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이곳에서 살겠어요.>
하루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올리비아는 재호를 다시 찾아갔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에게 서류 하나와 두꺼운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우선 여기에 사인하세요. 법적 효력은 없지만, 이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저희는 이 서명을 근거로 올리비아 씨의 자유를 일부 침해할 수 있어요.>
올리비아는 ‘법적 효력은 없지만’이라는 부분에서 저 홀로 재밌다는 듯 웃음 짓는 그를 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봤다.
<의자 옆에 둔 가방은 새롭게 정착하시는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보급품이에요.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요청할 수 있지만, 아마 훈련소를 수료하시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입대하는 것 같네요. 입대해본 적은 없지만.>
그는 푸흐흐 웃었다.
<퀴진으로 들어가면 이론교육을 먼저 할 거예요. 전투 훈련을 담당하는 4 조장님이 아직 출타 중이셔서 전투 훈련은 그 이후에 한꺼번에 진행될 거고, 그전까지 이론훈련을 완벽하게 숙지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는 눈을 살짝 찡긋했다.
<4 조장님의 교육은 정말 엄하거든요.>
감정표현이 풍부한 사람이네. 올리비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휙휙 휘갈기듯이 서명한 올리비아가 두 개의 더플백을 어깨에 걸쳤다.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묵직했다.
<그럼, 건투를.>
<네 친절에 감사해요. 관리인 씨.>
신세는 자신이 지는 게 분명한데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퀴진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들도 친절했고, 퀴진 안에서 그녀를 안내했던 관리인도 그랬다.
퀴진에서 모친과 이별을 맞았다. 그녀에게 군사훈련을 받게 할 순 없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올리비아는?>
<먼저 가 있어요. 엄마. 금방 따라갈 테니.>
짤막한 인사 후에 모친은 바로 섬으로 이송됐다. 낯선 곳에 노모를 홀로 보내야 한다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돌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내인의 상냥한 위로가 마음에 안도를 줬다.
그래, 받은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내 몫만 잘하면 돼, 라는 다짐이 소록소록 생겨났다.
하지만 단단한 각오와는 달리 며칠 동안은 꿈 같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사정이 생겨 교육 진행이 늦춰졌다는 소식에 올리비아는 작은 섬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섬을 구경하거나 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섬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시멘트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에는 수많은 책장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는…….>
<봉안당이에요. 죽은 주민들을 기리는 곳이죠. 원래는 화장해서 뼛가루를 넣지만, 저희는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을 넣죠. 시신을 수습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니까요.>
책장 안에는 작은 물건들과 시든 꽃들이 가득했고 나누어진 책장 아래쪽에 날짜와 함께 다양한 언어로 적힌 사망자의 이름이 있었다. 반지나 시계, 수첩, 심지어 조리도구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최근에 사람이 사망한 것은 약 한 달 전이었다.
올리비아는 먼지 한 톨 없는 봉안당 책장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쓸었다.
곧바로 교육이 진행될 거라는 생각과 달리,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무료한 침묵이 계속됐다.
그러다 마침내 일주일쯤 지나고서야 교육이 시작되었다.
교육장에는 자신 말고도 어리바리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여섯 명 있었다. 새로운 생존자들인 듯했다.
‘이들을 기다린 건가.’
엿들은 이야기로는 어제 막 이곳에 도착한 생존자들이라 했다. 올리비아는 그들의 면면을 훔치듯 살펴보다가 훈련 교관이 등장하자 금세 관심을 거뒀다.
<캠프 요한에 오신 걸 환영해요. 이론훈련 및 테스트를 담당하고 있는 메이라고 해요. 짧은 교육 기간인 만큼 집중해서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론훈련은 마치 대학교 강의처럼 진행됐다. 교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차분하고 또렷한 어조로 좀비들에 대한 약점, 대처법, 각종 응급처치와 무전 사용법 등등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모든 지침을 가르쳤다.
하나같이 실용적인 내용이라 올리비아는 난생처음으로 교육받으면서 진짜 교육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생생하게 느꼈다.
개인화기와 냉병기 사용법부터 실제로 전투에 나가게 되었을 때 각 조의 구성원들이 해야 할 일, 조직구조까지도 하나하나 배웠다.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살지 않아도 배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존율이 올라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흘간의 짧은 교육이 끝나고 그들에게는 또다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들은 이야기라곤 훈련 교관님이 오실 때까지 배운 내용을 잘 숙지하고 있으라는 것뿐. 특히 무전 음어의 경우 미리 외워 두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에 올리비아는 쉬면서도 열심히 외웠다.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함께 훈련받은 생존자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감회가 남다른 듯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종종 그녀에게도 친분을 쌓으려는 듯 벽을 허물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올리비아는 그저 형식적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이곳이 체계가 있는 조직이라고 느꼈고, 어느 정도의 군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싶었다.
