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환점
주기적으로 한 번씩 있는 가족 모임이었다.
혈육 간의 정을 굉장히 중시하는 회장님 덕에 생긴 모임은 자율적인 참가를 기본으로 했지만, 당연히 말뿐이었기에 불참 인원은 없었다. 오죽하면 제멋대로 사는 이상현도 이 모임에는 꼬박꼬박 얼굴을 비쳤다. 둘은 따뜻한 덕담이 오가는 자리에서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입에 들어오지도 않는 만찬이 맛있는 척, 관심도 없는 대화가 즐거운 척, 기계적으로 웃던 서진우에게 문득 회장님이 관심을 보인다.
“진우는 일 잘 배우고 있고?”
“네, 모두 잘 도와주셔서 어려움 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네가 유학만 다녀왔어도 그 자리에서 고생하는 일은 없을 텐데, 지금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떻겠니.”
“전 가족이 있는 한국이 좋아요, 할아버지.”
정서원을 두고 유학을 떠날 수 없어 한국에서 진학한 그에게 지금에 와서 유학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해사하게 웃으며 집안 막내다운 대답을 한 서진우는 다른 이에게로 관심이 옮겨진 후에야 시계를 확인했다. 홀로 있을 정서원이 신경 쓰였다. 외출하기 전에 정서원의 식사를 챙겨 주고 오긴 했으나, 그는 제대로 먹질 못했다. 속이 울렁거려 못 먹겠다고 울기까지 하는 걸 달래고 다그쳐서 몇 수저 들게 만들었더니 결국에는 토악질까지 하고 말았다. 변기를 부여잡은 채로 안쓰럽게 떨리던 등이 떠올랐다. 넓은 펜트하우스에 갇혀서도 힘들어하던 사람이었는데 행동반경이 더욱 제한되니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당장 갈 수 없는 상황에 초조함이 치밀어 애꿎은 넥타이만 흩뜨렸다.
그가 외도를 목격하고 가둬 놓은 지 벌써 세 달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름대로 고집이 있고 그만큼 자기주장이 강하던 정서원은 혼쭐이 난 후로는 줄곧 기가 죽어 있었으나 요즘은 유독 정도가 심했다. 우울해하는 것도 같고, 무기력해하는 것도 같고, 우울증 때문인지 잠도 늘었다. 감금을 시작하기 전 걱정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졌다. 그의 목적은 정서원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이지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다. 나날이 유약해져서 오롯이 그에게만 의존하는 정서원은 달가웠으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모습은 또 안타까웠다.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서진우는 오늘 나가지 말고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냐며 울다가 잠든 정서원을 내내 머릿속에서 떨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오랜만에 봬서 좋았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진우야. 말로만 그러지 말고 언제 한 번 본가에 놀러와.”
“하하…… 물론 그래야죠. 조만간 찾아뵐게요.”
지나칠 정도로 느긋했던 식사가 겨우 두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서진우는 어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뒤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바로 차에 오르려던 그를 사촌 형제 이상현이 붙잡았다.
“진우야.”
이상현은 아주 친한 사촌 동생을 다루듯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주로 정서원 앞에서 가식을 떨 때 보이던 웃음이다. 서진우는 아직 돌아가지 않은 가족들의 눈을 의식하여 부드럽게 응대했다.
“뭔데.”
“서원 씨 잘 지내나 궁금해서. 네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았을 테고,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 응?”
“신경 꺼.”
“정서원 어디다 숨겨 놨어?”
자상한 얼굴로 웃고 있는 이상현에게서 미처 감추지 못한 사나운 기세가 이글거렸다. 서진우는 이상현이 정서원에게 못내 진심인 듯 굴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그래 봤자 정서원이 쓰다 버린 장난감에 불과한 주제에, 그는 화를 낼 입장도 걱정을 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싸늘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서진우는 그가 없던 두 달간의 정서원을 모른다. 그 두 달간 정서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배웠는지, 그 과정에 감정적 교류가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지난 시간은 서진우에게서 날이 선 빈정거림을 이끌어 냈다.
“개새끼처럼 냄새 잘 맡더니 이번엔 못 찾겠나 봐.”
“진우야. 기고만장하지 말고. 내가, 너한테 잠깐 맡겨 둔 거야. 응? 함부로 쓰지 마.”
“하하하…… 형, 씨발, 재밌는 개소리를 다 하네.”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서 결국 씹어뱉듯 사나운 목소리가 나왔다. 양아치면 양아치답게 적당히 재미를 봤으면 손을 떼야지,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리고 그것조차 꽤 진지하다는 방증 같아 기분이 참 좆같아진다.
서진우는 이곳이 사람 눈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애써 상기시키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상현과 정서원을 잠깐 공유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가 모르는 공백을 채우려는 집착에 지나지 않았다. 정서원의 일상, 학교 친구, 누구와 연락했고 몇 시에 외출하고 귀가했는지. 순조롭던 하루에 끼어든 이물질을 확인하는 것도 서진우가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요령 없는 정서원이 바람을 피울 때는 어떻게 굴었는지 따위를 살피는 것 역시 그 연장선에 불과했다.
이상현이든 서진우든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 서진우는 그가 목적을 갖고 허락한 범위에서 자꾸만 벗어나려는 이상현을 볼 때마다 아주 불쾌한 월권행위를 당한 것처럼 속이 타올랐다.
“형. 섹파였으면 섹파답게, 어?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없어 보이게.”
“진우야, 많이 불안한가 봐. 서원 씨 사랑한다며, 왜 못 믿어?”
물론, 서진우가 날카롭게 구는 이유를 아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이상현으로서는 그저 즐거울 따름이었다. 정서원이 이상현에게 구구절절한 감정 따위 없다는 걸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그걸 확정 지을 근간이 없으니 결국 신뢰하지 못하는 거다. 결코 좋은 성격은 아닌 이상현은 늘 그 흠결을 파헤쳤다.
“서원 씨가 왜 나만 오래도록 만났을까 궁금해서 그러나. 딴 새끼들은 다 먹다 버렸는데 말야. 응? 내가 알려 줘?”
“아, 씨발…….”
서진우는 잡고 있던 차 문을 닫고는 이상현에게로 몸을 돌렸다. 썩 좋은 얘기가 오가지 않는 둘의 얼굴은 표면적이나마 웃음을 띠고 있다. 감추고 참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어느덧 기세가 살벌해져 있었다.
“뭘 그리 화내, 진우야. 세컨드 따위가 말하는 건데, 응? 네가 좀 재미없으면, 서원 씨가 다른 데서 재미를 찾을 수도 있는 거잖아. 너그럽게 봐줘야지.”
“너는, 씨발, 세컨드도 못 돼. 정서원이 나 없을 때 잠깐 갖고 놀다 버린 거지. 가망 없는 거에 괜히 눈독 들이지 말고, 꺼져.”
“하하…… 어린놈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어. 진우야, 가서 서원 씨한테 내 안부 좀 전해 줘. 너그러우신 정실께서 그렇게 좀 해 달라고. 응?”
“씨발. 닥치고, 꺼지라고.”
주차장으로 친척들이 들어서고 있다. 능청스러운 얼굴에다 또 멍과 핏자국을 달아 주고 싶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래 봤자 더러운 치정 싸움만 들통날 뿐이었다. 서진우는 왈칵 치솟은 화를 억누르며 이상현을 무시하고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거는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져 있다. 서진우의 속을 완전히 비틀어 놓은 이상현은 웃는 낯으로 선선히 물러났다. 이윽고 서진우가 탄 포르쉐가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한참 울다가 잠들었던 정서원은 이마를 매만지는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이제는 그가 누군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가물가물한 눈에 시력이 돌아오기도 전에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진우야……?”
“일어났어? 속은 괜찮아?”
