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인적이 드문 곳까지 도착한 스위퍼가 숨을 골랐다. 지나고 보니 제물로 두고 온 형씨가 약간 신경 쓰였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스위퍼는 애써 무시했다. 쉽사리 잡힐 위인으로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인물이다. 죄책감을 느끼기에는 대가가 값비쌌다.
스위퍼가 몸을 움직였다. 소란이 났으니 자신도 지금부터는 위험에 노출된 셈이었다. 여기저기서 돌아다니는 좀비들과 제 목소리를 기억하는 골드문 생존자들을 피해 보라를 찾아내야 하는 목표가 남아있었다.
‘한동안은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을까, 매장 뒤쪽으로 돌아 지하로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머릿속을 맴돌던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스위퍼는 이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소란이 없다.
분명 그 친구도 총기를 가진 데다가 한 가닥 하는 위인이었다. 상대는 수십 명이 넘는 골드문 생존자들.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니 한바탕 전투가 있었을 텐데, 이렇게 잠잠하다고?
‘뭔가 이상한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을 발견한 생존자 하나가 소리를 꽥꽥 지른 탓에 잠잠하던 백화점이 들썩거렸기 때문이었다.
“여기다! 여기에 있다!”
“…제기랄.”
스위퍼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설마 한패였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 사람이 분명 골드문 생존자를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했으니까.
여기저기서 발걸음 소리와 무전기 소리가 울렸다. 자신을 둘러싼 인기척과 좁혀오는 포위망이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잡아!”
그가 도망이라도 칠세라 한 명이 황급히 달려들었다. 스위퍼가 주먹을 내질러 그의 턱을 후려쳤다. 손이 얼얼할 정도의 정타였다.
스위퍼는 한 명을 기절시킨 후 다시 난간을 잡고 뛰어내렸다. 한결 어두워진 장소에서 접근하는 사내의 안면을 도끼로 후려친 후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남자를 발견한 스위퍼가 반사적으로 몸을 튕겼다.
“죽여도 괜찮으니 놓치지 마!”
누군가의 고함. 그리고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총구. 스위퍼가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총기를 든 사내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그가 총구를 돌리며 대응하려 했지만 스위퍼의 움직임이 빨랐다.
스위퍼가 기절한 사내를 겨드랑이에 낀 채 한 손으로 소총을 들고 적들을 위협했다. 놈들은 머뭇거리면서도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스위퍼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형씨들, 비켜. 뒤지기 싫으면.”
“도망치면 내 손에 죽는다.”
중간보스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으르렁거리자 움찔하던 사내들이 다시금 한 발짝 거리를 좁혔다.
스위퍼가 눈을 홉뜨며 중간보스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그때, 비명이 들렸다. 얇고 가느다란 비명이었다.
귀에 익은 비명에 순간적으로 스위퍼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보라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가 한눈을 판 사이 한 명이 기습했다. 스위퍼가 기습을 피하고 개머리판으로 사내의 안면을 강타했다. 피가 터지고 사내가 뒤로 나뒹굴었다.
“뭐해! 동시에 달려들어!”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수의 인영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스위퍼가 겨드랑이에 꼈던 사내를 놓음과 동시에 총기를 들어 노리쇠를 후퇴전진하고 개머리판 견착, 달려오는 적들을 향해 격발했다.
틱.
황망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총에는 총알이 없었다.
“What the…….”
그 순간 충격과 함께 뎅- 하고 머리가 울렸다.
눈앞이 암전됐다.
* * *
다시 정신을 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우악한 손길에 손발이 얼얼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린 것과 쿵, 소리와 함께 등 쪽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진 건 거의 동시였다.
충격에 정신이 맑아지며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망했는데.’
웬만한 일에도 당황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붙잡히는 건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아귀가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있나?
무거운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이자 시야가 되돌아왔다. 눈을 뜬 스위퍼의 앞에는 아까 봤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붙잡힌 거였어?
난 또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네.
스위퍼가 알은체하며 인사했다.