그렇게 퀴진에 들어온 지 약 보름이 지나고, 마침내 그들 앞에 훈련 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애송이들.”
나타난 사람은 한 아시아계 노인과 뉴질랜드 백인 청년이었다. 이곳 관리인들은 하나씩 통역사를 붙이고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섯 명. 많구먼. 나는 수색 4조 조장이다. 동시에 너희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줄 교관이지.”
평범치 않은 노인이다. 올리비아는 한눈에 알았다.
적은 나이가 아닌데도 전투조의 조장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웃고 있으면서도 강퍅한 인상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는 해맑게 웃고 있는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유일하게 자신만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올리비아가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새, 교관이 그들의 앞을 지나가며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한 바퀴 휙 돈 노인이 모자를 살짝 들어 썼다.
“너희는 아주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될 거야. 혹시 죽어도 원망하지는 말라고. 여기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똑같을 테니까.”
<하하->
“웃어?”
웃었던 생존자가 입을 뚝 다물었다.
분명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으나, 그는 단 한 마디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실실 웃던 사내는 그 자리에서 딸꾹질을 시작했다.
노인이 사내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붙이고선 눈을 부라렸다.
“마음껏 웃어 둬라, 애송이야. 지금부터는 그 두 눈에 웃음이란 게 생길 일이 없을 테니까. 아마 힘들어 실성해서도 눈에 눈물만 줄줄 나오게 될걸?”
과연 그의 호언장담은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지옥 같은 훈련은.
“멈추지 마라, 빌어먹을 애송이들! 등 뒤에 좀비가 따라오고 있어도 그렇게 산책하듯이 뛸 거냐!”
첫날은 달리기였다. 정확히는 오로지 달리기뿐이었다. 그들은 그 좁은 훈련장 안을 끊임없이 내달려야 했다. 조금만 속도가 뒤떨어지거나 지쳐 넘어지려 하면, 같이 달리는 노인이 넘어지기 전에 그들을 잡아 올렸다.
그런 다음 여지없이 일갈이 터져 나왔다. 오늘도 여지없이 노인은 한 생존자의 턱을 검지로 들어 올렸다.
“계집, 잘만 기어오더군. 네가 여자라고 좀비가 피해서 공격해줄 성 싶더냐?”
<아, 아니요…….>
“너는 삼십 분 더 뛰어라. 한 번만 더 빌빌거리면 머리카락을 다 밀어 빡빡이로 만들어 버릴 테다. 그리고 너희 둘.”
<네, 네!>
노인이 마찬가지로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던 두 남자에게 다가가 그들의 멱살을 쥐었다.
“너희는 저 계집아이만도 못한 놈들이야. 저건 근성이라도 있지. 당장 가서 뛰지 않으면 다리 사이에 있는 걸 손수 떼 줄 테다.”
노인은 걷어차듯 세 생존자를 굴려 보냈다. 쯧, 혀를 한번 찬 뒤 노인은 그나마 훈련을 잘 따라오고 있는 네 사람에게 휴식을 지시했다. 그러다 호흡을 고르고 있는 올리비아에게 다가왔다.
“네놈은 제법 훌륭했다. 자이언트 애송이.”
<감사합니다. 조장님.>
“혹시라도 폐급 놈들한테 물들면 좀비 밥으로 던져버릴 테니, 그리 알라고.”
노인은 씩 웃더니 뒤로 홱 돌아서 팔짱을 꼈다. 삼십 분이 지난 후, 노인은 인심 썼다는 듯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좋아. 마지막으로 세 시간씩만 더 뛰고 들어간다. 어이, 토한 건 다 치워 놓고 가라.”
근 한 달이었다.
한 달을 체력훈련만 했다.
생존자들은 평소보다 세 배를 먹었다.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기도 하거니와, 식당까지 쫓아온 괴물 교관은 먹지 않는 생존자들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욱여넣었다.
토하면 토한 것까지 같이 먹이겠다는 그의 협박에, 훈련병들은 꾸역꾸역 음식물을 밀어 넣어야 했다.
올리비아도 열심히 먹었으나 살이 찌기는커녕 더 마른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몸무게는 늘었으나 남아 있던 지방들이 싹 빠졌다.
그나마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오던 자신은 큰 변화는 없었지만, 살집이 있던 생존자들은 한 달 만에 급격하게 말라 갔다.
‘수틀리면 진짜 좀비 밥으로 먹일 기세이니.’
노인의 강퍅함은 예상했으나, 그 성질머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애초에 생존자들의 훈련을 가장 앞장서서 지도했으니 다른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는 허리춤 한쪽에 권총을, 한쪽에는 커다란 칼을 차고 있다는 점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나서도 그는 멀쩡한 안색으로 생존자들에게 소리를 질러 댔다.