정서원은 제 얼굴을 살뜰히 만져 주는 손길에 고개를 기대며 작게 끄덕거렸다.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기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바닥을 친 식욕도 조금 쉬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정서원은 서진우의 걱정이 너무 좋아서 그런 말은 하나 내뱉지 않고 양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눈을 감은 채 커다란 손에다 얼굴을 비비는 몸짓에 아양이 듬뿍 담겼다. 서진우는 얌전한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정서원을 달래 주었다. 아파서 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복잡한 과정은 당장 때려치우고 무조건 보듬어 주고 싶은 성급한 맘이 앞선다.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다 무슨 소용인지, 터놓고 애정만 속삭여 주기에도 부족한데.
정서원에게로 허리를 숙인 서진우가 창백한 뺨에다가 입을 맞춘다. 정서원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키스를 졸랐다. 서진우는 그것을 다정히 받아 주었다. 쪽쪽, 조용한 침실에 낯간지러운 접촉음이 몇 번이나 울렸다. 근래 들어 시무룩하던 정서원이 보기 드물게 환하게 웃는다. 그러면서도 기력이 나진 않는지 곱게 접힌 눈이 가물거렸다.
“형, 아직 피곤해? 조금 더 잘래?”
“더 자기 싫은데…… 진우랑 얘기하고 싶어…….”
“형 일어나면 실컷 얘기하자. 나 여기 있을 테니까, 졸리면 참지 말고 더 자.”
“으응…….”
자기 싫다고 칭얼거리던 정서원은 나른함을 못 이기고 금세 잠이 들었다. 서진우의 손은 꼭 붙든 채였다. 조용해진 방에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제야 서진우는 이미 일주일이 지난 정서원의 히트싸이클을 곰곰이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아무 전조 없이 지나간 처음 며칠은 단순히 환경이 바뀐 탓에,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갇힌 지 오래되어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는 정서원은 히트싸이클이 지나간 것도 모르는 것 같았으나 뉴욕에서도 주기를 확인했던 서진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식욕 감퇴, 구역질, 늘어난 수면욕, 근래 높아진 체온. 단순히 우연이라 넘기기에는 그 교집합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우의 수가 하나 있었다.
히트싸이클이 아니면 착상도 잘 안 되는 열성오메가였던지라 지금껏 단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가능성이 대두됐다. 그래도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혹시 다른 병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서진우는 정서원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잡힌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에서 핸드폰을 들고 고민하던 그가 어릴 때부터 신세를 졌던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
………….
그리고 정서원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파자마가 입혀져 있었고 팔에는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다. 정서원은 나른한 눈을 깜빡여 가며 제일 먼저 서진우를 찾았다. 잠들 때 분명 옆에 있어 준다고 했었다. 그러나 침대 근처 의자에 놓인 가방 말고는 넓은 방 어디에서도 서진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진우야…….”
부르는 소리가 앓는 것처럼 흘렀다. 아무도 없는 방에는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정서원은 불현듯 두려움이 왈칵 치솟아서 서진우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팔에 꽂힌 링거나 오늘 아침 심한 구토를 하며 열이 올랐던 몸을 간과한 선택이었다. 그는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시야가 핑그르르 도는 것을 느꼈다. 그러며 몸이 휘청하는 것 같더니,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는 러그가 깔린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뒤늦은 둔통도 몸을 때렸다. 링거 바늘이 뽑히며 상처가 난 건지 하얀 러그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있다. 정서원은 기운이 다 빠진 몸을 일으킬 힘도 나지 않아 피가 찔끔 나는 팔뚝을 부여잡고 낑낑거렸다. 괜히 슬프고 서러워서 눈물도 찔끔 났다. 옆에 있어 준다고 했는데…….
눈물만 찔끔거리고 있는데 닫힌 문이 벌컥 열렸다. 서진우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정서원을 발견하고는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다급히 달려왔다. 풀썩 무너진 몸을 감싸 안고 나른한 얼굴과 피가 난 팔뚝을 차례로 보듬는 그에게서 극진한 애정이 엿보인다. 그 달콤한 애정이 담뿍 섞인 목소리가 정서원에게로 흘러들었다.
“형, 왜 그래. 왜 넘어져 있어. 어디 아파? 무슨 일이야. 응?”
“일어났는데 진우가 없어서…… 찾아가려고, 했는데, 넘어졌어. 미안해…….”
“잠깐 얘기 좀 하느라 복도에 있었어. 내가 형 두고 어딜 가. 응?”
“미안…….”
정서원은 꼭 혼이 날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기가 죽어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그를 서진우가 못내 걱정스러운 듯 감싸 안고는 이마와 볼에 여러 차례 입을 맞췄다. 정서원이 그 품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느릿하게 들이마신다. 부드러우면서 향긋한 체취가 좋았다. 이내 안정을 찾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서진우가 다시금 침대에 눕혀 주더니 이불까지 덮어 준다. 정서원은 서진우를 찾는답시고 사고를 친 게 그제야 좀 창피해졌는지 그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리며 눈치를 보았다. 눈물이 멎은 촉촉한 눈동자가 서진우를 살폈다.
“진우야…… 나 어디 아픈 거야?”
“아니야. 형이 오늘 너무 못 먹어서 수액 놔 준 거야.”
“으응. 미안, 번거롭게 해서……. 앞으로 잘 챙겨 먹을게…….”
“괜찮아. 뭐가 미안해. 자꾸 미안하다고 하면 나 화낼 거야, 응?”
“으, 응…….”
서진우가 정서원을 달래 주는 사이 그의 뒤로 주치의가 다가왔다. 그는 넘어지고 피도 나는데 괜찮겠냐며 다소 유난스러운 보호자처럼 굴었고, 주치의는 웃으며 상처에 드레싱을 하고 반창고를 붙여 주는 것으로 처치를 끝냈다. 그러고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에 모시고 가 보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옆에서 가만 듣고 있던 정서원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괜히 서진우를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맘이 조마조마한데, 또 다정하게 구는 서진우를 보니까 뺨이 흐물흐물해졌다.
주치의에게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듣고 배웅을 하고 온 서진우가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더니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그는 침대 맡에 앉아 정서원의 손을 잡아 주었다.
“형, 왜 웃고 있어? 기분 괜찮아졌어?”
“그냥……. 근데 나, 병원 가야 돼, 진우야?”
“밖에 나갈 생각하느라 웃고 있었구나. 안 내보내 주면 어쩌려고. 응?”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당황하여 말을 줄이는 정서원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인 서진우가 조금 혈색이 도는 뺨을 매만졌다.
“장난이야, 형. 내일 예약 잡아 놨으니까 같이 가 보자.”
“……나 어디 크게 아파?”
“아니야. 형이 요즘 잘 못 먹으니까 몸이 상했는지 좀 보려고.”
“그렇구나…….”
“졸려?”
정서원은 졸린 눈을 가물가물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우가 너그럽게 웃더니 정서원과 함께 침대에 눕는다. 그는 팔을 뻗어 정서원을 끌어안고 품을 내주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무런 상벌도 없이 내려온 다정함이라 오래도록 즐기고 싶었는데, 곁에만 있어도 맘이 편안해져 정서원은 그것을 즐길 새도 없이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 * *
아침에 일어난 정서원은 모처럼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수액을 맞고 일찍 잠든 덕인지, 제 알파 품에서 양껏 쉬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만 깨었을 때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품이 좋아 일어나고도 한참을 미적거리기만 했다. 좋은 향기가 나는 품에다 얼굴을 비비며 맘껏 체취를 맡기도 하고, 잠든 얼굴을 만져 보기도 하는 얼굴에 실없는 웃음이 걸린다. 이젠 서진우가 깨어 있을 땐 감히 할 수 없게 된 접촉이었다. 잠든 그가 한참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좀 더 욕심을 내어 입을 맞추자, 놀랄 새도 없이 그의 품으로 빨려들어 갔다. 수려한 얼굴은 갓 잠에서 깬 나른함을 머금고 있었다. 정서원은 놀라서 서진우를 바라봤다가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진우가 약간 나른하게 웃었다.
“자는 사람 두고 뭐 해, 형?”
“미, 미안. 나 때문에 깬 거야?”
