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공포의 대상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폭발과 동시에 등을 돌렸던 세 사람은 곧바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변종을 향해 돌아서서 저마다의 흉기들을 힘껏 내리쳤다. 노아까지 가세하자 그 광경이 볼만했다.
마치 떡을 반죽하듯,
또는 보리를 타작하듯.
화려한 멋도, 뛰어난 기술도 없는 거칠고 단순한 휘두름이었다. 꿈틀거리는 변종을 반죽이라도 하듯 내려치고, 또 내리쳤다.
후, 숨을 고른 요한이 충격에 꽉 다물린 놈의 입가를 마체테로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변종의 입가가 살짝 벌어지자 힘껏 팔을 비틀어 놈의 입을 벌렸다. 동시에 노아가 그 입에 대변종 수류탄을 박아 넣고, 뒤이어 하진이 노아가 내려놓은 해머를 휘둘렀다.
쾅!
변종의 몸뚱어리가 크게 경련했다.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정확하게 세 번을 더 반복했다.
“……와 씨. 지독한 애송이들.”
그것도 모자라 부들부들 떠는 변종 좀비 위로 이중 삼중으로 그물을 친 뒤 쇠사슬을 몇 겹씩 둘렀다.
마침내 놈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을 때가 되자, 번데기처럼 포획된 덩어리 속에서는 애처로운 비명만 들렸다.
네 사람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들의 시선이 조원들을 향하자 조원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요한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툭 내뱉었다.
“뭐 해, 좀비들 마저 정리해야지. 저거 저대로 무너지게 둘 거야? 차 후진해. 분대장들, 움직여.”
살아남은 분대장들이 부리나케 차량을 향해 달려갔다.
몇 시간 후, 변종의 발광이 멈춤과 함께 좀비 웨이브도 끝났다.
정확히는 좀비 웨이브가 끝난 건 아니었다. 주변 좀비의 씨가 말라붙었다.
공영주차장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시신의 산이 쌓였다. 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점점 시체가 쌓이고, 그 산을 밟고 올라와 넘어온 시체가 다시 그 앞에 쌓였다. 철조망에 매달렸던 좀비들은 그대로 철조망 사이로 날아온 총알에 쓰러졌다. 아이언피스트가 제압된 이후부터는 사실상, 승부가 결정 났다.
남은 것은 반수로 줄어든 수색 4조와 헬기를 타고 온 지원군. 그리고 대기를 가득 채운 썩은 냄새뿐이었다.
칙-
하나둘 담배 연기가 올라왔다.
요한은 반대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철구와 가을을 불렀다.
“불렀습니까, 대장.”
“4조 사상자 인원 파악해서 보고해. 가을이는 어르신 헬기로 모시고.”
“예.”
요한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대답하는 철구와 가을의 목소리 또한 무던했다.
살아남았다는 환희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 가고 낮이 오듯, 24시간마다 지구가 돌아가듯, 그렇게 당연한 일이 지나갔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올리비아는 주저앉듯이 차량에 기대어 있었다. 백일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훈련받았던 신입 조원들은 모두 죽었다. 자신들을 이끌어주던 분대장도 단 한순간에 죽어버렸다. 그토록 허무하고, 끔찍하게.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도,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꿈인 것처럼.
<올리비아.>
굵게 파고드는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온 구원자가 서 있었다.
<다친 곳은?>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다른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아?
생경한 느낌이 볼을 타고 흘렀다. 느껴본 지 오래된 이상한 감각이다. 하진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눈 밑을 훔쳤다.
되레 얼굴이 지저분해지자 순간적으로 멈칫한 하진은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운이 없었다.>
<…….>
<잘 견뎠다. 이제 모친에게 가서 그녀와 함께 편히 지내도 돼.>
자신을 토닥거리는 손길에 그녀는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그제야 그녀는 살아남았음을 실감했다.
올리비아는 오늘 처음으로, 종말을 마주했고, 종말과 싸워 이겨내는 사람들을 겪었다.