“안녕, 형씨? 우리 구면이지?”
“입 다물어, 빌어먹을 자식.”
“거, 입 험한 거 하고는. 형씨 때문에 잡혔는데 미안하지도 않아? 도대체 왜 난데없이 공격한 건데?”
“그들과 한패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스위퍼가 순간 욱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형씨 안목이 정말 별로네. 딱 봐도 이렇게 선한 사람을 그런 깡패들이랑 엮는단 말야?”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그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렸으나 그 전에 문이 열리고 슈트를 입은 사내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상무가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욕이 절로 나오는 면상에 스위퍼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상무가 의자를 끌어와 앉은 뒤 스위퍼를 향해 말했다.
“오 우리 청소부 친구. 이거 오랜만에 보는군. 다시 찾아오면 내가 죽이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내 걸 돌려줬으면 안 찾아왔을 거 아냐.”
상무가 웃으며 스위퍼의 뺨을 후려쳤다. 짝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스위퍼가 피 섞인 침을 탁, 뱉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재밌게 놀아줄 테니, 기대하라고. 친구. 아마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거야.”
상무는 씨익 웃고는 스위퍼의 볼을 꼬집은 뒤 의자를 돌렸다.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
모든 일의 원흉인 자다. 스위퍼는 정말 오랜만에 사적으로 살의를 느꼈다.
상무가 떨어져 나가고 얼굴 바로 앞에 총구가 들이밀어졌다. 쓸데없는 행동을 하면 바로 쏴 버리겠다는 듯 흉흉한 기세였다. 스위퍼가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상황은 극단적이었으나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 정신만.
“너는 누군데 우리 캠프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니?”
스위퍼에게서 관심을 거둔 상무가 이번엔 다른 침입자를 향해 물었다.
“주변을 배회하던 부랑자입니다. 식량으로 쓸 만한 게 있나 탐색차 들어온 것뿐이고요. 본의 아니게 실례했습니다.”
“부랑자치고는 행색이 너무 깨끗한데.”
“운 좋게 근처 민가에서 씻고 나온 참이라서요.”
“크, 좋아. 이럴 때일수록 응?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고. 얼마나 좋아 깨끗하니. …총기가 있더군. 왜 저항하지 않았지?”
뭐야, 저항하지 않은 거였어?
스위퍼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싸우다 패했다고 생각했지, 저항도 안 하고 붙잡혀 올 줄은 몰랐다. 앞의 싸움을 생각하면 그렇게 약한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미친 형씨네. 이 새끼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고 투항해? 볼일이 있는 게 아니었어?
스위퍼는 할 말이 많았으나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점잖은 양반처럼 조곤조곤하게 상무를 설득했다. 자신을 부하로 받아들이라고. 180도 달라진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할 정도였다.
“내 밑에서 일할 기회를 주지.”
그 말을 믿기라도 하듯 상무는 흡족한 표정으로 침입자를 꼬드겼다. 스위퍼는 상황을 지켜보며 조소했다.
자신이 볼 때 저 형씨는 절대로 누구 밑에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저렇게 말하는 것도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터다. 누가 봐도 뻔한 속셈이 보이는데, 난세의 영웅병이 걸린 상무는 그저 좋다고 껄껄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요한이라고 자신을 설명한 인물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그들을 총포상으로 유도했다.
‘병신 형씨들, 설마 아직도 거기에 총이 남아있겠어? 진작에 다 빼돌려 뒀겠지.’
물론 상무도 순순히 그 말을 믿는 건 아닐 터다. 단지 진심을 확인해서 부하로 맞이할지 아닐지를 결정하기 위한 거겠지.
“이따 다시 오지. 너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연장 챙겨서 따라와.”
“경계 서고 있는 인원들도 부를까요?”
“됐어. 열심히 망보라 해.”
원하는 대답을 들은 상무는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으며 되돌아갔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사내들이 썰물 빠지듯 우르르 몰려나갔다.