“잠은 진작 깼는데 형이 계속 안기니까, 귀여워서.”
“…….”
원래 깨어 있었다니, 정서원은 조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맘대로 만지고 뽀뽀할 땐 언제고 또 얌전해진 그를 서진우가 부드럽게 다독인다.
병원은 두 시 예약이었다. 서진우는 아직 발이 다 낫지 않은 정서원을 안아다 욕실로 옮겨 씻긴 후 소고기죽을 끓였다. 다행히 역하지는 않았는지 정서원은 거부감 없이 잘 먹었다. 그가 한입 먹을 때마다 옆에 앉은 서진우가 입가를 닦아 주고 죽을 식혀 떠먹여 주었다. 갇히고, 매도 맞고, 매도도 당하던 입장에서는 꿈에도 꾸지 못할 호사였다. 앓아누웠던 게 진우 눈에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그렇다면 평생 아파도 괜찮을 것 같다. 정서원은 죽을 떠 주는 서진우를 힐끗 훔쳐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늦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에는 다시 침실로 옮겨졌다. 서진우는 정서원을 침대에 앉혀 놓고는 옷가지를 들고 왔다.
“나 옷 입는 거야?”
“그럼 거기서도 알몸으로 있으려고, 형?”
“아, 아니…….”
오랜만에 주어진 옷이 매우 낯설다. 정서원은 옷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눈치를 봐 가며 몸에 끼워 넣었다. 부드러운 천이 맨살을 스치는 느낌이 생소하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부대끼는 천이 거슬려서 무심코 벗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오히려 알몸으로 있는 것이 더 익숙한 스스로가 괴이하고 무서웠다. 옷을 입는 게 당연한 삶으로 돌아갈 순 있을까. 옷을 다 입은 정서원에게 다가온 서진우가 제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적힌 목걸이 위에 스카프를 둘러 준다.
“예쁘네, 잘 어울린다. 형.”
“…….”
“이제 약 바르자. 앉아 봐.”
시키는 대로 침대에 앉은 정서원이 발에 약을 발라 주며 반창고를 붙이는 서진우를 바라본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자신이 만든 상처를 살피는 얼굴이 자상하다. 모질게 굴다가도 다정해지고, 또 거짓말처럼 무서워지는 진우를 볼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서 눈물이 났다. 이제 영영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냥 상냥하던 진우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목이 메어 왔다.
서진우는 직접 양말까지 신겨 준 다음에야 몸을 일으켰다. 약상자를 치운 그가 정서원에게로 다가와 축축한 눈가를 문질러 준다. 부드러운 손길이 젖은 속눈썹을 가로로 쓸자 정서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걷힌 물기가 서진우의 손가락을 적셨다.
“많이 아팠어?”
“아니…… 내가 잘못한 거니까, 괜찮아.”
순종적인 답변에 서진우가 달래듯 입을 맞춰 주었다.
“혼자 걸을 수 있겠어?”
“응…… 이제, 거의 다 나았어.”
“아프면 말해. 어디든. 참지 말고, 응?”
“으응.”
착하게 대답하는 정서원이 아주 예뻐 보였는지 서진우는 놓아주지 않고 몇 번을 더 키스했다.
정서원은 그날에서야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천장이 높은 삼 층짜리 저택이었다. 매일 덧문이 씌워진 방만 전전하던 그로서는 자신이 삼 층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한눈을 파느라 계속 뒤처지는 그에게 “돌아와서 보여 줄게.”하고 다정하게 웃어 준 서진우가 손을 잡아 이끈다. 더 가둬 놓지 않겠다는 말일까, 정서원이 머뭇머뭇 따라 웃더니 뒤를 따랐다.
서울 근교에 있는 저택에서 예약한 병원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안 걸렸다. 주차를 한 서진우는 “속은 괜찮아? 울렁거리진 않고?” 운전 중에도 몇 번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하더니 괜찮다는 답변을 받고 나서야 안심한 듯 웃었다. 시동을 끄고 먼저 운전석에서 내린 그가 차를 돌아 조수석으로 다가온다. 허둥지둥 따라 내리려던 정서원은 그보다도 먼저 다가온 서진우가 문을 열며 손을 내밀자, 어색하게 손을 붙잡고 차에서 내렸다.
서진우의 손을 잡고 올라온 곳은 산부인과였다. 정서원이 조금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진우야, 왜 여기로 왔어?”
“예약 시간 다 됐으니까 올라가자.”
대답을 피하는 서진우에 가슴이 조마조마해졌으나, 그렇다고 검사를 안 받겠다 무작정 생떼를 부릴 수는 없었다. 정서원이 아무 말 못 하고 내리깐 눈만 삼박거린다. 모아 쥔 손끝이 꾸물거려지고 입술이 옹송그려졌다. 서진우는 “괜찮아, 긴장하지 마. 응?” 경직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그를 진료실로 이끌었다. 정서원은 그 품에 안긴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목걸이에 걸린 방울을 떼어 주지 않아서 걸을 때마다 발끝을 신경 써야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간 진료실에서는 의사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오랜만이에요.”
“어, 진우야. 왔어? 옆에 분이 오늘 진료받으실 그분이니?”
“네. 제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요. 형, 인사해야지.”
“…….”
의사는 서진우를 보고 반갑게 알은체를 해 왔으나 정서원은 서진우만 쳐다보며 입을 다물고 있다. 소심하게 그러쥔 옷자락에 미약한 힘이 들어갔다. 서진우가 조금 난처한 듯, 그러면서도 못내 귀엽다는 듯 웃더니 감싸 안은 어깨를 쓰다듬는다.
“미안해요. 형이 낯을 좀 많이 가려요.”
“긴장을 많이 하셨나 보네. 괜찮아요. 오늘 간단한 검진만 할 거예요.”
의사는 웃으며 오늘 받을 진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정서원에게는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기에 오로지 서진우만 경청하는 설명이었다.
정서원은 소변검사를 받고 혈압을 재고 체중을 쟀다. 마지막 히트싸이클이 언제였는지 간단한 문진도 함께였다. 그 모든 과정에 서진우를 동반한 것은 당연했다. “괜찮아, 형.” 그가 불안해하며 자신만 쳐다보는 정서원을 달래자 진료를 보던 의사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정서원 환자님, 환복하고 오세요.”
간호사에게서 가운을 건네받은 정서원이 우물쭈물하며 서진우를 바라본다. 그는 의사에게 무언가 설명을 듣고 있었다. 무슨 검사를 하는 건지, 왜 산부인과인지, 왜 자신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 건지. 불안하고 초조해서 심장이 떨렸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불길한 상상 때문에 꾹 다문 입술이 떨렸고 계속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무섭고 떨려서 그냥 집으로 가고 싶었다. 평생 갇혀 있어도 좋으니 이런 검사 따위 받고 싶지 않았다. 서진우에게로 다가선 정서원이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당기며 넓은 등에다 이마를 기댄다. 서진우는 그 지나친 의존을 다정하게 받아 주었다.
“형, 왜?”
“…….”
“아, 옷 갈아입어야 하는구나. 누나, 저 잠깐만요.”
‘도와줄까?’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는 당연하게 정서원을 이끌고 안쪽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치고 옷을 벗겨 주었다. 단추 하나 없는 셔츠와 버클이 없는 바지는 금세 벗겨졌다. 정서원은 환복을 도와주는 서진우에게 얌전히 몸을 내맡기면서도 못내 불안한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말을 할 듯 말 듯, 벌어졌다 오므라드는 입술이 떨렸다. 추측이 사실이 될까 두려워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무서워?”
서진우는 가운을 입혀 주며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 그 말에도 대답할 수가 없어서 정서원은 내리깐 눈만 깜빡거렸다. 속눈썹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 끝에 눈물이 걸렸다. 서진우는 불안해하는 정서원을 끌어안고 젖은 눈꺼풀에 나란히 입을 맞춰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속삭이는 목소리와 익숙한 페로몬이 정서원의 울렁거리는 속을 달랜다. 숨결로 스며드는 페로몬이 너무 좋았다. 그는 한참 품에 안긴 채로 눈물을 훌쩍이다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이제 검사받으러 갈까?”
