지는 기사처럼 화두를 던졌다.
“종말의 종식. 그리고 재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생존자를 살리고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번식하는 것.”
조장들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여태까지 살아남는 과정에서 요한은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고 실험하여 검증했다.
지금의 결정은 그 과정이 낳은 결단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말에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종말의 종식이랑 재건까지는 알겠는데, 번식은 또 뭐람?
“번식이라니… 워딩이 좀.”
노아가 이마를 조프리며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구겼다.
요한은 뭐가 잘못됐는지 잠시 고민하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