사흘 차에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더 이상 못 하겠다며 돌려보내 달라고 생떼를 쓰는 생존자가 나온 것.
노인은 그를 향해 다가가 이마에 총구를 갖다 댄 뒤 벌벌 떠는 그를 향해 으르렁댔다.
‘어이, 애송이야. 네가 서명하고 들어온 그 문서에 뭐라고 쓰여 있는 줄 아느냐? 훈련이 시작되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뿐이야. 뒤져서 시체로 나가든가, 수료해서 나가든가. 나가게 해주랴? 응?’
실제로 노인은 살기를 풀풀 풍기며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결국, 그는 소변까지 지렸지만, 노인은 소변도 채 마르지 않은 그를 기어코 끝까지 굴려 정해진 체력훈련을 끝마치게 했다.
‘정상이 아니야.’
그녀의 감상은 그랬다. 아무리 신입이라도 이렇게까지 굴리나 하는 생각은 훈련병들의 훈련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훈련장에 찾아와 단련하는 기존 주민들을 보고선 산산이 조각났다. 오히려 그들의 운동량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인 거였다.
“걷지 마! 이 쳐죽일 놈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도만 높아졌다. 날이 갈수록 생존자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해갔다.
그녀 또한 왜 쫓아와서 이런 개고생을 할까 싶을 만큼 괴로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올리비아조차 벅찬 일정들이 찾아왔다. 근육통이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근육통이 덧씌워졌다.
‘차라리 죽어 나가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사라졌다. 처음에 들어왔던 때의 기대와 들뜬 마음은 그저 사라지고 표정은 그저 마른오징어처럼 퍽퍽할 뿐이었다.
‘이젠 더는 못 해.’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노인이 악마처럼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는 실전 훈련을 대비한 전투기술을 배울 거다. 사격술, 백병전, 그리고 진형 전술 훈련과 통신 기술과 음어다. 음어는 다 외웠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대답하려다가 말을 아꼈다. 한 마디 내뱉을 체력도 아까웠다.
“뭐, 상관없어. 못 외우면 외울 때까지 조지면 되니까.”
“…….”
“지금부터 체력훈련은 자율훈련으로 바꾼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혼자서 해.”
노인의 말에 생존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꽃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대신 진도를 못 따라오거나 개 같은 삽질을 할 때마다 한 건당 두 시간씩 개별 체력훈련 들어가니, 될 수 있으면 서로 귀찮게 하지 말자. 응?”
당연한 결말이겠지만, 30일의 훈련 동안 추가 체력훈련이 없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 * *
“이제야 좀 쓸만한 표정을 짓는구나.”
전투 훈련 2개월? 엿이나 먹으라지.
전투 훈련은 수준 미달이라는 이유로 백일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게 결국 모든 훈련소 생존자들은 적응해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한 한국인 생존자는 좀비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김정은의 목도 딸 수 있을 거라며 농담을 했다.
올리비아는 나중에 그게 전 북한 정권의 수괴라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웃었다.
“그래. 인마. 그렇게 눈깔에 꽉 힘을 주고 다녀라. 째려본다고 대가리에 총 쏘는 머저리들은 없을 테니까. 그래야 좀비 새끼가 나타났을 때 병신처럼 눈 꽉 감는 사태는 안 일어날 것 아니냐.”
그리고 오늘은 전투 훈련을 끝내고 마지막 단계인 실전 훈련을 나가는 날이었다.
“오클랜드 도시권 중 아직 정리되지 않은 구역을 정리할 거다. 이번 작전만 잘 수행하면 그다음부터는 정식 주민이 될 수 있으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개죽음당하지 않게 잘해라. 애송이들?”
대답이 우렁찼다.
그들은 수색 4조에 편성됐다. 4조는 캠프 리더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이상 주로 안전지역이라고 판단된 곳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물자를 수습하는 역할을 하는 부대라고 했다.
물론, 안전지역이라는 게 좀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생존자 집단이나 변종 따위가 없는 곳을 뜻했다.
마흔여덟 명의 조원들이 여러 대의 트럭에 실려 이동했다.
한 조에 편성된 신입 조원들이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신입 스쿼드의 분대장이 긴장감을 덧칠했다.
“잘 들어. 좀비에게 물린 채로 동료들에게 되돌아오는 짓은 하지 마. 만약 물리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는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싸워. 본인이 죽는 걸 겁내지 말고 나 때문에 동료가 죽는 걸 무서워해야 해.”
실전 훈련에서 신입 전투원의 생환율은 95%라 했다. 웬만하면 살아서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다.
올리비아는 지급된 소총을 쓰다듬었다. 반나절 가까이 달린 트럭들은 황량한 시가지 입구에서 멈췄다. 벌써부터 죽음의 기운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