“……으응…….”
서진우의 손을 잡고 나오자 간호사가 진료실로 안내했다. 가림막이 달린 의자와 초음파 기계가 있는 진료실이었다. 정서원이 무서워하며 잡은 손을 꼭 쥐자 서진우가 안아 주며 등을 쓸어 주었다. 뒤이어 들어온 의사는 아주 유난스러운 커플을 보는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너 원래 나가야 되는데, 환자분이 불안해하니까 봐주는 거야.”
“우리 형 좀 잘 봐줘요. 누나.”
“네네. 환자분, 여기로 누우세요. 진우야, 손 좀 잡아드려.”
머뭇거리는 정서원을 어떻게 오해하였는지 “가림막도 있고 담요로 잘 가려드리니까 괜찮아요.” 의사가 부드럽게 말해 주었다. 정서원은 불안한 얼굴로 서진우만 바라보았다. 겨우 진정한 가슴이 철렁거렸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될 것만 같아서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서진우는 자꾸만 제게로 안기며 피하려 드는 정서원을 정성껏 달래 가며 의자에 앉혔다. 의사는 곧장 가림막을 쳐 주고 벌어진 다리를 담요로 가려 주었다. 이어 등받이가 눕혀지자 조명이 약간 어두워졌다.
“초음파 받아 보신 적 있으세요?”
“없어요.”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거든. 아무튼, 없으신 거 맞죠?”
“제가 알아요. 없어요.”
의사가 고개를 저어가며 웃는다. 둘의 모습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임신인지 아닌지 조마조마한 오메가와 그를 살뜰히 보살피는 알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를 하는 것만으로도 떨어지지 못한 채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오메가는 잡은 손에 얼굴을 기대고 있고 알파는 기대 오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다. 친척 동생의 귀여운 유난을 지켜보던 의사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조금 차가우실 거예요. 힘 빼시고…….”
차갑고 미끈거리는 게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안쪽에 닿았다. 정서원이 몸을 움찔거리며 잡은 손에다 얼굴을 비빈다. 젖지 않은 곳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쾌한 감촉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질끈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서진우는 퍽 애틋해하며 정서원을 달랬다.
모니터를 보며 초음파를 하던 의사가 문득 한마디를 했다.
“어? 아기집이 두 개네?”
가슴이 철렁거렸다. 정서원은 더 듣고 싶지 않아 눈을 꾹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조용한 진료실에 퍼지는 소리를 막을 순 없었다.
“그게 뭐예요, 누나? 위험한 거예요? 우리 형 괜찮은 거 맞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쌍둥이야.”
“정말? 정말 쌍둥이야?”
“애 둘 키우려면 우리 진우 돈 열심히 벌어야겠네.”
기쁨에 젖은 목소리와 축하하는 목소리가 한데 들려오는데 정서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임신이었다. 진우가 산부인과로 데려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불안이 현실이 되어 심장을 들쑤셨다. 서진우의 품에서 겨우 진정되었던 떨림이 불안을 좀먹으며 번져 갔다. “형, 들었어? 임신이래, 쌍둥이래.” 서진우는 떨리는 얼굴을 쓰다듬고 입 맞춰 가면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기쁨이 클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당장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어떡하지, 형. 너무 좋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
“내가 앞으로 잘할게. 우리 형, 너무 고생했어.”
감격에 들뜬 목소리가 흘러들었지만 정서원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감은 눈을 떠서 환하게 웃고 있을 진우를 볼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배에 손을 올렸다. 태동이 느껴지기는커녕 납작하기만 한 배였다. 이곳에 생명이 움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악몽이었다. 정서원은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간신히 들어 올려 흐릿하게 보이는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수려한 얼굴에 환희가 어른거렸다. 커다란 실수를 들킨 날 이래 손에 꼽게 보이던 미소였다. 심장이 꽉 조여들어서 당장에라도 멎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무섭고 두려워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 고마워. 형. 나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무사히 우리 애 가져 줘서.”
이 애가, 진우 애가 아니면 어떡하지? 상상만 해도 밑도 끝도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 * *
“이제 5주 차래. 형 배에서 자라고 있는 거야.”
환복을 도와주던 서진우가 정서원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정서원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처음 웃어 보는 사람처럼 어물어물 따라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 띄워진 웃음은 곧 사그라질 것 같았으나 서진우는 개의치 않고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순순히 열린 입술 사이로 서진우가 부드럽고 다정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정서원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키스했지만 정서원은 제대로 호응하지 못하고 서진우의 옷자락만 그러쥐었다. 흘러드는 페로몬도 이때만큼은 불안한 가슴을 진정시켜 주지 못했다. 입술을 뗀 서진우가 촉촉한 입술에다 다시 몇 번 쪽쪽거리고는 이마를 맞댄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몸이 저릴 만큼 달콤한 빛을 안고 정서원을 바라본다.
“형, 무서워?”
“…….”
“무서워하지 마, 우리 애잖아.”
“……으응.”
“혼자 힘들었을 텐데, 내가 몰라 줘서 미안해.”
서진우는 그 후로도 한참 대답 없는 정서원을 끌어안고 있다가 환복을 마저 도와주었다. 한참 뒤에 커튼 밖으로 나온 그들에게 의사가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고생하셨어요, 마지막으로 혈액 검사하고 가시면 돼요.”
“고마워요. 갑자기 전화했는데 이렇게 신경 써 줘서.”
“우리 진우가 애 아빠 될지도 모르는데 당연히 신경 써 줘야지. 임신부는 애 아빠 페로몬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옆에 더 있어 줘.”
“그렇게 할게요.”
정서원은 서진우의 품에 안긴 채로 옷자락만 쥐고 있다. 아까는 그리도 안정되었던 품인데 이젠 불안한 속이 가라앉질 않았다. 형, 눈을 감고 있던 그에게 문득 서진우가 속삭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차디찬 귓바퀴를 만지는 손길에 정성과 애정이 가득했다.
“이제 상담 받으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갈까?”
“…….”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임신 이야기를 하는 곳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망설이는 정서원에게 자상하게 웃어 보인 서진우가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아래서 꾸물거리는 손을 이끌어 어루만진다. “싫어? 말을 해 줘야 알지, 형.” 그래도 대답이 없자 그는 품에 쏙 들어온 몸을 쓸어 주며 웃었다. “우리 형이 많이 놀랐나 보네. 얘기도 안 하고 데려와서 화났어?”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얌전한 얼굴 곳곳에다 입을 맞춘다. 병원 복도에서 보이기에는 다소 진득한 애정 표현이었으나 임신의 기쁨을 가끔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리 눈길을 끄는 광경도 아니었다.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금방 끝나니까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응?”
“…….”
“형이 대답을 해 줘야 내가 안심하고 다녀오지.”
“……알, 았어…….”
비로소 대답을 이끌어 낸 서진우는 진료실 앞 의자에다 정서원을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리고 잡은 손에도 입을 맞추더니 “금방 올게, 조금만 기다려.”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안심시켜 주었다. 정서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납작한 배에 손이 닿는다. 혼자 남은 정서원은 곧장 걷잡을 수 없는 상념으로 빠져들었다. 이 속에 든 게 정말 진우의 애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자꾸만 초조해졌다. 만약 아니라면, 겨우 찾은 다정함이 어떻게 변할지, 저 아름다운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그때야말로 정말 질려서 자신을 포기하는 건 아닐지…… 정서원은 주어진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결론지을 수 없는 고민을 계속했다.
아까 잠깐 보았던 캘린더는 7월이었고, 그가 서진우의 집으로 끌려 들어갔던 때가 5월이었다. 4월 둘째 주나 셋째 주에 히트싸이클이 있었으니 이번 달에 왔어야 하는 게 맞았다. 아마 꾸준히 그의 주기를 체크해 온 진우가 유심히 지켜보다 확인 차 데려온 것이리라. 거기까지는 짐작할 수 있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날짜를 알 수 없었다.