둘의 감시를 명령받은 사내 한 명은 상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상무가 사라지자마자 긴장이 풀린 듯 문가에 주저앉아 담배를 물었다.
그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요한이 옅은 숨을 냈다. 그 뒤로 스위퍼의 비아냥거림이 들렸다.
“형씨, 똥꼬 빠는 소리가 예술이던걸.”
“조용히 상황파악이나 해라.”
순식간에 달라진 요한의 모습에 스위퍼가 허, 탄식을 했다. 상무를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의 온도 차가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이 카멜레온 같은 남자.
스위퍼가 혀를 차는 사이, 요한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가 중간중간 뭐라 말을 붙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한두 시간쯤 지났을 때, 보초를 서던 사내가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덜컥, 하고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요한이 묶인 상태로 신발을 벗으려 발버둥 쳤다. 신발이 슬금슬금 벗겨졌다. 스위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봐, 뭐 해?”
요한은 스위퍼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발을 벗는 데 집중했다. 낑낑대며 신발을 벗자 양말 사이에 끼워져 있는 면도날이 보였다. 마치 팔딱거리는 잉어처럼 두 발을 뒤로 당겨 손끝으로 향했다.
모양새는 우스꽝스러웠지만, 면도칼을 손으로 옮겨 쥐는 덴 성공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요한은 손발을 묶은 밧줄을 끊어내고 탁탁 털고 일어섰다.
“어, 어?”
“왜 그렇게 놀라? 탈출하는 사람 처음 봐?”
“와, 그런 데다가 그런 걸 준비해놓는 사람이 있다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니까.”
요한이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자 스위퍼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그는 안감을 찢어 손바닥에 감고 반대쪽 신발에서 낚싯줄을 꺼냈다. 곧이어 발소리가 들려온다. 문이 열리고, 요한은 번개같이 사내의 목에 낚싯줄을 걸고 잡아당겼다.
“끅, 끄윽······.”
요한이 양손에 힘을 꽉 주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사내가 바둥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요한이 사내의 호흡을 확인해보고 품에서 나이프를 찾아 그의 뇌를 찔렀다. 그런 다음 사내의 시신을 샅샅이 뒤지니 품에서 무전기가 나왔다.
입을 떡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위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잘 훈련받은 요원 같은 움직임이었다. 점점 그에게 흥미와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죽일 필요까지 있었어?”
“내 몸에 손을 댄 시점부터 모든 행동은 정당방위야.”
그것참 마음에 드는 대답인걸.
요한이 스위퍼의 말에 대답하며 환풍구 문을 열었다. 잠긴 환풍구를 우악스레 뜯어내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와, 진짜 개 멋있는데?”
안하무인 같은 부분이 보이긴 했지만, 확실히 매력 있는 형씨였다. 그 몸 자체에서 카리스마가 풀풀 풍기는 것이. 꼭 자신의 스승이자, 본사의 리더. 코드 네임 메시아를 보는 기분이었다.
스위퍼는 기대감 넘치는 얼굴로 요한을 바라봤다. 마침 놈들이 밖으로 빠져나갔으니 보라를 구할 절호의 찬스였다.
하나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좁은 환풍구에 몸을 들이밀었다.
“잠깐, 형씨!”
요한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무슨 용무냐는 듯.
“뭐 잊은 것 없어?”
“응? 없는데.”
“나는? 난 안 풀어줘?”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풀어줘?”
“아이참, 왜 이렇게 매정하실까.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풀어주세요. 형씨, 아니 형, 아니 형님. 저 이대로 두고 가면 죽어요. 아까 보셨잖아요!”
요한이 스위퍼의 태세 전환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형님 그러지 마시고.”
“죽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할 일이 있어서 살려두는 거니까.”
“할 일······?”
“내가 어디로 도망갔느냐고 물으면 저 환풍구를 통해 옥상으로 갔다고 대답해. 혹시 놈들 사냥 다 끝날 때까지 살아있으면 그땐 풀어주마.”
“형님! 야!”
요한이 열린 문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멋있다는 말은 취소다, 이 개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