함께 싸우지 못했다. 단지 그들의 처절함을 겪을 뿐이었다.
자신이 숨어서 살아남는 동안, 이들은 이토록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요한을 향했다.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주춧돌처럼.
“총 사상자, 24명입니다!”
“물린 사람들은?”
“두 명 있습니다.”
“전신포박하고 격리해. 면역 판정되면 따로 보고해서 나한테 보내고.”
“예.”
그는 그저 제 할 일을 한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뿐이었다.
“돌아가자. 집으로.”
그녀는 그를 멋대로 재단한 자신이 얼마나 건방졌는지 깨달음과 동시에, 어쩌면… 정말로 이곳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확신이었다.
17.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2019. 12.
뉴질랜드. 오클랜드.
종말 3년, 그리고 하루 후.
소란스러웠다.
“쏴! 쏴!”
“아저씨, 나 코인!”
그리고 요한은 이 소란스러움이 마뜩잖았다.
“하…….”
요한이 제집 거실에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게임을 하는 두 남녀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이 자식들은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게임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이게 뭔 행패야, 모처럼 휴가에.”
“모처럼 휴가니까! 놀러 왔다!”
“그러니까 왜 우리 집에서.”
“그야, 형씨랑 놀고 싶기 때문이지.”
“두 시간째 너희 둘이 한 거라곤 내 냉장고를 털어먹고 게임을 한 것뿐인데?”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더니 헤헤, 하고 웃었다. 그런 다음 윙크까지 해 보인다. 요한은 말없이 거실에 걸려 있는 소총을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공손하게 자리에 앉았다.
“세리야 둘째 치더라도, 스위퍼 너는 웬일인데? 다른 녀석들은?”
“나는 둘째 쳐 주는 거야? 그럼 계속 와도 돼?”
“조용히 해.”
“넵….”
스위퍼는 풀죽은 척하는 세리를 보며 깔깔 웃다가 결국 등짝을 얻어맞았다. 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외팔이 형씨는 데이트. 꽃미남 형씨는 애 봐.”
“너도 제발 데이트 좀 해라. 애라도 낳던지.”
“전자를 안 하는 데 후자를 어떻게 하겠어? 그렇지, 아저씨?”
“맞아 형씨.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아 요즘은 정말이지 삶의 낙이 없어. 좀비도 없고, 변종도 없고, 새로운 사람도 없고.”
스위퍼가 거실에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의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는 변종과 좀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수가 줄어든 게 아니다. 아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상처로 인한 감염조차 한 건도 없었다. 그리고 한 명의 부부가 무사히 출산했다.
아이와 산모 모두 건강했다.
캠프 요한에 잊을 수 없는 타격을 입혔던 변종 아이언피스트의 습격 이후, 순탄하게 진행되던 생존자 구조 작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다 그대로 정체됐다.
생존자들은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전 세계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력을 올려 누군가의 게임을 망치려던 요한의 노력은 빛이 바랬다.
호주, 동남아, 태평양 군도까지.
어느 순간부터 생존자들의 모습이 뚝 끊겼다. 마치 좀비와 변종들이 사라진 것처럼 감쪽같이.
6개월 전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제외하면 무료할 만치 정적인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도 목적의식도 희미해졌다. 그에 더해 요한의 감정에 찬물을 완전히 끼얹은 건 6개월 전의 한 죽음이었다.
박 노인의 죽음.
세리, 혁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캠프의 중심을 잡아주던 박 노인이 사거했다.
사인은 호흡기질환과 면역력 약화로 인한 합병증.
좀비 바이러스도 변종에 의한 살해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질병사였다.
박 노인은 그냥 죽었다.
요한은 정말 오랜만에 정신을 못 차리고 며칠을 죽은 상태로 보냈다.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다가 다시 자신을 붙잡아 올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당신께 의지하고 있었는지.