‘날짜만 알았더라도…….’
오늘이 며칠인지, 히트싸이클이 언제 올 예정이었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상현과 붙어먹었던 날이 언제인지도 알아야 했다. 고민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다. 무엇 하나 명쾌히 알 수 있는 게 없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진우는 다 아니까, 다 아니까 자기 아이라고 확신하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희망을 품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었다. 병원에 이미 함께 찾아온 알파가 있는데도 자꾸 다른 알파의 아이가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너무 미웠고, 또 화가 났다. 기뻐하는 진우에게 마주 웃어 줄 수 없던 순간이 사무쳤다.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던 정서원이 누군가 볼까 황급히 닦아 냈다. 눈물을 닦아낸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서원 님?”
“……?”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정서원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정서원은 제 얼굴에 울음기가 남아 있는 건 아닌지 신경을 쓰느라 남자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검사 받으시기로 했죠?”
“……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진우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제 알파가 기다리라고 했으니 못 간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가만히 젖은 눈을 굴리던 정서원이 결국에는 몸을 일으켰다. 남자를 따라 걷는 발걸음은 아주 조심스러웠으나 역시 방울 소리가 샐까 신경이 쓰여 한 손은 계속 스카프 안쪽 방울을 쥐고 있었다.
그가 처음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1층으로 내려와 밖을 나섰을 때였다. “어디까지 가요?” 오늘 하루 침묵을 지키던 정서원이 처음으로 타인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들었다는 듯 느긋하게 대답했다. “다른 병동에 있는 검사실에서 받으실 거예요. 금방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하니 아는 게 없는 그로서는 무어라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시무룩하게 바닥만 보고 걷던 그가 문득 멎은 걸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덧 주차장까지 와 있었다. 왜……? 그러나 질문을 내뱉을 틈도 없이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안겼다.
“아, 드디어 만났네. 우리 서원 씨.”
놀란 정서원이 저항하려다가 그가 익숙한 체취를 품고 있다는 걸 알고는 맘을 놓는다. 그날 이후 만난 적 없던 이상현이었다. 그런데 왜 그가 여기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왜, 왜…… 상현 씨가 여기에, 있어요?”
“매일 서원 씨 찾아다녔으니까요. 아, 당신 향기 오랜만에 맡으니까 더 좋아졌어. 씨발, 미치겠네.”
이상현은 정서원의 물음 따위에는 대충 대답하면서 품은 몸에 고개를 묻고 향을 취하는 데에는 열심이었다. 몸을 감싼 팔은 너무도 단단하여 결코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괴한인 줄 알았다가 맘을 놓았다고는 해도 놀란 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서원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양손을 모은 채로 숨을 골랐다. 이상현이 왜 여기에, 검사실로 간다더니 왜 여기로 왔지? 정서원이 당황한 눈을 굴리는 사이 이상현은 우두커니 선 그를 자연스럽게 이끌고 차에 태웠다. “잠, 잠깐만요, 상현 씨…….” 이상현도 그의 옆에 올라탔다. 기사가 따로 딸린 차였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정서원이 문을 열려고 했으나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상현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고는 눈을 맞췄다. 연하게 쌍꺼풀이 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진우한테 가게요? 미안하네, 안 보내 줄 건데.”
“왜, 왜…….”
“왜긴 왜야. 내가 진심이라고 그때 말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 섭섭하게.”
이상현은 경직된 몸을 품에 당기며 어루만졌다. 감싼 어깨부터 등, 허리, 손끝…… 하반신까지. 성애가 담겼다기보다는 무언가 확인하려는 손짓이었다. 그는 제 손길을 피하느라 비틀리는 몸을 가볍게 붙들면서 마지막으로 목에 맨 스카프에 시선을 두었다. 정서원이 당황하여 스카프를 붙잡자 그 노골적인 방어기제에 이상현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미약한 저항 따위는 아주 가볍게 무시하며 둘러맨 스카프를 손끝으로 풀어냈다. 주인의 이름과 번호, 거기다 방울까지 달린 목걸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상현이 헛웃음을 짓자 정서원의 창백한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이상현은 달랑거리는 방울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웃었다.
“진우가 예쁜 목걸이 해 줬네요?”
“…….”
“혼자서는 풀 수도 없게 해 놨네. 변태 새끼, 지 이름이랑 번호 박아 놓고 뭐하는 거래요. 응? 안 그래?”
그러더니 운전석의 남자로부터 펜치를 건네받아 달라붙은 목걸이에 길을 내기 시작한다. 정서원이 당황하여 몸을 빼려 하자 “얌전히 있어야지, 나 서원 씨 다치게 하기 싫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이 귓가에 떨어졌다. 정서원은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인 채 손끝으로 이상현을 붙잡았다. 이상현은 그 몸짓을 부드럽게 받아 주면서도 한 달 내내 풀린 적 없던 목걸이를 잘라냈다. 곧게 뻗은 하얀 목선에 두툼하고 단단한 쇳덩이가 살살 기어들었다. 뚝, 뚝, 두꺼운 가죽이 잘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정서원은 이상현의 품에서 몸을 떨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이윽고 목걸이가 완전히 잘리며 떨어지자 이상현은 곧장 창밖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던져 주었다.
“그거 갖고 서울이나 한 바퀴 돌고 있어. 아, 부산까지 가도 재밌겠네.”
“이상현 씨, 저, 저 목걸이…….”
“응? 목걸이 왜요. 저거 계속 달고 주인님이랑 살고 싶어서 그래요?”
“지, 진우가, 준 건데…….”
“우리 서원 씨는 서진우가 저기에 무슨 짓 해 놨는지도 모르나 봐. 모르면 계속 모르는 대로 있어요. 귀여우니까.”
허전해진 목을 만지는 정서원에게 이상현이 다정하게 웃어 준다. 그는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정서원이 몹시 귀여웠는지 손끝으로 얼굴 곳곳을 건드려댔다. 그러다가도 품으로 끌어당겨 드러난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체취를 들이마셨다. 정서원이 소극적으로 저항했다.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얼굴엔 아직도 당황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껏 외부 자극이라고는 하나 없던 그에게 오늘 벌어지는 일은 하나같이 감당키 어려운 것뿐이었다. 이상현은 그 멍한 얼굴에다 멋대로 키스하고는 운전석에 대고 차를 출발시키라고 명령했다. 그제야 정서원이 진작 했어야 할 질문을 한다.
“어, 어디 가는 거예요? 저, 내려 주세요……. 진우가, 기다리는데…….”
“서진우는 애새끼 기를 왜 이렇게 죽여 놓은 거야. 안 그래도 맹한 애가 더 맹해졌네.”
이상현은 짜증스럽게 말하다가, 제 눈치를 살피는 얼굴을 마주 보고는 결국 못내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는 다시 마주친 순간부터 품에서 단 한 순간도 떼어놓지 않은 정서원을 더 깊이 끌어당기며 눈을 맞췄다.
“서원 씨. 진우가 서원 씨한테 못되게 굴었어요?”
단정한 손끝이 귓가와 목덜미를 스치고 어깨를 멋대로 어루만지다 이내 꽉 붙든다. 움츠러든 어깨가 이상현의 품으로 빨려들었다.
“이렇게 기가 죽을 만큼 심하게 화를 냈나? 진우가 무섭게 혼냈어요? 우리 서원 씨 겁 많은 거 뻔히 알 텐데, 진우랑 잘 있던 거 맞아요? 사랑한다고 데려가더니 잘해 준 거 맞냐고, 응?”
달래 주는 것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오히려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하지만 정서원도 할 말은 있었다.
“제, 제가 잘못한 건데…… 진우가, 혼내는 건 당연한 거예요.”
“아니지. 그때 나한테 억지로 당한 거잖아. 왜, 진우가 안 믿어 줘요? 이제는 당신 말 하나도 못 믿겠다고 그래?”
“아, 아니, 아니야…… 아니에요…….”