박 노인은 그의 마지막 수확물과 함께 봉안됐다. 드물게도 납골이 봉안된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호상이다. 적어도 곱게 죽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용 노인은 뒤늦게 마음을 텄던 지기의 죽음에 침묵했고, 서준은 말없이 상주를 맡았다.
그날만큼은 캠프 요한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마치 그의 마지막 선물이라도 되는 듯, 박 노인의 죽음 이후 단 한 번의 좀비도 등장하지 않았다.
요한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러고선 세리의 옆에서 똬리를 틀고 잠든 흑구의 털을 쓰다듬었다. 용맹하게 자라줬지만, 녀석도 요새는 실업자 신세다.
“나가서 둘이 테니스라도 치던가.”
“싫어. 이 아저씨랑 하는 건 노잼이야.”
“으하하, 67전 67승이거든.”
…그 와중에 67번이나 덤빈 건 조금 대단하네.
요한이 타온 차와 내온 쿠키를 먹으며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동안,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문을 두드렸다. 재호였다.
“대장님. 휴가 중에 죄송한데요.”
“어, 재호야. 무슨 일이야.”
“누가 대장을 찾아왔어요.”
“찾아와? 누가?”
“새로운 생존자 같은데…….”
요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새로운 생존자면 생존자지, 생존자 같은데는 또 뭐야?
“생존자면 주민등록하고 기본군사훈련소를 보내야지, 왜 나를 찾아? 그것도 휴가 중에.”
“그게… 그….”
요한이 다시 한번 눈썹을 찡그렸다.
“재호, 요새 편하지?”
“그게 아니라요…….”
“시작됐다. 꼽질 요한.”
“아저씨가 잘못했지. 오빠가 무슨 유치원 원장님도 아니고. 캠프 대장이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인가?”
재호가 울상을 짓자 요한이 픽 웃었다.
“농담이야. 어떤 사람인데?”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 캠프 안에서 갑자기 나타났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요한은 물론, 스위퍼와 세리의 표정까지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언제.”
“오늘 아침에요.”
“오늘 경계조가 몇조지?”
“1조요.”
“스위퍼.”
“아, 망해버렸고…….”
스위퍼가 머리를 짚으며 일어섰다.
경계 중에 침입자를 허락한 것은 수위 높은 처벌 대상이다. 당사자, 분대장부터 조장까지 누구도 면피할 수 없다.
“대장님, 잠시만요. 제가 경계조를 다 확인해봤는데요, 침입할 만한 경로가 전혀 없어요. 어제 새벽-오전 경계조의 조장은 에디였고요.”
“그건 이상한데.”
스위퍼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에디는 다른 건 몰라도 필드 매뉴얼 만큼은 칼 같이 지키는 분대장 중 하나였으니까.
얼마나 후임들을 찰지게 갈구는지, 그의 선임 경계조로 들어온 조는 눈길 한번 돌리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할 정도다. 빈틈이 있을 리가 없다.
“더 놀라운 건, 여자아이였어요.”
“여자? 아이?”
“예.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요. 그래서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계속 추궁했는데, 하는 말이라곤 계속 나의 요한을 만나게 해달라는 말뿐이었어요.”
별일이 다 있군.
생존자들의 씨가 마른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여자아이라? 게다가 저 이상한 소유격은 뭐야?
“지금 뭘 하고 있지?”
“독방에…….”
“좋아. 데려와 봐.”
잠시 후 재호가 나갔다가 두 명의 수색 조원과 함께 되돌아왔다. 그들의 앞에는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여자아이는 요한을 보자마자 느닷없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스위퍼가 번개같이 일어나 여자아이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댔다.
“어이 꼬마야,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지. 그러다가 예쁜 머리가 날아가 버린단다.”
목숨의 위협에도 소녀는 그저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오로지 요한만이 담겨 있었다.
요한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어차피 무장은 모두 해제시킨 뒤다.
제지가 사라지자 소녀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고 나서 요한을 폭 감싸 안았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껴안듯이.
“……?”
경악과 침묵이 동시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