“말은 왜 이렇게 더듬어. 그 새끼가 때리기라도 했나? 그렇게 좋다더니, 이젠 맘이 변했대? 서원 씨, 나 당신 걱정돼서 그래요.”
잠깐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홀려 버릴 것만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니라고, 여전히 아껴 주고 사랑해 준다고 반박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정서원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버리지 말아 달라고, 제발 그러지만 말아 달라는 무수한 애원을 진우는 여태껏 단 한 번 정정해 준 적 없었다. 마냥 상냥하던 예전에 비해 돌아오는 말도 모질어졌고 만지는 손에는 배려 없는 힘이 가득했다. 여전히 진우를 좋아하지만 진우는 이제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좀처럼 지울 수가 없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고인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서진우의 감정은 그러잖아도 불안하던 심장에 비수를 꽂는 것 같았다. 진우가 정말로 제게 질린 건 아닌지, 맘이 떠난 건 아닌지, 싫은 걸 억지로 끌어안고 사는 건 아닌지…… 지난했던 한 달간 싹터 온 의심에 쐐기를 박아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아파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써 믿어 온 것들이 모조리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가득 찬 눈물이 눈꺼풀을 깜빡거리기도 전에 이상현의 품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늘 응석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울던 사람이 소리 없이 울기 시작하니 이상현이 짧게 탄식한다. 그는 곧장 품으로 끌어당긴 몸을 정성껏 쓸어 주었다.
“아…… 울렸네. 왜 울고 그래요. 착하지. 울지 말고.”
“왜, 왜…… 그렇게, 말해요…….”
“내가 서원 씨 속상하게 했구나.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응?”
“진우는, 진우는 나…… 나, 안 싫어해요. 나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런 말, 하, 하지 마세요…….”
“응…… 내가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 우리 서원 씨를 누가 미워해요.”
큰 손이 등을 천천히 쓸어주고 그토록 위안을 받던 페로몬이 스며들었지만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애써 외면하던 사실을 억지로 직면한 탓에 울음만 더 번졌다.
이상현이 넘겨짚은 말은 모두 사실이었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도 결국 언제고 현실이 될 불안이었다. 정해진 일이 잠깐 미뤄졌을 뿐이다. 정서원은 내내 모질다가도 다정하던 서진우를 떠올렸다가 그를 못내 지겹고 성가시다는 듯 대하던 모습도 함께 떠올렸다. 그가 외출할 때면 이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에 떨었던 순간도 떠올렸다. 순종의 밑바닥에 내내 깔려 있던 불안이었고 우울의 원천이었다.
어제와 오늘, 아주 자상하게 굴어주긴 했지만 누구 씨인지도 모를 애가 들어앉지 않았더라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당장 오늘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혼을 내고 버릇을 길들이려 하다가도 어느 순간 질린 그에게 버림받았을 게 분명했다. 서진우가 자신을 보듬고 예뻐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한 번 싹튼 불안과 우울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상현의 품에 안긴 몸에서 울음이 끅끅거리며 터졌다.
“착하지. 그만 울어요. 응? 애한테도 안 좋아요.”
우울함이 턱 끝까지 잠겨 목이 메었다. 목이 메어 숨이 달렸고, 그 탓에 머리도 아팠다. 아주 나약해진 정서원은 혼자 힘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것처럼 버겁게 허덕였다. 결국 이상현이 가느다란 숨을 헐떡이는 얼굴을 붙잡고 등을 쓸어 주었다.
“진정하고, 숨 천천히 쉬어요.”
“하아, 하…….”
“응, 착하다. 우리 서원 씨, 숨도 잘 쉬네, 응?”
이상현의 말을 따라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로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이 떨어졌다. 정서원은 대꾸할 기력도 없어서 끌어당기는 품에 고개를 기댄 채 색색 숨만 몰아쉬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 주고 달래는 손길이 몹시 다정한 데다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페로몬은 또 아주 달아서, 그는 금세 안정을 찾았다. 품에 안긴 몸에서 울음기가 점차 잦아들었다.
한참 동안 울어댄 몸은 겨우 진정하자마자 탈진하여 늘어졌다. 정서원이 의지라고는 하나 없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이상현에게 안겼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가쁜 숨소리가 샜다. “좀 자 두는 게 좋겠어요, 서원 씨.” 이상현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가물가물 감기는 얼굴에다 속삭였다. 우울함에 흠뻑 빠져 허우적대느라 정신이 없던 정서원은 그제야 밀려든 수마를 느꼈다. 잠들고 싶지 않은 맘과 현실에서 회피하고 싶은 맘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잠깐 서진우가 떠올랐으나, 두렵고 무서워서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꾹 눈을 내리감은 얼굴을 이상현이 어루만졌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푹 자요.”
서원 씨 너무 연해졌네……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까닭 모를 포만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안정을 되찾은 몸에 쏟아지는 페로몬이 참 좋아서, 정서원은 이 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이름을 불러 주면 무감하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드리운다. 환하게 웃는 입가에 귀여운 보조개가 옴폭 그려졌다. 언뜻 싸늘해 보일 만큼 차가운 얼굴이 나를 향할 때마다 솜사탕처럼 달아지는 게 좋았다. 그러나 이젠 보기 힘든 미소이기도 했다.
만져 달라고 조르는 것 같은 작은 우물을 건드리는데 문득 손을 붙잡혔다. 크고 예쁜 손이 내 손을 아주 가볍게 그러쥐고 있었다. 어느덧 나보다 훌쩍 커져서는 어깨도 넓어지고 손도 발도 커지고, 몸도 단단해졌는데, 닿을 때마다 부드럽고 섬세하기만 하여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를 대하는 정성이 느껴져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휩쓸리듯 어영부영 사귀게 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다.
속이 울렁거려 가만 지켜보고만 있자, 진우는 눈매를 곱게 접으며 날 달래려는 것처럼 웃었다. 잡힌 손이 조심스럽게 깍지 끼어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온기와 얼굴이 가까워지며 흐르는 숨결은 현실처럼 생생했다.
‘왜, 형?’
짓궂은 장난기를 감추지 못한 목소리엔 웃음기가 배어 있다. 그것마저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물색없는 말은 잘하는 입이 왜 이럴 땐 열리지도 않는지, 그저 진우의 맘에 들었으면 하는 맘만 성급하게 차올랐다. 나는 최선을 다해 꼬리치는 개처럼 제발 예쁘게 봐 달라는 애원을 담아 활짝 웃었다.
* * *
정서원은 몸이 떠오르는 느낌에 얕게 정신이 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몽롱한 감각이 꿈과 현실을 구분 짓지 못하게 흐려 놓는다. 그는 저를 안고 있는 사람이 서진우인 줄만 알고 품으로 기어들었다. 꼭 안아 주는 품에서는 서진우와 비슷한 체취가 났다. 이토록 다정하게 구니 정말 꿈에서처럼 환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다. 눈을 깜빡거리며 흐릿한 시야를 잡으려고 했지만 까끌까끌한 시야로는 무얼 보기가 어려웠다. 포기하고 어깨만 깊숙이 끌어안자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 주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간질거렸다.
“진우야…….”
“자면서도 그 새끼만 찾네. 나 질투 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래?”
약간 한숨 섞인 웃음이 귓가로 떨어진다. 이상현이었다. 정서원은 그제야 서진우와는 약간 다른 체취나 체격을 눈치챘다. 그리고 서진우와 병원에 갔던 일을 떠올렸고 뒤이어 애를 밴 사실도 기억해 냈다. 이상현의 씨인지 서진우의 씨인지 명확히 알 수도 없는 애 말이다.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꿈같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불안하게 뛰는 가슴은 너무나 생생해서 희망조차 품을 수 없었다.
정서원은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가슴팍에다 이마를 기댔다. 열린 모든 가능성을 무시하고만 싶다. 버겁고 힘든 사실을 영영 모른 체하고 싶었다. 어린애 같은 회피 욕구인 걸 알고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정서원은 눈을 감고 당장의 안정을 쫓았다. 부드럽게 흘러드는 페로몬은 서진우가 없을 때 붙잡고 위안을 받았던 그 페로몬이다. 익숙한 페로몬에 울렁거리는 속이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잠깐이나마 떠올랐던 의식이 다시금 밀려든 수마에 잠겨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몸이 묵직하고 팔다리가 나른하여 계속 누워 있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푹신한 이불에 파묻힌 채 몸을 뒤척거리던 그는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들리던 방울 소리나 쇳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맨살에 이불이 아닌 옷이 부대끼는 느낌도 생소했다. 그간 아무리 시간 감각이 모호했다고는 해도 괴이함에 익숙해져 외려 허전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진우 밑에서 말만 할 줄 아는 짐승처럼 길러졌더니 정말 완전히 길들여진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
달칵. 잠에 취해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다시 감기려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떠졌다. 정서원은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가온 이상현이 기운이 다 빠진 몸을 지탱해 주었다.
“졸리면 더 자도 돼요.”
“……여기 어디예요? 저, 집에 가야 되는데…….”
“서원 씨 몸이 별로 안 좋아요. 너무 운 데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아무 생각 말고 쉬어요.”
“그치만…….”
몸을 일으키고 싶은데 상태가 여의치 않다. 나른한 몸이 결국 이상현의 품에 기대어졌다. “집에 가야 되는데…….” 아직 잠에서 덜 깬 것도 아니건만 서진우 외의 사람과 대화하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단어는 떠오르는데 그걸 혀로 굴려 입 밖에 꺼내는 게 몹시 어색했다. 몇 달 만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정서원은 이번에는 정말 또박또박 말하려 신경을 쓰며 어물거리는 말투로 천천히 내뱉었다.
“진우가 기다리라고 했는데요……. 진우가 화내요, 혼낼 거예요. 저, 집에 갈래요.”
“아. 우리 서원 씨 가여워서 어쩌나. 보통은요, 갇혀 있던 곳을 집이라고 하지 않아요.”
“…….”
굳이 나쁘게 말하는 이상현 때문에 정서원은 속이 상했다. 사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어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는 것에 가까웠다. 더는 진우와 예전 같을 수 없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는데, 구태여 서진우의 냉대를 하나하나 짚어 주는 태도에 서러움도 올라왔다. 그래 봤자 모두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서진우 몰래 이상현과 몸을 섞던 것도 그였고, 페로몬에 취해 안아 달라고 빌던 것도 그였다. 누굴 탓할 주제가 못되었다.
입을 꾹 닫아 버린 얼굴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정서원은 더 울고 싶지가 않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참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꼭 붙들고 있는 이불보에 눈물 자국이 번졌다. “아, 또 울렸네.” 아주 안타까운 듯 탄식한 이상현이 그를 제 품으로 당기며 눈물을 닦아 준다. 그러더니 이불보만 그러쥐고 있는 손을 붙잡고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정서원은 묵묵히 속눈썹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왜요. 내가 또 서원 씨한테 상처 주는 말 했어요?”
“이상현 씨도 저, 멋대로, 데리고 온, 흑. 거잖아요…….”
“눈물도 많아지고, 겁도 많아지고, 기는 푹 죽어서. 대체 어떻게 지낸 거예요. 속상해 죽겠네.”
이상현은 정서원의 말을 썩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정서원은 그게 제 물렁한 말투 때문인가 싶어 어절마다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저, 저, 보내 주세요.”
“서진우는 화만 낼 거고 또 무섭게 굴 텐데, 정말 가고 싶어요?”
“저 가야 돼요…… 진우가 화내요.”
“눈 뜨자마자 진우, 진우, 진우. 그렇게 서진우가 좋아?”
은근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어린애 다루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서원은 도저히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이상현에게 기분이 상해 입을 닫아 버렸다. 흘겨보는 눈에는 아직 눈물이 고여 있었고 보기 드물게도 원망도 글썽거렸다. 나름대로 기분이 상한 티를 내는 것 같은데 수위가 밋밋하니 이상현에게는 웃음만 안겨 줄 뿐이었다. 이상현이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정말 궁금하다는 어투로 물었다.
“내가 당신 안 보내 주겠다면 어떡할 건데요, 응?”
“……이상현 씨가, 무슨, 권리로요…….”
“서진우도 당신 좋아한다는 이유로 가뒀잖아. 나도 그런 걸로 하죠.”
내내 서진우와 정서원을 손바닥에 둔 것처럼 갖고 놀던 그가 제 감정은 대수롭지 않은 말처럼 흘려보낸다. 그토록 가벼운 말투였다. 정서원은 이상현이 조금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짜증이 났지만, 이조차 누굴 탓할 수 없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서진우가 서릿발처럼 싸늘히 구는 것도, 이상현이 자꾸만 책임을 묻는 것도, 결국에는 모두 그가 처신을 잘못해서 생겨난 일이었다. 밝히니까, 걸레처럼 몸 간수도 못하니까. 정말, 진우가 질릴 만했다.
“…….”
겨우 그친 눈물이 풀이 죽은 얼굴에서 뚝뚝 흘러내린다. 울음을 참으려고 앙다문 입술이 벌벌 떨렸다. 정서원은 눈물을 닦아 주려는 손을 고개를 저어 피하고는 이불을 끌어당겨 눈가에다 비볐다. 이상현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심통이 났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태도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겨우 나아진 서진우와의 관계를 당신이 망가뜨렸으니 책임지라며 화를 낼 만도 한데 순 맹탕이라 그러지도 못한다. 참 한심하고 귀여웠다.
“왜, 그런 이유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럼, 서원 씨 편하게, 애 아빠로서 행사하는 권리라고 생각해요.”
이불에 얼굴을 비비던 몸짓이 뚝 끊겼다. 고개를 든 정서원이 발개진 눈을 크게 뜬 채 이상현을 바라본다. 눈물 때문에 투명하게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상현은 딱히 설명을 덧붙여 주지 않은 채로 젖은 눈가나 쓸어 주고 있다. 눈물이 흐르는 족족 이상현의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벌어진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참 벙긋댔지만 목소리가 나온 것은 결국 딸꾹질까지 오른 뒤였다.
“……아니야. 아니에요. 흑, 진우, 진우 앤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지, 진우가, 진우가 자기 애라고…….”
“진우야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죠. 서원 씨도 참, 순진하네.”
배 속에 든 씨의 근본이 진우라는 말에 근거는 없었다. 진우가 그렇게 말해 줬다는 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상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정서원은 “아니, 아닌데…….” 울면서도 제대로 반박할 말이 궁하여 이상현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입술이나 불러온 눈빛이었다. 이상현은 정서원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싼 채로 아주 부드러운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입을 벌리라 달랠 필요도 없었다. 같은 말만 반복하던 입술은 제자리인 듯 침투한 혀를 밀어내지도 못한 채로 간간이 숨만 헐떡거렸다. 이상현이 입 안 곳곳을 건드릴 때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페로몬이 흘러들었다. 서진우가 없을 때 붙잡고 위안을 받았던 그 페로몬이었다. 정서원은 학습된 개처럼 경계가 누그러지고 편안함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시리게 에이던 속이 뜨겁게 뭉클거렸다.
이상현은 얌전한 입술을 맘껏 탐한 후에야 물러났다. 그는 아직 목덜미를 감싼 손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페로몬에 녹진녹진 허물어진 정서원과 눈을 맞췄다. 몽롱한 눈과 흑심 가득한 시선이 맞닿았다.
“서원 씨 아이, 몇 주째래요?”
“이, 제…… 5주, 됐다고 했어요…….”
“진우가 서원 씨한테 그것만 알려 줬어요?”
“쌍둥이라고…… 우리, 아이라고 했, 어요.”
묻는 족족 순순히 털어놓는 정서원을 이상현이 몹시 기특하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우리 서원 씨, 마냥 앤 줄만 알았는데 한 번에 새끼를 둘이나 갖고. 응? 기특하네, 정말.”
“……진우, 애예요…….”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묘한 어투에 정서원은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혹여나 그의 입에서 불안을 크게 불릴 말이라도 나올까 두려워서였다. 이상현은 시무룩하게 입을 다문 얼굴을 제멋대로 만져댔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을 만지는 손길에는 언뜻 아로새기겠다는 정성까지 엿보였다. 섹스를 목적으로 만났던 관계에서 오갈 법한 손길은 아니었다. 정서원은 간질거림을 견디다 못해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했다. 이상현은 바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담백한 어조로 물었다.
“조금 더 쉴래요?”
“……집에, 안 보내 주실 거예요?”
“그 새끼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서원 씨 혼이나 내고 못살게 굴던 놈인데?”
다정한 목소리에 정서원은 잠깐 답을 망설였다. 젖은 이불보만 만지작거리는 그를 지켜보던 이상현은 새삼, 이번엔 서진우가 정말 교육을 잘 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이 날 걸 두려워하면서도 귀소본능을 지우지 못하는 정서원은 깊이 학습된 무력감이라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기회가 주어져도 케이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가여운 강아지처럼 말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뿌리에 두려움보다는 애정이 더 짙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게도 속이 뒤틀렸다.
손끝으로 이불만 만지작거리던 정서원은 한참 뒤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요, 진우…….”
“참 순애보네. 서진우는 당신 이러는 거 아는지 몰라.”
정서원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울고 또 우느라 젖은 속눈썹에 자그만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퍽 애틋한 모습이라 이상현은 손을 뻗어 눈가를 닦아 주고 젖은 뺨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하얗고 말랑한 살결이 그의 손안에서 부들거렸다. 정서원은 그의 손짓을 따라 눈을 감았다가 떠 가며 습관처럼 눈치를 살폈다. 순진한 주제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뻗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이토록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자니 놔준다고 해도 홀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아주 물러져서 세상에 내놓는 순간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나 일부러 감춘 말까지 떠벌리고 싶어진다. 이상현은 손을 떼어 내고는 우느라 기운이 빠진 몸을 다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조금 더 자요. 서원 씨 좀 쉬어야 돼요. 자고 일어나면 서진우 보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누워요.”
“정말요?”
“내가 서원 씨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
“아, 못 믿네. 그럼 나도 서진우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 서원 씨 가둬 버릴까요?”
정서원이 급하게 고개를 젓는다. 이상현은 웃음을 참지 않더니 창백한 얼굴에다 제멋대로 입을 맞췄다. 의도적으로 흘리는 페로몬이 불안해하는 오메가를 안정시키고 잊고 있던 수면욕을 불러일으킨다. 정서원은 밀려드는 수마에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잠들기 영 싫어하는 눈치였다. 속이 빤히 보였으나 귀엽게 웃어넘길 만한 수준이었다.
“당신 잘 때 수상한 짓 안 해요.”
이상현은 다정히 달래 주었고, 정서원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을 놓아 버렸다. 경계를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자신의 뭘 믿고 경계를 푸는 건지 모를 일이다.
순식간에 잠이 든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이상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한다. 그는 서진우를 지방까지 돌게 만들어 놓고는 서울 도심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느긋하게 정서원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핸드폰은 이미 서진우가 보낸 연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에 있느냐는 메시지를 수십 개나 보낼 만큼 절절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아, 이 새끼 좋은 일을 해 줘야 하나.”
그렇다고 임신 초기의 오메가를 무작정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서원이 잠든 사이에 불렀던 의사도 유산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각별히 신경 쓰라는 말을 남겼었다. 결국 또 울리기는 했으나, 정말 모질게 굴 작정이었다면 누구의 씨인지 정확하지도 않은 수정란 따위 떨어뜨리고 확실한 제 씨를 심었을 것이다. 정서원이 울든 말든 말이다. 아주 솔직히, 그럴 심산이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정말 그랬다가는 아예 망가질 것 같았다.
이상현은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켜 가장 최근에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 이 씨발 새끼야. 너 어디야.
“진우야, 왜 욕부터 하고 그래. 무서워서 끊을 뻔했네. 끊을까?”
- 정서원 어디 있어.
“서원 씨는 지금 내 침대에서 푹 자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 이, 씨발…… 걔 임신 중이야. 허튼짓하지 마.
건드리는 대로 반응을 해 주니 뒤틀린 속이 조금이나마 풀린다. 이상현은 제대로 대답을 내어 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거짓말은 안 하더라도 교묘하게 에두르는 화법은 늘 서진우의 의심만 키워 놓았다. 이를테면 서진우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정서원의 속내 따위나 히트싸이클, 가까운 일로는 출근을 한 사이에 붙어먹었던 일 따위 말이다. 서진우는 혹여나 정서원이 그에게 구구절절한 감정이라도 가진 줄 알고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풋풋한 감정은 아니었다. 참 순진한 얼굴로 못된 짓을 잘하는 정서원은 이상현을 늘 자기 좋을 대로 써먹었다.
부엌에서 술을 가져오려던 이상현은 취한 뒤 정서원에게 무슨 짓을 할지 스스로 자제할 자신이 없어 물을 따랐다. 서진우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운전을 하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아마, 그가 있는 곳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서원 씨 배에 있는 애가 네 씨는 맞고?”
- 신경 꺼.
“어떻게 신경을 꺼. 내가 씨를 한두 번 뿌린 것도 아닌데. 그 귀여운 배에 내 새끼가 들어앉았을 수도 있지. 안 그래?”
- 씨발, 입 안 닥쳐?
“미안하네, 뚫린 입이라 닥치지를 못해서.”
갑자기 차가 사납게 정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다 사고라도 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정서원이 꽤 슬퍼하겠다. 이상현은 느긋하게 물이나 마셔 가며 한참 대답 없는 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했다. 정서원에게는 서진우를 불러 주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운전 미숙으로 사고 따위를 일으키는 놈이야 알게 뭔가.
이상현이 전화를 끊으려던 때, 인터폰 벨소리가 울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 곳이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는 기가 차서 웃었다.
“이 새끼, 다 찾아놓고 내숭 떤 것 좀 봐. 존나 가증스럽네, 어?”
- 문이나 열어.
“진우야, 대뜸 찾아와 놓고 너무 예의가 없는 거 아냐? 응?”
- 씨발, 문 열라고.
초조함이 그대로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참 지극정성이었다. 이렇게 아끼면서 왜 밖에다 내놓고 제대로 간수도 안 하는지, 맘 약한 애새끼는 애인을 볼 때마다 애틋해지는 모양이었지만 그럴수록 관리를 잘해야 하는 법이다. 누가 가로챌 줄 알고.
이상현은 뜸 들이지 않고 현관으로 향했고, 성격답지 않게 얌전하게 기다리는 서진우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곧장 날라든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잠깐 휘청거리던 몸을 서진우가 멱살을 잡아 붙들었다. 분노가 사납게 일렁거리는 얼굴은 당장 살인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일전에는 노리는 바가 있어 얌전히 맞아 주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윽……!”
그는 서진우의 명치를 때리고 빠져나와 잡혔던 멱살을 털어 냈다. 사이좋게 한 대씩 주고받은 면면들이 이제는 가식 한 점 없는 분노로 일그러진다. 이상현은 뒤틀린 속내를 감추지 않고 빈정거렸다.
“진우야, 우리 서원 씨 이제 막 잠들었거든? 괜히 소란 피우지 말자?”
“씨발, 걔한테 손댔어?”
“그랬으면 어쩌려고 진우야. 서원 씨가 너 없는 사이에 내 좆 한두 번 받는 것도 아닌데. 응?”
지켜보는 눈도, 사이에 낀 정서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서로 반목하는 사이에서는 처음으로 단둘이 대면하는 상황이었다. 구태여 참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더는 거리낄 게 없어진 서진우는 내내 바라왔던 것처럼 뻔뻔한 낯짝에다 주먹을 내질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 큰 남자 둘이 사납게 뒤엉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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